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2000년 제53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로 심사위원장에 위촉되며 거장의 반열에 올라섰으며 <그랑블루>, <니키타>, <레옹>, <제5원소>까지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든 뤽 베송(Luc Besson) 감독이 오랜만에 복귀하여 만든 액션 영화 <루시(Lucy, 2014)>는 존재의 본질과 지식, 선택에 관한 영화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존재에는 시간이, 지식에는 사명이, 선택에는 희생이 녹아져 있는, 같은 프랑스(이자 유대인)인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 Bergson)의『창조적 진화 L'Évolution créatrice〉』(1907),『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Les Deux Sources de la morale et de la religion〉』(1932)에 관한 영화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루시>의 포장은 액션이지만, <루시>의 내용은 존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이다. 영화의 호불호가 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튼 이 영화에는 두 가지 서사가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는 우연한 계기에 뇌 활용도가 100%에 이른 루시(스칼렛 요한슨 분)와 절대악으로 묘사되는 미스터 장(최민식 분)의 대립이고, 다른 하나는 루시의 변화이다. 그리고 이 변화는 노먼 박사(모건 프리먼 분)의 강의와 루시의 뇌 활용도의 변화와 맞물려 진행된다. 뇌 활용도가 올라갈수록 신적 존재가 되어가는 이 서사야말로 우리들에게 '존재의 본질'과 '시간의 의미', '지식의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준다.
물론 여기에는 '종교의 본질'도 녹아져 있다. 첫 번째 서사인, 루시-장의 대립이 관객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면, 다른 서사인 루시의 변화를 통해 영화가 보여주는 화려한 영상 이미지는 따라서 베르그송 철학의 이미지화라 할 수 있다.
1. 존재는 시간이다
19세기까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만물이 신에 의해 계획되고 신에 의해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목적론적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우주만물은 시계와 같이 기계적인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데카르트의 '기계론적 사고'이다. 그러나 1875년 다윈의『종의 기원』을 통한, 진화론의 등장은 두 세계관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진화론의 핵심은 '적자생존'이다. 적자생존은 특정한 환경에 적응을 잘 하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하면 도태된다는 것인데, 이 방향을 예측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신의 목적에 의한 세상'과 '기계적으로 맞물려 돌아가는 세계'가 이제 적자생존의 돌발 상황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다.
다윈의 생물학적 접근과 마찬가지로, 베르그송은 인식론적으로 19세기 말에 크게 유행했던 기계론적 사고 방식에 기초한 과학적 유물론과 이에 대응한다고 생각된 영국의 심리주의적 경험론이 모두 그리스에서 발달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론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 방식을 '지능'(l'intelligence, 지성)이라는 개념으로 통합하여 이 지능이 생동하고 변화하는 현실은 물론, 우리의 심적 세계, 더 나아가 그 자체 창조인 '생명의 근원적 약동(Élan vital, 약동하는 생명)'을 결코 파악하지 못하는 인식 기능이라고 한다. 따라서 베르그송은 진화의 과정을 다윈과 같이 단순히 적자생존의 개념으로 풀어내지 않고 에너지의 폭발로 설명한다. 곧 엘랑비탈이다. '신의 창조적 질서'와 '기계론의 계산'이 작용하지 않는 진화론과 같은 세계관에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를 주장한 것이다. 이런한 창조적 진화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진화론에서 단순히 '자연도태=경쟁의 원리'라는 도식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잠재-현실화라는 다이너미즘에 주목한 것이다. 이제 규정되어 있는 것이 없고, 정해진 것이 없이 내부의 에너지를 분출하여 다향한 해석의 길을 열어주어 기존의 목적론과 기계론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드러내준다. 이러한 전제하에 영화로 들어가 보자.
