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사람이 성숙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여러 각도로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느 면에 그 사람이 복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일단계 복은'TO HAVE' 많은 것을 소유하면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TO BE' 즉, 어떤 자리, 어떤 위치에 놓인 사람이 되면 그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VIP가 되어 대접받는 삶을 살려고 많은 애를 씁니다.
셋째는 오늘날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우상처럼 되고 있는 것이지만,'TO SHOW' 즉 자기를 드러낼 수 있는 어떤 외적인 자랑거리를 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얼굴일수도 있고, 자신의 재능일 수도 있습니다. 종합해서 말하면 돈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 등을 누리면 복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옛날 희랍에 한 왕이 있었습니다. 그는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24시간 호색과 주지육림(酒池肉林)에 탐닉하면서 자기를 더 즐겁게 하기 위하여 쾌락도와 행복도를 더 높이는 수단과 방법에 큰 상금을 걸고 천하에 널리 구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다 해 보았고, 가지고 싶은 것을 다 가져 보았으나 만족이 없습니다. 더 높은 행복, 더 높은 즐거움을 추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강구했습니다. 별별 기발한 아이디어가 다 나왔습니다. 그러나 불만과 갈증은 날로 더 가중되었습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고 해서 만나봐도 왕은 연신 실망해서 그럴 때마다 아이디어를 가져온 사람들을 사형에 처해 버렸습니다.
그러던 중에 어떤 소녀 하나가 자기가 왕께 나아가서 기뻐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는 비결을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궁금하게 여겼습니다. 이 소녀가 왕 앞에 나타나서 당돌하게, 막 꾸짖는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왕은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참 놀라운 얘기였습니다. "기쁨을 단념하십시오. 남을 행복하게 하거나 기쁘게 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행복을 원하신다면 다른 사람을 먼저 행복하게 하십시오. 그리고서야 왕이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 왕은 숙연해 지고 한참 생각 끝에 "딸아! 네 말이 옳도다." 그리고 그에게 많은 상을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행복이라는 것은 나 혼자서 행복하고 싶다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람에게 주는 행복과 받는 행복이 있다면 주는 행복은 멋이요, 받는 행복은 맛입니다. 선물은 받을 때보다 줄 때 기쁨이 훨씬 더합니다. 받기보다 주는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멋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말씀하십니다.
같은 일을 겪고도 대조되는 삶을 산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던 알베르 까뮈(Albert Camus)는 노벨상 상금으로 파리 근교에 좋은 별장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여생을 즐기며 편안히 살던 중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는 노벨 평화상 상금으로 아프리카 밀림 지대에 나병 환자를 위한 병원과 수용소를 세우고 여생을 그곳에서 봉사했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 모두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그들이 남겨놓은 별장과 병원은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까뮈의 명성과 재능에 비해 그가 남긴 별장은 어쩐지 아쉬움과 애석함을 느끼게 합니다. 반면 슈바이처가 남긴 병원과 그의 행적은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하고 존경의 마음을 가지게 합니다. 이것은 비단 유명한 두 사람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도 언젠가 이 세상에서 삶이 끝나는 날, 무엇을 남기고 갈 것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슈바이처가 남긴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위대한 인생을 산 사람들은 한결같이 주고 간 사람들입니다"
지혜의 왕 솔로몬은 오늘 잠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잠19:6) 결국 많이 남에게 베푸는 자에게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얻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람을 얻는 것이 아닐까요? 물질은 언제든 우리의 곁을 떠날 수 있지만, 사랑과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는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들에게서 자신의 유익만 취하려는 사람은 사람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외톨이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선물 나눠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너도 나도 친구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정작 자신이 어려워질 때 선물 받았던 사람들이 사랑의 빚을 갚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봅니다.
첫째, 자기만을 생각하는'이기적인 인간'입니다. 오늘도 자기목적만을 성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말하면 강도 같은 사람입니다. 양심의 거리낌 없이 주어진 현실 속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자기유익만 꾀하는 사람입니다.
