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신앙의 자유를 찾아 험난한 길을 거쳐 척박한 땅에 도착한 청교도들, 그들이 시작한 나라 미국에서도 '기독교인의 사회 참여'는 불가피한 시대적 요구였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의 저서 '기독교는 어떻게 세상을 변화시키는가?'와 관련해 현대기독연구원(원장 김동춘 박사, 이하 현기연)이 지난 25일 서울 서대문구 신촌로 하.나.의.교회(담임 김형원 목사)에서 진행한 공개세미나에서 이 책의 번역자 복음신대 배덕만 교수(복음신대)는 미국 기독교 안에서 일어난 사회참여의 흐름에 대한 주제로 강의했다.
먼저 배 교수는 "1861~1865년은 미국이 농촌사회에서 도시산업사회로 전환되던 시기다. 북부는 남북전쟁(편집자 주: 1861년 4월 노예제를 지지하던 남부주들이 모여 남부연합을 형성하며 미합중국으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하며 1865년까지 4년 동안 벌인 전쟁이다)에 승리했고 남부는 해체돼 100년 가까이 극심한 빈곤체제에 들어갔다"며 반면 "북부는 뉴욕, 시카고, 클리블랜드, LA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산업이 발전했다. 산업적 기반 은 철강과 석유였고, 이것은 지금까지 미국을 끌고 가는 근본산업이다"고 설명했다.
배 교수는 "그러면서 농촌사회에서 경험하지 않았던 낯선 사회적 질병적 현상을 보게 된다"면서 "농촌은 모두 알고 지내니 범죄가 거의 없지만 도시는 익명사회라 범죄가 많았다"고 진단하구 "도시 산업사회는 주기적으로 경기불황이 찾아와 해고당한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어버리면 생존하기 위해 범죄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이런 악순환이 돌 수밖에 없다"고 이유를 설명했다.
배 교수는 "그래서 도시에서 교회들이 세워진다"며 "농촌에서는 한번도 경험하지 않았던 빈곤이나 노동자 문제, 인권 문제 등 문제에 직면하게 되니 그런 문제를 교회가 끌어안을 수밖에 없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도시교회가 처음에는 스프(soup)나 옷을 나눠주는 도시구제활동으로 시작했다"며 "19세기 중반까지 유럽에서는 가난의 이유를 열등한 인간의 도덕적 해이나 무능함 때문이라고 보았지만 도시빈민운동에 뛰어든 사람들이 그들의 삶과 밀착돼서 목회를 하다보니 똑똑하고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인데 그런 가문에 태어나며 빈곤의 사이클에서 나올 수 없게 됐다는 것을 알게 됐고 그것이 사회구조적인 문제인줄 알게 된다. 그러한 입장이 1884년도, 19세기 중후반 미국으로도 들어오게 된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그러면서 도시에 있는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한 그룹도 교회 안에서 두축으로 나눠진다"며 "구원받고 중생하면 팔자도 바꿀 수 있을 것인다는 흐름 이어지다 사회구조의 문제, 법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이런 갈등이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벌어지게 된다"며 또 "거의 같은 시기에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나오면서 유럽에서 성서비평학을 근거로 한 자유주의 신학이 출발해 미국 보수교회에 굉장히 큰 충격을 준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배 교수는 특히 "신학적 생물학적 도전과 미국 경제 시스템이 바뀌면서 정치경제학적 문제가 나타나며 신학도 두 개로 나눠진다"며 "그 전에는 신학적 진보주의와 신학적 보수주의만 존재했지만 19세기 중후반 넘어가면서 신학적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까지 결합돼서 진보와 보수로 나눠지게 된다"고 했다.
그는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은 점점 세대주의, 성서무오설을 중심으로 한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와 연합해서 19세기 후반 근본주의신학의 틀 갖춘다"며 반면 "갈등적 입장에 있었던 자유주의신학은 소셜 가스펠 운동(The Social Gospel Movement)으로 나타나게 된다"고 말했다.
