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제 3> 인간의 행위들은 언제나 매력 있고 선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들은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와 같을 뿐이다.
겉으로 보기에 인간의 행위들은 매력적으로 보인다. 인간의 행위들은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께서 바리세인들과 연관하여 말씀하셨듯이(마 23:27), 그 안을 들여다 보면 불결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외적인 것으로 심판하지 않으시고, "마음과 심령"을 감찰하신다(시 7:9). 은혜와 믿음이 없이는 순결한 마음을 가질 수 없다. "하나님은 믿음을 통해 그들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신다" (행 15:9).
이 논제는 다음의 방식을 통해 입증된다: 하이델베르크 논쟁 7(만일 의로운 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경외함 없이 자신들의 행위를 "죽을 죄"로 두렵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행위는 결국 "죽음에 이르는 죄" 가 될 것이다 – 필자 주) 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만일 의로운 자들의 행위가 죄라면 이것은 의롭지 않은 자들의 행위보다 훨씬 더 중대한 사건이다. 의로운 자들은 자신들의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 143:2)."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0절에서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는 자들은 모두 저주 아래에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위는 율법의 행위이고, 그 저주는 '용서 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s)가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다. 로마서 2장 21절은 "다른 사람들에게 도적질 하지 말라고 가르친 네가 도적질 하지 아니하느냐"라고 말한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곧 인간이 심지어 다른 도둑들을 공개적으로 심판하고 징계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죄된 양심을 가진 도둑들이다." (LW 31, 43)
다른 논제들과 마찬가지로, 논제 3 역시 논제 2와의 연관성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 루터는 논제 2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서 선을 행할 어떤 힘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그 결과 인간의 행위들이 겉으로 보기에 매력 있고 선한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 행한 행위들은 모두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일 뿐이라고 논제 3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루터가 사용한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라는 말은 중세 가톨릭 전통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죽음에 이르는 죄"는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하나님의 법을 크게 거스른 행위를 저질렀을 때 성립하는 죄를 말한다. 이 경우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올바른 관계는 파괴되어 영원한 삶을 얻을 가능성이 그만큼 멀어지게 된다. 예를 들면 살인, 간음, 이간질, 질투, 미사 불참 이런 것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용서 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s)는 죄의 경중이 다소 작은 행위를 저질렀을 때 성립하는 죄를 말하며, 하느님과의 관계에 다소 교란은 일어나지만 완전히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둘 사이를 구분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실제로 루터는 이미 이 시기부터 "죽음에 이르는 죄"(mortal sins)와 "용서 받을 수 있는 죄"(venial sins)에 대한 이러한 구분을 거부하기 시작한다. 논제 3에서 말한 "죽음에 이르는 죄"는 단지 죄의 경중을 구분하는 의미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행위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하나님 앞에서 죽을 죄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논제 3은 루터의 개인적 신앙 여정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루터는 독일의 어거스틴회 소속 수도원의 수도승이었다. 이 수도원은 당시 규율이 매우 엄격하기로 유명하여 보통 사람들은 그 규율을 견뎌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데 루터는 그 어마어마한 규율을 다 지키고도 그것도 모자라 자기 나름대로의 엄격한 규율을 만들어 다 지켰다. 그 당시 사람들은 루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가운데 성자가 한 분 나타나셨는데 그 분이 마틴 루터다."
루터는 "비록 내가 수도사로서 흠잡을 데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나는 하나님 앞에서 불안한 양심을 가진 죄인"이라고 느꼈다. 또한 "나의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다는 것도 나는 믿을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기 자신이 성자이기는커녕 회칠한 무덤이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성자라고 하는데 오히려 나는 더 위선자다. 내가 이 정욕과 죄악을 가지고 어떻게 주님의 심판을 면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고백했다.
루터의 이러한 고백이 논제 3에 대한 그의 부연 설명에서도 잘 나타난다. 루터는 논제 3에 대한 성서적 증거로 마태복음 23장 27을 인용한다. 이 구절에서 예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라고 비난하신다. 또한 갈라디아서 3장 10절, 곧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다"는 구절을 인용하여 루터는 바울 또한 인간이 자신의 힘에 의지해서 행해진 모든 사역들이 실제로 가장 치명적인 죄라고 말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논제 3을 읽고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선을 행할 수 없는가? 루터가 인간의 책임성과 행위에 대해 너무 어둡고 부정적으로 말한 것은 아닌가?
여기서 루터가 강조하는 것은 인간은 결코 절대적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그는 어거스틴을 따라, 비록 인간이 다른 범죄자들에 대해 재판하고 처벌한다 할지라도, 그 사람 또한 죄된 인간일 뿐이라는 것을 피력한다.
루터의 이 말을 오늘날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바로 미국의 기독교 윤리학자요, 정치사상가로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세상을 선과 악의 대결장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솔직히 말해 인간 사회에서 완전한 선은 없다. 다만 악이 있고 그 악보다는 약간 덜한 악이 있다." 인간의 "책임성 있는 태도란 하나님이 된 것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큰 악과 좀 덜한 악 (greater and lesser evils)을 선택할 책임만 있을 뿐이다"고 말한다.
이에 대한 역사적 예가 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교황청이 나치와 결탁해 유대인을 학살한 것이 아니냐는 루머를 해명하기 위해, 2003년 로마 교황 바오로 2세는 바티칸 비밀 문서를 공개하기에 이른다. 바티칸 비밀 문서에 의하면, 과거 교황 비오 11세는 히틀러의 협박에 굴복해 독일과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였고, 나치당에 대한 경계와 금지령을 철회하고 도리어 히틀러에게 충성을 서약해 히틀러가 절대 지배자가 되는 데 일조했다.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유대인 혈통 성직자들이 강제 수용소로 끌려갈 때도 교황은 침묵했고, 일부 성직자들의 희생도 묵인했다. 이후 교황은 히틀러와 손잡았던 과오를 시인하고 사과해야만 했다.
가톨릭 교회는 전 세계 가톨릭 수장으로 교황이 내린 결정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믿는 '교황 무오설' 교리가 있다. 그러나 위의 역사적 사례는 심지어 교황이라 할지라도 과오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논제 3은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언제나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로움을 과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경건의 모양으로, 은혜 받은 자의 모습으로 보이기 위한 외식과 불법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 혹 교회 내 직책이 높다고 나는 선의 축으로 자부하면서 다른 사람을 악의 축으로 판단하고 규정하는 것은 아닌가?
'긍정의 힘', '자기 확신', '축복과 번영'의 메시지로 급성장한 한국 교회가 이제는 사회적 비판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방향을 잃어버린 지금, 논제 3은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중요한 논제임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