영화 <루시>에서 주인공 루시는 평범한 삶을 살다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두뇌와 육체를 완벽하게 컨트롤하게 된다. 영문도 모른 채 지하세계의 절대 악 미스터 장과 만나게 되었다가 결국 신종약물(C.P.H.4로 임산부가 임신 중 자신의 신체에서 만드는 것으로 아기의 뼈 구성에 필요한 에너지를 주며, 힘을 갖게 만드는 물질)을 다른 나라로 운반해야 되는 전달자로 이용당하게 된다. 하지만 루시를 겁탈하려는 부하의 폭력에 의해 뱃속에 든 약물이 루시의 몸 안에서 퍼지게 되고, 이로 인해 몸 속의 모든 세포와 감각이 깨어나게 된다. 이후 뇌의 활용도가 점점 높아져 가는 루시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인간의 역사를 경험하고, 최초의 인류인 루시를 만나기도 한다.
루시는 1974년 에티오피아의 하다드 사막에서 발견된 고대 인류의 화석이다. 모든 골격 대부분이 수습되었으며 신장은 약 1m, 20세 전후의 여성으로 추정되며 직립 2족 보행을 했으며 뇌 용적은 적고, 약 350만년 전에 생존했다고 추측하고 있다. 탄자니아의 레토리에서 출토된 표본과 함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라 이름 붙여졌고, 루시라는 이름은 이 유골 화석이 발견된 날 밤 조사대의 캠프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비틀즈의 곡명에서 붙여졌다고 한다.
루시는 자신의 뇌 기능을 100%까지 사용하게 되었을 때, 인간의 신체성을 벗어버리고, '언제나 어디서나 존재하는(ubiquitous)' 신적 존재로 변화된다. 그리고 루시는 노먼 박사에게 자신의 모든 지식을 USB에 담아 전달해 준다. 인간의 신체성을 벗어버리고, 인류의 시작(원시인 루시)과 현재(노먼 박사)에 지식을 전달해주는 것이다. 이 지식은 인류의 기원과 미래의 비밀이 담긴 지식으로 인류 구원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내어주고,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보여준 예수의 길이라 할 수 있다. 태초에 계셨으며, 마지막에도 계실 분,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 시간의 처음과 나중이며, 시간을 넘어서 계신 분! 우리는 루시에게서 '신화적 예수'의 '과학적 구현'을 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우리는 루시의 입을 통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시간임을 듣게 된다.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없다. 시간이 존재"라는 말은 존재의 본질을 묻는 노먼 박사의 질문에 루시가 했던 말이다. 루시는 달리는 자동차를 비유로 든다. 달리는 자동차의 속도가 계속해서 증가한다면 결국 자동차는 사라지고 만다. 그리고 이 비유는 인간의 뇌 활용도가 증가하면 결국 인간이라는 신체가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이다. 사실 루시는 뇌 활용도가 증가함에 따라 과거와 현재를 빠른 속도로 이동한다. 시간 속에, 시간을 통하여, 시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뇌에 관한 강의에서 노먼 박사는 삶의 목적을 '시간을 얻는 것'으로 표현한다. 이를 위한 유한한 인간의 해결책은 첫째 영원히 죽지 않거나, 혹은 번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포는 환경이 좋지 않을 때는 자급자족하며 환경이 좋으면 번식하게 된다. 그리고 번식을 통해 정보와 지식은 다음 세대 세포에 전달된다. 지식과 배움의 전수가 시간에 따라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존재보다 소유에 관심 많은 인류, 권력과 이익에 눈이 먼 존재가 인간이다. 이들은 우주의 무한함을 외면하고자 스스로 수학과 물리학으로 인식을 축소하였다. 베르그송이 지적했듯이, '지능'이 생명의 약동을 파악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2. 전달자 루시, 구원의 전달자 예수
시간을 지배하는 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너무나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의 눈으로 존재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뇌를 100% 사용하게 된 루시는 시간을 지배하게 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루시는 최초의 인간인 루시를 만나 자신의 지식을 전수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의 처음부터 루시가 전달자였음을 깨닫게 된다.
