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원의 행동, 영원히 찬양하리

선교
목회·신학
편집부 기자
시편 145편 13b-21

1. 오늘의 말씀 : 시 145:13b-21

13a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13b (여호와는 그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대해 인자하시도다)
14 여호와께서는 모든 넘어지는 자들을 붙드시며 비굴한 자들을 일으키시는도다
15 모든 사람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주는 때를 따라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며
16 손을 펴사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17 여호와께서는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그 모든 일에 은혜로우시도다
18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도다
19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20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21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모든 육체가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송축할지로다

2. 시작 기도

아버지여! 아담 안의 실존은 보이는 것으로 인해 근심하고 걱정합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계획하고 행동하려는 자기주장 의지는 나를 환난과 곤고함으로 끌고 갑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의 보혈로 내 영혼을 씻어주소서.
새 영과 새 마음을 주사 진리의 영으로 오직 당신을 알게 하소서.
육신의 생각에 사로잡혀 세상에 대해 근심하는 자를 멸하소서.
주의 종을 불쌍히 여기사 구원하소서. 내 영혼이 오직 당신만을 사모하나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3. 본문 주해

19세기 독일의 신학자 헤르만 궁켈은 시편 150편의 시들을 양식별로 구분하였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시편을 연구하는데 효용성을 가져 시편을 찬양시, 탄원시, 감사시 등으로 구분한다.그런데 최근 들어 시편 150편 전체를 한 권의 책으로 보는 해석적 관점이 대두되고 있다.
그것은 시편의 신학적 의미를 묻는 것으로 '시편 한 권은 전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이 같은 물음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최종편집자의 신학적 의도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시편은 전체가 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1-41, 42-72, 73-89, 90-106, 107-150편).
그리고 1~4권의 결어는 모두 명사문장으로 시작되며 공통된 단어들인 '여호와, 하나님, 영원히, 찬양(송축), 아멘'을 가진 송영으로 되어 있다.
곧 시편은 각권마다 그 전체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영원토록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할렐루야)이다.

이 점에서 유대교의 히브리어 성서에서 시편을 '찬양시들'(테힐림)로 붙인 것은 의미가 있다.
또한 오늘날 시편(프살름)의 제목이 되는 70인역에서 찬양의 뜻인 '프살모스'(헬)로 명명한 것은 매우 타당하다.
이로써 궁켈이 분류한 시편의 유형은 그 대표성이 '찬양시'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찬양시들은 다른 시편과 마찬가지로 그 기원을 축제제의에 둔다.
축제제의는 시내산 언약을 체결할 때 나타나신 하나님을 재현하며, 언약백성을 구원하시는 행동을 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찬양시에서는 하나님의 현현을 통한 그의 계시적 행동이 중심을 이룬다.
즉 그의 본질(그의 이름과 그의 구원의 행동)과 그의 뜻(계명)이 계시된다.
그리고 언약백성은 그에 대해 찬양으로 반응한다.

시편 145편은 제목이 '다윗의 찬양시'이다.
본래 시편은 익명의 시들로 축제 때 낭송되었다가 성전의 문서보관소에 보존되었다.
오랫동안 그렇게 보존되었다가 후대에 표제가 붙어졌다.
시편에 표제를 붙인 목적은 '시 102:18'에 언급한대로 장래 세대를 위한 것인데, 그것은 후대에 창조함을 받을 백성을 위해 여호와를 찬양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일이 장래 세대를 위하여 기록되리니 창조함을 받을 백성이 여호와를 찬양하리로다"(시 102:8).

장래 창조함을 받을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생명을 얻는 새 언약 백성을 의미한다(고후 5:17).
이로써 구약성경이 오실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그 목적은 영원한 생명의 획득임이 확언된다(요 5:39).

'다윗의 시' 또는 '다윗의 찬송시'는 다윗 언약 안에 있는 왕을 위한 시이다.
다시 말해 다윗왕조의 통치자를 위하여 그 시를 사용할 것인데, 궁극적인 통치자는 다윗의 씨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삼하 7:12; 롬 1:2).
그러므로 '다윗의 시'는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구원이 시작된 작금에서는 '왕되신 그리스도를 위한 시'로 읽혀져야 합당하다.
이로써 다윗이 주로 경배한 주 그리스도의 통치를 찬양한다(시 110:1-2; 행 2:34-35).