'사회 복음주의'라 일컫는 소셜 가스펠 운동은 리처드 엘리(Richard T. Ely), 워싱턴 글래덴(Washington Gladden), 월터 라우셴부시(Walter Rauschenbusch), 찰스 먼로 셸던(Charles Monroe Sheldon)이 주도했다.
배 교수는 "사회를 바라보는 입장에 차이가 나게 된 것으로 무디를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신학은 임박한 말세를 배경으로 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해서 천당에 가자는 것이었고, 일체 사회변화 운동에는 무관심했다"며 "라우셴부시 등 노조 문제, 노동자 인권 문제, 산업현장에서의 인권 문제, 작업현장의 문제 등을 갖고 고민하기 시작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예수를 그런 모델로 그리고, 예수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그는 "이 두 그룹이 주도권 싸움을 하다가 1925년 원숭이 재판(편집자 주: 미국 테네시 주에서 공립학교 내에서 진화를 가르치지 못하도록 한 법률을 어기고 과학교사 존 스콥스가 진화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은 사건으로, 당시 기독교 근본주의자는 꽉 막히고 대화가 통하지 않는 이들로 인식됐다)이라는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때 근본주의가 (사회) 무대에서 없어져버린다"며 "대신 보수주의자들은 교회성장과 목회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하고 미국교회의 주도권은 소셜 가스펠 운동을 중심으로 한 진보주의자들이 연방교회협의회과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를 중심으로 주류를 장악한다"고 설명했다.
배덕만 교수는 '초기 한국 기독교' 이야기로 넘어와 "1984년 1985년 한국에 미국 선교사들이 들어왔을때 세운 것이 바이블 칼리지(Bible College)였다"며 "보수주의자들이 정치적 영역은 제거하고, 개인의 경건과 교회 목회, 전도, 묵시적 종말론을 강조하며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것을 위해 바이블 칼리지를 세웠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다시 '미국' 이야기로 넘어가 "1940년대에 들어오며 1925년 무대에서 사라졌던 (근본주의자)분들의 자녀들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아버지가 전투적인 근본주의자인 경우 자녀들이 공부를 참 잘한다"며 "근본주의 목사들 중에는 대학을 간 사람들이 없었다. 고등학문 공부를 안시킨 것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의 자녀들은 아이비 리그에서 박사학위(Ph.D.)를 받게 되고 교수도 하게 되며 사회적 위치가 올라가게 된다. 당시 유명했던 칼 헨리(Carl F.H. Henry)의 자서전을 보면 자유주의 신학으로 유명한 대학을 가서 자유주의 교수를 만난다. 뿔이 나고 말을 섞으면 오염될것 같다는 편견을 갖고 있었는데 만나보니 너무 신사적(gentle)이었다는 것이다. 무슨 말 해도 다 받아주고 적절한 코멘트도 해주는 관용적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며 "그래서 1940년대 근본주의자들의 2세대 중 고등공부 한 사람들이 생기고 그들을 중심으로 중요한 모임이 생긴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그래서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를 만든다. (1947년) 동부의 프린스턴신학교가 자유주의로 넘어가니 프린스턴의 정신을 서부에 부활한다고 만든 학교가 풀러신학교다. 찰스 풀러라는 부흥사가 돈을 내서 만든 학교로, 사회학으로 펜실베니아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사회참여에 열린 칼 헨리 등도 교수진에 참여한다"고 소개했다.
또 "칼 헨리는 1947년 '복음주의자의 불편한 양심'이란 책을 내고 언제까지 분리주의자로 살것이냐 얘기하면서도 안 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계속 선을 긋는다. 이 책은 근본주의자의 양심선언에 가까운 책이다"며 "칼 헨리를 이때만 해도 근본주의자라고 규정한다"고 말했다.
