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복지시설에서 훈육 차원으로 아이들의 뺨을 때린 것까지 '아동학대'로 볼 수는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연합뉴스 2014년 10월 3일)
실수로, 홧김에 그랬다면, 아이에게 사과해야 한다. 복지시설 원장이 그 아이들에게 사과는 했는가. 아이이건 어른이건 뺨을 때리는 것은 인격모독이다. 언제까지 이 나라는 '아이'를 사람으로 보지 않으려는가. 아이를 방만하게 두는 것도 문제이겠지만, 뺨을 때리는 식은, 더 이상 교육이랄 수가 없다.
크게 보면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 때문이다. 성인 남자를 기준으로, 그것도 높은 지위나 연장자에게 무조건적인 권위를 돌리는 관행이다. 어린아이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니 이 사회에서 '여자'이고 동시에 '어린' 아이의 인권이란, 말할 것도 없다.
시카고에 있을 때에, 시카고 트리뷴이라는 신문에 정기적으로 기사를 쓰는 한 기자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는 일평생, 아동학대에 관한 사건들을 쫓아다니며, 그 참혹한 사실들을 세상에 알렸다. 부모가 지하실에 가두고 학대해왔는데 굶주림과 매질에 못 이겨 6살 난 오빠가 4살 된 여동생을 데리고 한 겨울에 맨 발로 탈출한 사건을 쓴 기사도 읽은 적이 있다. 일평생, '지극히 작은 자들'인 이 학대받는 아이들에게 일평생을 바친 그 기자가 존경스러웠다.
우리나라 도시들이나, 마을들을 보면, 거의 식당 중심이다. 가족들이 모여도 함께 갈 곳이 식당 외에는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이 유흥시설이다. 성인 남자들이 즐길 시설들 중심이다. 사실, 마을마다 가장 좋은 건물, 시설, 우리의 세금이 가장 많이 투자되어야 하는 곳은, 마을 도서관이다. 선진국이라면, 마을 도서관이 마을의 중심인 경우가 많다.
구의회나 때로 시의회도 따로 화려한 건물을 만들지 않고, 필요할 때마다 그 지역 중앙 도서관 건물 한 구석에서 모이는 경우도 많다. 마을 도서관에서, 온 가족을 위한 다양한 문화 활동을 제공 받는다. 직장에서 일찍 집에 돌아가도, 도서관을 중심으로 가족과 할 문화 활동들이 많다. 그래서 미국 민주주의의 뿌리는 마을 도서관이라 했을 정도이다. 국민의 의식 정도가 높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쉽게 퇴행하기 때문이다.
세월호의 비극의 중심에는 '아이들'이 있다. 돈과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경제 질서 속에서, 역시 돈과 경쟁을 획득하게 하는 서열중심의 교육에 짓눌리고 휘말리다가, 수학여행, 아, 그 불꽃놀이 같은 자유와 여유를 꿈꾸던 아이들이, 역시 '돈과 경쟁'이 전부인 부패한 '어른들'의 끔찍한 세월호를 타고, 그 차가운 바다 속, 불꽃처럼 스러져갔다.
아이들이 목마르다. 아이들이 슬프다. 아이들이 뺨을 맞는다. 아이들이 힘들다. 숨을 못 쉰다. 뺨을 맞고 크는 보육원 아이들에게서, 방과 후 여전히 밤늦게까지 학원을 전전 긍긍하는 아이들의 뒷모습에서, 거리에 나서도 술집과 식당 틈틈이 끼어 있는 pc 방 계단으로 빨려 들어가는 청소년들에게서,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불안한 '세월호'의 계속되는 항해를 본다.
어쩌면, 정말 말로만 했던 그 '국가개조'가 필요한지도 모른다. 국가는 주권과 국민 그리고 영토로 이루어진다. 국가개조가 되려면, 통치 방식이 '돈과 탐욕'이 아니라, '생명과 평화'이어야 한다. 그런 것을 선거용으로만 떠들지 않고, 실제로 제도와 실천을 통해 진작시킬 수 있는 지도자들이 통치해야 한다.
국가개조가 되려면, 영토를 '돈과 탐욕'의 방식으로 사용하는 일을 중단해야 한다. 밀양, 제주, 사대강 모두 한 가지를 향하고 있다. 돈과 탐욕과 전쟁이다. 그렇게 영토를 사용하면서, 국가개조를 이야기 하는 것은 모순이다.
그리고 국가개조가 되려면, 국민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사회를 탓하기 전에, '돈과 탐욕'을 숭배하는 복음을 가르치며, 그런 세속화된 복음으로 스스로를 더럽히는 기독교, 그런 종교로는 결코 시대를 인도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이 저 차가운 바다 속으로 계속 빠져 들어가는 것조차 막아낼 수 없다.
세월호, 잊는다고 없어질까. 그 아우성은 그대로 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그래서 그 배와 더불어 침몰한 하나님의 형상인 그 '아이들'이, 이 일그러진 시대, 일그러진 어른들의 형상의 사회에 던지는, 가슴 아프고 무서운 경고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 울부짖음을 겸허히 들을 때, 그 아이들이 우리를 새로운 사회로 인도할 것이다.
기도가 간절해지는 하루이다.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 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시 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