시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한다(1-2절, 21절).
그가 여호와의 이름을 송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적 행동으로써 구원을 송축하는 것이다.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을 계명에 복종하는 언약백성 삼으신 행동을 송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인이 제창하여(1-2절) 회중들과 더불어 부르는(21절) 찬양은 하나님의 계시적 행동에 대한 반응일 뿐 아니라, 언약백성으로서 계명에 복종하여 언약에 신실할 것을 확언하는 것을 의미한다.

찬양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계시적 행동은 4가지 주제로 요약된다.
그것은 위대하신 행동이며(3-7절), 인자하신 행동이다(8-13a).
또한 약속에 신실하신 행동이며(13b-16절), 의로우신 행동이다(17-20절).

'13b'(13절 후반부)는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누락되어 있으나 여타성경에서는 거의 다 언표된다.
"The LORD is faithful to all his promises and loving toward all he has made"(NIV).
"여호와는 그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대해 인자하시도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다 진실하고, 그 모든 업적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새번역).
"야훼의 말씀은 언제나 진실되고, 그 하시는 일 모두 사랑의 업적이다"(공동번역).
"여호와는 주가 하신 모든 약속들에 대해 믿음성 있고, 진실하시며 주가 만드신 모든 것들에 대해 사랑을 베푸십니다"(새번역).

하나님의 계시적 행동은 구원하시고 언약을 세우신 행동이다.
구원받은 백성은 계명을 지킴으로써 언약 안에 거하여 언약적 돌봄을 받는다.
언약의 하나님은 언약백성이 넘어질 때 붙드시며, 낮아질 때 들어 올리신다(14절).
그들은 주를 앙망하며 주께서는 적절한 때에 양식을 주신다(15절).
손을 펴서 모든 살아있는 것의 소원을 만족케 하신다.
'살아있는 것'은 '생명체'를 뜻하며 언약백성에게는 하나님으로 사는 생명을 의미한다.

인간에게 있는 피조물의 생명은 아들 안에서 주시는 태어난 생명을 예표한다.
주께서 주신 궁극적 생명인 영생은 하나님 안에서 감사하고 기뻐하는 즐거움으로 말미암아 만족한다.

여호와께서는 언약백성을 향한 모든 길에서 의로우시다(17절).
그가 만드신 모든 것에 대해 사랑을 베푸신다(17절).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부르는 자에게 가까이 계시며, 진리 안에서 부르는 자에게 현존하신다.
여기서 '주를 부르는 것'은 기도의 형식을 통하여 계시적 행동, 곧 구원을 주시는 분에게 감사의 응답을 하는 신앙고백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이교도들이 세속적 소원을 이루고자 신에게 아뢰는 것이 아니다.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화답하는 신앙고백으로 진리 안에서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응답은 하나님이 가까이 하시는 것이다.
'가까이 하다'(히, 카라브)는 '오다'(come)의 뜻으로도 번역된다.
구원에 대한 감사의 기도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응답된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구원하신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보호하시고 악인은 멸하신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사랑하는 자의 소원은 다윗이 언표한 바 평생 하나의 소원이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내가 여호와께 간절히 구하는 오직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내 평생에 늘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우심을 보고 성전에서 주님을 뵙는 것입니다"(시 27:4. 쉬운성경).

결어는 다시 찬양으로 돌아간다(21절).
시인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모든 피조물들로 하여금 찬양하게 한다.
여호와의 이름이 영원히 찬양을 받을 것이다(21절).

하나님의 계시적 행동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루고 완성되었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전 1:24).
십자가의 진리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능력이요 멸망하는 자에게는 미련한 것이다(고전 1:18).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외면하고 멸시하는 것 자체가 멸망하는 자임을 자인하는 셈이다.

현세적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은 십자가를 추문으로 받아들였다(고전 1:23).
세상의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은 미련한 것으로 여겼다(고전 1:23).
오늘도 세상은 지혜를 구하고 종교는 표적을 구한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십자가'를 부끄러워한다.
보다 인간적이고 보다 세상적인 것들이 십자가를 멸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적 행동은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십자가의 구원은 심히 위대하시고 매우 인자하신 하나님의 행동하심이다.
창세전부터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성취하신 행동하심이다.
율법의 의가 아닌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신 행동이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행동 안에 놀라운 비밀이 들어있다(엡 3:2-4).
이는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이다(엡 3:8).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이다(엡 3:9).
이 비밀은 창세전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기로 약속한 은혜, 영생이다(딛 1:2).
그것을 아는 자, 또 알아가는 자는 찬양하기에만 합당하다.

이렇듯 하나님의 구원의 비밀을 알고 감사로 응답하는 자...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이 그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 그 소원은 오직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아들 안에서 창세전 아들을 사랑하여 아버지가 주신 영광을 보는 것이다(요 17:24).

