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는 논제 6에서 다소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개념을 논한다. 곧,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행하는 사역들도 죄가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영원한 공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통해 일하신다 하더라도, 죄된 인간의 모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행위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하나님이 인간 안에서 사역을 행하실 때 조차도 본질적인 인간의 죄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루터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전도서 7장 20절을 인용한다: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 어떤 이는 이 구절이 '의인이 실제로는 죄인이지만, 선을 행할 때는 죄인이 아니다'고 해석한다. 전도서의 말씀은 '죄를 범하지 않는 의인이 이 땅에는 없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고 루터는 주장한다. 루터는 이 구절에 근거하여, 심지어 하나님이 의로운 자들을 통해 행하신 선한 사역들도 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여기서 루터는 믿는 자들을 완벽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흠 있는 도구에 비유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구로 사용한다고 해서, 흠 있고 보기 흉한 인간의 죄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심지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행하시는 일을 통해서도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된다.
논제 6은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죄와 은총에 대한 루터의 근본적인 견해와 상통한다. 루터의 이 교리는 기독교인의 실존에 정욕과 욕망이 없어지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는 죄의 현존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루터는 기독교인들이 세례를 받았으므로 죄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었고, 스스로 의를 얻었다고 확신한 가운데 교만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성실하게 응답하지 않고 안이하고 무책임한 삶을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무섭게 책망한다.
"세례를 받았거나 혹은 사면을 받은 자들은 자기들이 즉각적으로 무죄한 상태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의를 얻었다는 느낌을 가지고 그 확신에 차게 된다. 그리고 슬픔과 신음 속에서 싸우고 몰아내야만 하는 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빈둥거리고 있다"(p. 212).
오히려 루터는 기독교인은 세례 이후에 '신음과 필사의 노력 끝에 흘리는 슬픔의 눈물'로 가득 찬 죄와의 싸움을 치러 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의는 죄된 인간을 실제로 의롭게 하는 것(make a sinner righteous) 이 아니라, 의롭다 칭하는 것이다(justify a sinner righteous). 이것이 바로 루터가 말하는 '의인이자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의 교리이다. 루터는 『로마서 강해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의로운 성자들 또한 동시에 죄인들이다. 성자들은 의를 덧입혀 주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의가 그들에게 전가되기 때문에 의롭다. 그러나 그들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죄의 정욕이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여전히 죄인이다" Luther: Lecture on Romans: the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p.. 208).
그래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이 의롭다는 것의 의미는 완전무결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사람의 영적인 태도가 하나님을 향해 새롭게 방향 설정되었다는데 그 본질적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논제 6은 우리에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진다: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죄가 없는 의인이라는 착각 속에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교회 내에서 직분이 높다고 하나님의 의를 얻었다는 착각 속에서 나태한 기독교인의 모습은 아닌가? 병 고침과 방언, 성령의 기적을 체험했다고 교만하여 회개를 잃어버린 무책임한 기독교인의 삶을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루터는 "우리가 죄와 싸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비록 비난 받을 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죄가 우리 안에 들어있다"고 말한다. 기독교인의 삶은 '쉽고 편안한 삶이 아니라 정욕과 더불어 싸우든 힘든 노역"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