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1517년 10월 31일은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곽 교회에 붙였던 95개 논제를 붙인 날이다. 이 날은 종교개혁사뿐만 아니라 일반 역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사건이다. 사람들은 이 날을 마치 루터가 커다란 망치 소리를 내며 교회의 95개 논제를 붙임으로 중세 교회의 종말을 고한 사건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종교개혁은 마치 면죄부 판매에 대한 루터의 반박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 실제 그 당시 역사적 정황은 어땠을까?
사실 학문적인 토론을 위해 논제를 게시하는 일은 당시 독일 대학에서 흔한 일이었고, 루터가 면죄부에 대한 반박이나 토론을 게시한 유일한 사람도 아니었다. 실제로 루터가 95개 논제를 게시하기 약 6개월 전인, 1517년 4월 26일에 당시 비텐베르크 학장이었던 칼슈타트가 면죄부에 대한 논의를 포함한 151개 논제를 게시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그 면죄부를 결정한 날짜와 장소가 루터의 방식과 동일했다는 점이다. 칼슈타트 역시 비텐베르크 성곽 교회에 유물 전시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날을 잡아 자신의 반박문을 게시했다.
루터가 95개 반박문을 만성절(the Fest of All Saints, 11월 1일) 전날인 10월 31일에 게시한 것도 유물 전시로 사람들의 왕래가 많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미 칼슈타트가 6개월 전에 사용한 방식과 똑같이 자신의 논제를 게시한 것이다.
또한 루터가 95개 논제를 게시하고 몇 달 지나지 않은 1518년 5월, 파리에 있는 신학대학에서도 루터의 95개조 반박문과 비슷한 비평문을 게시했다. 여러 면에서 루터의 95개 논제와 비슷했으니, 루터의 경우처럼, 이단 혐의는 고사하고 그 내용에 대해 교황청으로부터 그 어떤 비난도 받지 않았다.
루터가 쓴 작품을 보더라도, 95개 논제 보다는 그 보다 약 한달 전에 쓴 소위 "루터의 스콜라 신학을 반박하는 97개 논제"가 어느 면에서 95개 논제보다 좀더 날카롭고 공격적인 내용을 더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붙인 95개 논제가 종교개혁의 기념비적인 날로 기억되는 것일까? 혹자는 인쇄술의 발달이 그 원인이라고 말한다. 실제 95개 논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판매함으로써 잇속을 챙기고자 하는 사람들로 인해 95개 논제가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역사가들은 이를 두고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부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하나님의 역사다. 루터 이전과 이후에 유사한 논제들이 있었지만, 하나님은 루터를 통해 타락한 교회 역사와 더 나아가 이 세계의 역사를 개혁하고자 하셨다. 하나님이 정하신 날, 그것이 바로 1517년 10월 31일이다. 루터는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1517년 10월 31일을 종교개혁의 기념비적인 날로 기억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참된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루터의 종교개혁이 아니라,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마틴 루터를 통하여 역사하신 하나님의 종교개혁" 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지 않겠는가?
흔히 '루터란'(Lutheran) 하면 "루터를 따르는 사람들"을 뜻한다. 이것은 가톨릭 교도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그래서 '루터란'하면 마치 루터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람들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루터란이란 말은 루터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교회와 세상을 개혁하기 위한 도구로 써달라는 간절한 간구를 의미한다. 동시에 그것은 루터처럼 그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따르겠다는 결단과 헌신을 의미한다.
■ 종교 개혁은 면죄부 판매 때문에 일어났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된 동인을 논할 때, 흔히 중세 교황의 절대 권력에 대한 루터의 저항, 또는 중세 로마 교회의 면죄부 판매의 부당성 지적 등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요소들도 종교개혁의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1517년 중세 후기에는 이미 교황이 지닌 영적, 정치적 권위는 상당부분 감소되고 있었다. 더구나 루터 이전에도 면죄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있어왔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의 동인이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중세 후기 교회 내의 칭의론에 관한 상당한 혼란이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칭의론은 "구원을 얻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에 대한 답변이다. 그러나 중세 후기 교회는 이러한 질문에 답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529년 소집된 오렌지 제 2차 종교회의 이후로 1545년 트렌트 종교회의에 이르기까지 약 천 년의 시간 동안 칭의론에 대해 논의된 교회회의는 없었다. 또한 교육을 받지 못한 성직자들로 인해 이러한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었다. 도리어 교회는 중세 후기 교회 내의 이러한 칭의론에 대한 혼란을 면죄부 판매의 방식으로 악용하고 있었다.
루터가 직면한 도전도 이와 같은 것이다: "어떻게 죄인이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시작할 수 있을까?" 고뇌에 찬 루터의 이 질문에 대해 답해준 성경구절이 바로 로마서 1장 16절-17절 말씀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이 말씀에 근거해 루터는 중세 후기 교회가 답하지 못했던 질문, 곧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인간은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에 대한 답이 바로 루터의 종교개혁 3대 슬로건이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서만으로!" (sola fide, sola gracia, sola scriptura)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루터가 말하는 이 "오직"(Sola)은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용법으로서가 아니라, 언제나 그 중심성을 강조하는 용법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오직 믿음" 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믿음" 이외에 인간의 선한 행위나 인간의 노력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은 오직 그 분이 주시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선한 일들을 행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참되고 진실된 믿음만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을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다.
필자가 보기에 최근 한국 교회와 사회에도 이 칭의론에 대한 상당한 혼란이 존재하는 듯 보인다. 왜곡된 구원론에 관한 교리로 수 많은 기독교인들을 현혹시키며, 탐욕과 탐심에 눈이 먼 나머지 수많은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세월호 침몰 사건과, 교회 세습과 재정 횡령, 온갖 비리로 얼룩진 한국 교회를 바라보면서 그 어느 때 보다도 올바른 칭의론 교리 확립이 중요한 때라고 생각한다.
루터는 이 칭의론의 교리야 말로 "교회를 세우기도 망하게도 하는 조항" 이라고 말 할 만큼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종교개혁 497주년을 앞둔 지금, 교회와 사회를 개혁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루터와 같은 결단하고 헌신하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이 더 많아지기를 기도한다. 자기 확신과 신뢰, 번영과 성공의 세속적인 물결이 설교와 신학까지 잠식해 버린 지금,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서'라는 종교개혁의 슬로건이 다시금 한국 교회에 울려 퍼지기를 바란다. 올바른 칭의 교리를 세우는 일이야 말로 교회 개혁의 첫 걸음임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