둘째, 남에게 도움을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고 살아가는'외골수적 인간'입니다. 신학자 리차드 니이버는 이런 종류의 사람을 '응답받는 자아'라는 책에서"공동체의 규범에 전적으로 예속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소위 지성인이라고 일컫는 사람들 중에 많습니다. 자기한계, 자기울타리, 자기규범을 만들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넘지 않는 사람입니다. 남에게 굳이 도움을 받으려하지도 않고 도움을 주려고 하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철저히 개인주의적입니다. 이런 사람은 역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제사장과 레위인같은 종교인을 말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사람입니다.
셋째, 언제나 자신보다 남을 배려하고 생각하는 이타적인 인간입니다. 역시 기독교 윤리학자 리차드 니이버는 이런 사람을 '책임적 자아형 인간'(Responsible self)이라고 부릅니다. 즉 다른 사람이 처한 현실에 책임을 느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내 일처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내 고통처럼 여기고 다른 사람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여기면서 그 문제에 뛰어 드는 사람입니다. 정말 선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나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선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먼저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선물로 상대방을 축하해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의미있는 날을 기억해주는 가운데 전달되는 선물들이 있습니다. 생일, 결혼, 합격, 진급, 개업, 창립기념, 은혼식, 금혼식 등을 기념하며 선물을 전달합니다. 작든 크든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카드와 꽃과 케잌으로부터 시작해서 문자메시지, 이메일, 각종 물건들을 선물합니다.
두번째로는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주는 선물이 있습니다. 선물과 뇌물은 겉보기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받을 사람이 받아서 기뻐할 것들을 전한다는 점에서는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큰 차이가 납니다. 선물은 받을 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전합니다. 이에 비해 뇌물은 전하는 사람 자신을 위하는 마음으로 전합니다. 선물을 전하는 그 마음에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물의 진정한 가치는 그 물건에 있지 않습니다. 그 물건에 담긴 마음에 있습니다. 그 물건에 담긴 사랑하는 마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 선물은 귀한 선물이 됩니다.
수년전 인도 캘커타의 한 신학교에서 열린 예배세미나에 참석한 일이 있습니다. 예배당과 강의동, 기숙사 등 신학교건물 세우는데 몇 십억은 들어갔을 텐데 누가 다 헌신을 했을까 궁금해서 학장님께 여쭈었더니 몇 년 전 90%를 한국도자기 회장인 김동수 장로님이 기증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장로님과 권사님이 지금도 계속 각기 매달 100만원씩을 후원하면서 신학생 장학금을 보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 멋있는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방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도움을 주는 것이 진정한 선물입니다.
세번째로 상대방의 영원을 책임지는 선물이 있습니다. 스위스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관광버스가 손님을 싣고 관광지에서 돌아오고 있었습니다. 관광객들은 모두가 지쳐 잠에 빠져 있었는데 마지막 내리막길에 들어선 순간 운전사는 브레이크에 이상이 생긴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내리막길로 접어든 버스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고, 당황한 운전사의 떨리는 눈동자에서는 경사가 급한 내리막길에 펼쳐진 다섯 개의 급 커브길이 보였습니다. 버스에 점점 가속이 붙자 눈을 뜬 관광객들은 뭔가 이상이 생긴 것을 눈치채고 흥분하여 소리를 지르고 이성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운전사는 침착하고 조심스럽게 커브 길을 한 개, 두 개, 잘 운전해 나갔습니다. 마침내 그는 마지막 커브 길을 통과하였고, 모든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습니다. 저 앞에 자신들의 마을이 보입니다. 이제 마을 모퉁이 어디엔가 버스가 자연히 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마을 입구 신작로에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깜짝 놀란 운전사는 경적을 울리며 피하라고 소리까지 쳐댔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은 그 소리를 듣고 피했지만 여전히 한 아이가 그 자리에서 우물거리고 있습니다. 몸이 불편한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순간 운전사는 관광객을 살려야 할지 저 어린아이를 살려야 할지 갈등하다가 결국 어린아이를 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버스는 예상대로 건너편 언덕에서 멈춰 섰습니다. 운전사는 차가 서자마자 그 아이에게로 뛰어갔습니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를 품에 안고 울기 시작했습니다. 둘러서 있던 사람들이 살인자! 살인자! 하며 야유를 하였습니다. 그 순간 어느 젊은이가 외쳤습니다. "모두들 그만둬요, 저 아이는 바로 운전사의 아들이란 말이에요!"