4. 나의 묵상

나의 신앙과 사역은 진리에 대해 무지한 채 용맹 정진하였다.
하나님의 계시적 행동, 아들을 통한 구원의 비밀을 알지 못했다.
그 비밀은 창세전 아들 안에 있는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구원받은 것은 고작 아담의 무죄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만 알았다.
그렇게 알고 가르쳤다.

생명의 본질이 바뀌지 않은데, 아무리 영적인 생활을 한다고 변화되겠는가?
애벌레가 아무리 나비의 꿀을 먹어도 나비처럼 될 리가 만무했다.
애벌레는 나비의 꿀을 먹어도 여전히 애벌레로 자란다.
아담 안의 옛 생명으로 살면서 열심히 말씀보고 기도하고 헌신했으니...
더욱 세속적이고 더욱 탐욕적이고 더욱 쾌락적으로 변해갔다.
외모만 보고 중심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그들도 속고 나도 속았다.

만물에 대한 탐욕은 만물에 대한 근심과 비례하였다.
속의 근심, 밖의 걱정이 그치지 않았다.
나의 기도는 감사의 응답이 아니라 존재물을 탐하는 것이 그 본질이었다.
물질, 명예, 성공, 안정, 자랑... 무엇을 해도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자였다.
자랑하고 교만하고 감사하지 않고... 속인과 다를 것이 무엇이던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 내게 임했다.
표적을 구하던 신앙이 멸하였다. 지혜로 넋두리하던 사역이 종말을 고했다.
광야의 올빼미 같고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되어 밤을 지새웠다(시 102:6).
밤을 새우니 외로운 참새 같이 되었다(시 102:7).
재를 양식같이 먹고 눈물 섞인 물을 마셨다(시 102:9).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서 영원의 하나님을 보게 되었다.
아, 하나님은 모든 행사에 의로우시고, 모든 일에 인자하셨다.
심히 위대한 구원이 임했다. 복음으로 얻은 영원한 생명!
이것이 전부이다! 창세전부터 해 오신 신실한 약속을 이루셨다.
더 원하는 것, 더 바라는 것이 없다!
오직 한 가지, 다윗의 소원처럼 아버지 품에 거하는 것이다.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신다. 아들의 죽음으로 주신 생명을 만족케 하신다.

하지만 육신의 소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른다.
아담 안의 실존에 사로잡혀 죄의 종노릇하게 한다.
왜 자주 넘어지는가? 다 알지 못해서이다!
내 모습에 주목한 채, 상황에 매인 채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일을 무시로 망각한다.
그 일이 얼마나 위대한지... 얼마나 인자하신지... 얼마나 신실하신지... 얼마나 의로우신지...

나의 소원은 허탄한 것으로 변하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세상을 더 사랑한다.
어찌할꼬!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십자가로 달려간다.
내가 거기 함께 못박혀 있음을 본다. 성찬 제의를 통해 십자가에 달린 자 된다.
오늘 십자가에 달린 자가 된다.

십자가 그늘 안에 쉼이 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
심히 위대하다. 끝이 없는 사랑이다. 영원히 신실하시다.
소리 높여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 영원히 찬양하리!

5. 묵상 기도

아버지...
내 안에 갇힌 나를 보소서. 세상의 눈으로 비천한 자가 되었나이다.
세상의 조건이 광야의 삶을 바꾸지 못하나이다.
내 영혼은 여전히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당신을 앙모합니다.
나를 주목하니 당신이 내게 행하신 구원의 행동에 눈먼 자가 되었습니다.
허탄한 생각과 육신의 염려와 근심이 나를 사로잡아 갑니다.

아버지여...
내게 임한 계시적 행동을 묵상하나이다. 기억하나이다.
그것을 현재로 경험하나이다. 어느새 비둔해진 내 영혼을 깨우소서.
가난하게 하소서. 오직 당신만이 나의 갈망이나이다.
심판하시고 구원을 주신 은혜, 위대하시며 인자하시며 신실하시나이다.
그 은혜는 영원하며 오늘 현재에서 경험되나이다.

아버지...
나를 향한 모든 행사에 의로우시나이다.
나를 행한 모든 일에 인자하시나이다.
감사로 응답하오나 내 소원을 들어주소서.
평생 한 가지 소원, 당신의 품에 거하는 것이옵니다.
아들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기 원하는 것이옵니다.
더 원하는 것은 없사옵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받아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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