이어 "빌리 그래함은 태생이 근본주의자로, 명성을 얻은 후에 뉴욕목회자협의회에서 주관하는 대집회 강사로 초청되는데 그 모임은 진보주의자도 있고 근본주의자도 있었던 모임이었다. 그런데 밥 존스(Bob Jones)가 '어떻게 자유주의자가 있는 모임에 갈 수 있냐'고 반대했지만, 빌리 그래함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거기서 그렇다고 하면 앞으로 근본주의자들의 모임에만 집회를 다니게 된다는 걸 알았다. 그때 그는 '나는 복음주의자다'라고 말하고 그 집회에 참여하며 밥 존스와 갈라지게 된다"며 "근본주의자 그룹이 밥 존스, 맥킨타이어, 빌리 그래함. 칼 헨리 등의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 그룹으로 나뉜다"고 했다.
신복음주의자들은 1942년 미국복음동맹(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를 만들어 근본주의자들과 자신들을 구분하는 의미로 가톨릭 신자나 진보기독교인들과도 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해 오순절주의자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은사중지론자였던 근본주의의 거두 칼 맥킨타이어와 오켄가가 다투며 칼 맥킨타이어는 그 그룹에서 탈퇴한다.
배덕만 교수는 "신복음주의는 신앙은 보수적이지만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하자는 입장이었다. 이들은 신복음주의자(네오 이반젤리컬리스트)로 불리다가 나중에는 복음주의자(이반젤리컬리스트)로 불린다"고 소개했다.
그러다 1950~60년대를 맞았다. 배덕만 교수는 당시를 말하며 "몽고메리에서 흑인인권운동(편집자 주: 1955년 흑인여성 로자 파크가 버스 안의 흑인칸이 만석이 돼 백인 전용 칸에 앉아 '흑밴 인종분리법' 위반으로 체포되자, 일어난 버스 승차거부운동이다)이 일어나고 베트남 전쟁(1955~1975)이 터졌다. 미국에서는 히피 문화가 일어나고 이민법이 바뀌어 이민의 문이 열리자 아시아에서 신흥종교가 들어와 복잡한 시대가 된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베트남 전쟁과 흑인인권운동이 일어날 때 신복음주의자 세대의 다음 세대인 베이비 부머(2차 대전 끝나고 태어난 아이들)는 반전운동과 인권운동을 경험한다. 집에서는 아버지가 사회 문제를 얘기하지만 제한적이었고 아버지 세대보다 더 큰 사회 문제가 있었다"며 "한국의 1980년대 후반 학번이 꼭 그랬다"고 전했다.
그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갈 무렵 북베트남에 미국이 융단 폭격을 가할 것이라는 루머를 듣고 한 목사님이 대통령과 친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에게 대통령에게 폭격을 취소 시켜달라고 부탁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그때 빌리 그래함 목사는 크리스채니티투데이 지(紙)에 글을 써서 '성경에는 두 가지 직분자, 예언자와 복음직분자가 나온다. 나는 복음직분자이니 정치는 모르는 일이다'고 했다"며 사회 문제에 대한 미온적인 태도를 지적했다. 덧붙여 그는 "그러나 미국의 34대 대통령 해리 투루만을 처음 만났을 때 빌리 그래함은 '이번에 북한 문제, 한반도 문제 정리하시죠'라고 발언하기도 했다"며 이중적인 태도를 꼬집었다.
그러면서 "짐 월리스(Jim Wallis, 미국의 진보적인 기독교 출판인 겸 작가)는 사회문제에 미온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껴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고 아버지보다 조금 더 진보적 인 입장을 갖게 된다"며 "정치적으로는 민주당 입장을 갖게 된다"고 배 교수는 전했다.