하나님은 그분의 독생자를 죽이시고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준비해 주신 가장 값진 선물입니다. 교회는 우리를 살리려 피 흘리신 아들을 품에 안으신 하나님의 품입니다. 설교는 죽으신 아들을 품에 안고 흐느끼시는 하나님의 울음소리입니다. 찬송과 기도는 그분 때문에 살아난 심령들의 감사의 외침입니다. 전도는 세상에서 가장 큰 선물을 받은 자가 혼자 누리기 아까워 그 선물을 함께 누리자는 기쁨의 권면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물을 받는 인생에 머물지 않고, 진정 선물을 주는 인생으로 살아가야 할 이유나 근거는 무엇이겠습니까? 크게 세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받은 은혜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무도 많은 사랑을 받아 왔습니다. 부모와 형제와 이웃과 친구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생각해보면 의식주를 비롯해서 우리의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컨대 농부의 수고가 없다면 결코 식물을 먹을 수가 없게 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은혜 베풀어 햇빛과 비를 주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씨를 뿌리고 가꾸는 것은 인간이 해도, 그것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수술은 의사가 해도 그 살을 붙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내어주심으로 우리가 사죄의 은총과 영생과 부활의 소망을 누리고 살게 해 주셨습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우리가 진정 하나님께 영광돌리면서 남에게 베풀고 용서하고 살아야 할 근거는 바로 우리가 먼저 받은 은혜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 번째로 선물을 받기보다 선물을 주는 인생을 살아야 할 이유는 내 자신이 복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알다시피 사람의 생명은 일정한 배출이 있어야 살아가게 됩니다. 음식물을 섭취만 하고 배출하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성인병의 원흉인 비만도 받고 나누는 일이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못해서 생깁니다. 비만을 해결하면 사람의 평균수명이 10년에서 15년이 늘어난다고 합니다.
생명의 유지는 기본적으로 '흐름'에 있습니다. 활발한 신진대사가 생명을 유지하게 하듯이 사람도 무한정 모으기만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생명을 죽이는 일입니다. 병문안을 받는 것과 병문안을 가는 것 중에 어느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플 때 병문안을 받는 것은 물론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병문안을 받는 것은 작은 복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병문안을 가는 것이 더 큰 복입니다. 아직은 건강해서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신과 의사인 칼 메닝거 박사는 주위에 곤경에 처한 사람을 찾아가 도와주는 것이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는 처방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중에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신 분 신경쇠약에 걸리신 이런 분들은 집안에 가만히 계시지만 말고 나가서 힘닿는 대로 도울 사람을 찾아서 도우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건강해질 것입니다. 그래서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한 번 받은 은혜를 나만 갖기를 원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지 않으면 더 이상 발전이 없습니다. 가장 큰 선물인 구원의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는 사람이 더욱 깊은 은혜생활을 합니다. 이는 그가 가진 은혜를 나눈 결과입니다. 이런 나눔의 삶이 결국 자기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래서 지혜의 왕 솔로몬은 역시 잠언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끝으로 선물을 받기보다 주면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공동체는 나눔이 있는 곳입니다. 사랑의 나눔, 고통의 나눔, 기쁨의 나눔이 공동체를 아름답게 만듭니다. 지옥은 자기 것만 챙기려는 곳이요, 천국은 나누어 주려고만 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지옥에선 항상 부족을 느낍니다. 긴장과 경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반면에 천국은 나누어 주려고 하기 때문에 항상 풍족하고 서로 사랑하는 분위기가 넘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받기는 좋아하지만 주기는 싫어합니다. 그러나 드림으로 자기를 비우지 않고는 더 좋은 것이 채워질 수 없습니다. 자기를 드림으로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고 누군가에게 기쁨을 주면 인생의 보람은 더욱 커질 것입니다. 소유와 채움에서 기쁨을 찾지 않고 드림과 나눔에서 더 큰 기쁨을 찾는 모습이 내일의 행복을 보장받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약속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