길보른, 동양의 영혼들을 향한 선교사역으로의 부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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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신학
오상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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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1회 길보른기념강좌' - ③
▲찰스 카우만(좌), 어네스트 길보른(우)   ©pasteve.com

[기독일보] 1899년 2월, 카우만 부부는 길보른 가족과 함께 하는 선교사역을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길보른은 가겠다는 답변을 미루었다.

박문수 박사는 "9월 7일에 레티 카우만은 기록하기를 '길보른 형제와 함께 하는 선교사역에 대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알고자 노력할 때, 하나님은 내게 그것을 위해 잠시 기다리라는 비전으로 하박국 2장 3절의 말씀을 주셨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더딜지라도 기다리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사실, 어니스트 길보른이 동양의 영혼들을 향한 선교사역에 헌신하도록 이끈 것은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다. 동양선교회 회장인 어니 부부는 동양에 신앙 선교사(Faith Missionary)로 나가도록 길보른에게 임했던 극적이고 독특한 부르심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며 "그는 환상 중에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까지 연결된 아치형의 큰 고속도로를 보았다. 그 다리는 일본으로부터 한국에 닿았고, 또 다시 한국으로부터 세 번째로 중국에 닿았다. 그리고 중국으로부터 그 고속도로는 직접 천국에 연결되어진 것을 보았다. 이렇게 분명한 환상을 본 길보른은 평생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죽기로 결심한다"고 전했다.

박 박사는 "이응호는 '이때 보았던 환상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이루어진 모든 선교사역을 지배하고 있었다'라고 평가했다"며 "그때부터 길보른은 동양의 영혼들을 위한 중보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기도하면서 미전도 주민들을 마음속에 그리며, 자기 손을 아시아의 나라들에 얹어놓았다. 특히, 일본의 지도에 장시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고 했다.

박문수 박사는 "어니스트 길보른은 1899년에 무디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을 졸업하고, 이어서 하나님의 신학교(God's Bible School)에서 공부한 후, 1901년 1월에 시카고에서 카우만과 함께 평생 선교에 헌신하기로 결단하면서 사도성결연맹의 마틴 냅, 셋 리스, 스토커 목사 등으로부터 목사안수를 받고 선교사로 임명받는다"며 "여하튼, 그가 출석하던 그레이스 감리교회와 무디 성서교회의 선교대회에서 알게 된, 일본에서 온 나까다 쥬지와의 교제를 통해 어니스트는 동양에서의 선교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깨달았다"고 했다.

덧붙여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 그리고 나까다 쥬지는 온전성화의 경험을 통한 성령의 충만이라는 성결에 대한 강조와 함께 일본 땅에 성서훈련원을 설립하려는 비전을 공유하고 있었다"며 "그 결과, 1904년에 길보른은 카우만과 함께 일본에서 대지를 구입하여 건물을 신축하고 동양선교회라는 이름으로 동경성서학원을 개원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8년의 준비과정은 1908년 경 출판한 자서 전 『일본선교이야기』에 잘 나타나 있다"고 소개했다.

박문수 박사는 "드디어, 어니스트 길보른은 자주 출석했던 교회가 그들에게 충분한 후원을 약속했기에, 아무런 걱정없이 일본으로 향하는 배를 예약하려고 샌프란시스코로 출발했다. 그러나 막상 후원을 약속한 교회로부터 출발 직전 그 약속이 취소되었다는 전보를 받고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 지도자들이 내분에 빠져 후원서약이 취소되었던 것이다"고 그에게 들이닥친 난관을 전했다.

이어 "그러나 이 소식에도 길보른은 낙심하지 않고 믿음의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나는 하나님께서 일본에 가는 것을 원하신다고 확신한다'고 다짐하며 '신앙 선교'(Faith Mission) 정신을 강조했다. 또한 아내에게는 '나는 물(바다) 위로 걸어갈 수 있소!'라고 당당하게 말했다"며 "드디어 두 사람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석탄을 연료로 한 증기선인 일본선박 니뽄 마루(Nippon Maru) 호에 승선하여 24일만인 1902년 8월에 요코하마에 도착했다"고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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