루시는 영화의 시작부터 남자친구인 제임스의 요구로 미스터 장에게 가방을 전달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리고 가방을 미스터 장에게 전달한 루시는 다시 미스터 장으로부터 강압적으로 신종마약을 전달하는 전달자가 된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서 루시는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박사에게 전달하는 구원(인류의 기원과 미래의 비밀이 담긴 지식)의 전달자가 되는 것이다.
베르그송은 사태 자체에 직접 공감해 들어가는 것으로 '직관'(Lintuition)을 사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직관은 본능처럼 생명체의 신체 내부에 폐쇄된 무반성적이고 무의식적인 기능이다. 이러한 직관은 물질에나 적합한 인식 방식인 지능과는 달리 생명의 근원, 특히 인간의 존재의 근원인 생명의 약동 자체를, 아니 신적인 것을 포착하는 것이며, 물질적 관심에 의해 폐쇄되었고 따라서 무의식적이며 여럿으로 분지된 본능적 의식에 내재한 생명의 약동 전체를 해방시키고 포용하려는 것이다. 이 해방된 정신이 실현된 인물을 베르그송은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기독교 신비에서 찾고 있다. 영성을 기초로 한 역동적이고 개방된 종교로서 기독교는 신비 체험에 있어서 관상에만 머물지 않고, 예수에게서 나타난 사랑의 행위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루시>를 통해 베르그송의 '생'과 '과정'의 철학과 더불어 구원의 전달자 예수를 그 사랑의 행위인 희생제의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3. 루시의 선택, '희생제의'(犧牲祭儀)
영화 속 노먼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10% 평균 뇌사용량을 유지한다. 우리 인간은 뇌 10%만을 사용하여, 비행기, 로봇, 문명,우주선, 예술, 종교, 문명을 일으켰다. 돌고래는 뇌 20%사용하여 음파로 대화한다. 그러나 24%을 사용하게 되면 신체를 완벽히 통제하게 되며, 40%일 때는 모든 상황을 제어 가능하고, 62%일때는 타인의 행동을 컨트롤하게된다. 그리고 100%가 된다면?
노먼 박사는 강의 도중 청중에게서 인간의 뇌 활용도 증가에 따른 가설을 입증할 자료가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 자료는 없다. 다만 가설일 뿐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연구가 진화(evolution)를 혁명(revolution)으로 바꾸는데 역할을 하리라는 건 장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혁명의 기본은 무엇인가?
고대 종교와 제의의 특징은 희생제물을 매개로 신을 섬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희생제의의 시작에 관한 세 가지 이론이 있는데, '증여이론', '친교이론', '공격이론'이 그것이다. 증여이론은 인간이 자기에게 무엇인가 긍정적인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친교이론은 제물로 바쳐진 동물을 함께 나눠 먹음으로 깊은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인데, 물자를 공유하는 것이 힘들었던 시대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공격이론은 희생제의가 공격성의 해소와 극복 기능을 하는 것이다. 곧, '인간의 공격성을 속죄양으로 향하게 함'으로 공동체 내부의 구조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다.
100% 뇌 기능을 활용하게 되었을 때 루시는 선택을 하게 된다. 전달자로서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인류를 위한 길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존재보다 소유에 관심 많은 인류, 권력과 이익에 눈 먼 존재인 인간을 위해 희생제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 희생제의가 탁월하고 신비한 이미지로 뤽 베송 감독은 구현하고 있다. 여기에는 친교이론과 공격이론의 모두가 녹아 있다. '인간과의 연대감 형성'과 '인간의 공격성에 대한 희생'(이것은 루시를 돕는 형사와 루시를 방해하는 미스터 장의 모습으로 잘 나타나 있는데)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증여이론처럼 '관계를 변화'시키는 새로운 시작을 영화는 그 끝에 우리들에게 제시한다. '10만년 전 생명을 부여 받은 인간들이여,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지?'라고 말이다.
글ㅣ최병학 목사(남부산용호교회, 부산노회)
< 출처 = 기장 총회 '말씀과 우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