배 교수는 이어 "밥존스 대학은 (1975년까지)흑인 학생의 입학을 거부해 IRS(미 세무청)로부터 세무사찰을 받게 되며 '정교분리주의가 지켜지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정부에서는 '그러려면 국가로부터 지원받지 마라' 하는 법정 공판이 벌어진다"며 "이 싸움은 근본주의자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된다. 사회변화는 기도와 전도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국가로부터 두드려 맞으니 복음전도만으로 세상이 변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교회와 정부가 부딪힌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두번째 충격은 산모가 요구하면 임신 후 6개월까지는 낙태를 선택할 권리를 가진다는 낙태합법화가 1973년 미 대법원으로부터 인정됐다. 이것이 정치 참여를 백안시했던 근본주의자들이 '정치에 관심 갖지 않으면 신앙이 박살나겠다'하는 계기가 됐다"며 또 "60년대 이후 미이 쿼터로 묶어졌던 이민법을 풀게 되며, 그 이전에는 주로 유럽사람이 이민 왔는데 60년대부터는 불교, 힌두교를 아주 강하게 믿는 아시아권 사람들이 들어오게 된다. 그전에는 기독교 교파안에 차이였는데 다른 종교가 떼거지로 들어오게 돼 이슬람, 불교도가 늘어나게 되니 미국 보수 기독교인들이 큰 위기감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에 "70년대 이런 사건으로 제리 폴웰(Jerry Lamon Falwell)이라는 성서침례교회 목사는 설교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었는데 이 사람이 중심이 돼서 미국의 영향력 있는 근본주의 목사들을 찾아다니며 연합해서 '도덕적 다수'(The Moral Majority)라는 근본주의자들의 정치 로비 단체를 만든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보수를 유도하는 것이 이들이 하는 일로 80년대 레이건에서 몰표를 줘서 대통령이 되게 한다. 이들을 기독교 우파라고 한다. 미 공화당이 꿈꾸는 것이 기독교 우파가 꿈꾸는 것과 똑같다"며 "그런데 이들 자녀 세대인 짐 월리스를 중심으로 한 친구들은 70년대부터 복음주의 좌파, 진보적 복음주의로 민주당 쪽에 서게 된다"고 말했다.
여기에 그는 "재세례파는 펜실베니아주 오하이오에서 존재 자체가 보이지 않게 옛 모습을 유지하며 살고 있었는데 끊임없이 전쟁을 하니 그것에 반대해 평화주의 운동을 일으켰다. 그 그룹이 퀘이커, 재세례파, 매노나이트, 아미쉬 등이었다"며 "재세례파 신학을 학문적으로 재구성한 사람은 존 하워드 요더로,그가 탄탄한 논리로 노틀담대학, 다시 말해 주류 안에서 책을 써내게 되고 똑똑한 많은 친구들이 요더의 영향을 받으며 박사논문 써내기 시작하며 학문적인 영향력을 갖게 된다. 그들의 주장은 핵 전쟁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대에 많은 사람에게 울림 줬다"고 덧붙였다.
배덕만 교수는 재세례파를 포함해 사회참여하는 개신교 내 그룹을 정리하며 "미 복음주의 그룹은 펫 로버트슨, 제임스 답슨, 팀 라헤이 등이 모여서 만든 기독교 우파라고 하는 극우적 기독교 정치단체가 굉장히 컸고 조지 부시 대통령 만드는데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또 짐 월리스를 중심으로 한 복음주의 좌파가 있었다"고 정리했다. 짐 월리스는 미국인의 절대다수인 보수적 복음주의자의 표를 끌어오지 못하는 민주당 후보였던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고 배 교수는 덧붙였다.
그러면서 "이 운동을 주도해왔던 세 그룹은 각각 전략, 방법, 강조점이 다르지만 미국 변화켜내려면 정치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같다"며 "헌터는 그러나 이들이 정치를 바꾸자는 이면에는 피해의식, 소외감, 원한 등 분노가 근거해 있었다며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말한다"고 말했다.
끝으로 배 교수는 "지금 시대는 차이와 해체라고 하는 것이 특징인 다원주의 사회이다. 다양한 것이 공존하는 사회, 언어와 삶이 괴리된 사회에서 정치 일변도로 세상을 바꾸려고 했는데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하다. 그러니 정치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로 문화, 예술, 학문 등 (기독교인) 각자가 처한 그곳에서 영향력을 복음 안에서 온전히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 향후 복음주의 사회변화의 효율적인 전략이 아니겠느냐고 말한다"는 헌터의 대안인 '신실한 현존'을 소개했다.
그는 또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은 하나님께서 오셔야 한다"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타락한 세상에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숨겨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지, 세상을 바꾸겠다는 이데올로기를 갖고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헌터의 말을 빌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