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예수 제자들의 사역

목회·신학
목회
이동윤 기자
dylee@cdaily.co.kr
누가복음서 9:1-6
▲홍성표 목사(예수제자교회)

[기독일보] 예수가 이 땅에서 하신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제자들을 훈련하여 파송한 일이다.

이 땅에 사이비 종교자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종교가들과 자칭 그리스도나 신이라 부르는 가짜들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약점과 심리들을 파고들어 그들 자신의 부귀영화와 착취의 대상으로 삼고 쓸모가 없으면 버리거나 죽음으로 처리한다.

세상에는 어떤 이유이든지 힘과 권력과 물질의 소유에 대한 자들이 있다. 돈이 아니면 학문을 학문이 아니면 권력을 잡아라 그래야만 조금이라도 사람 행세를 할 수있는 것이 삶에 대한 현상이다. 말을 잘 하던지, 돈을 가지고 있던지 아니면 권력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에서 그런대로 사람 대접을 받고 살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가치의 틀에서 사람을 대하고 평가하며 자기 사람으로 옆에 두려한다. 소위 속된 사람의 말처럼 관계의 이해를 따져서 자기에게 유익이 될만한 가치를 따져서 그렇다. 자기와의 관계에서 영양가가 있어야 관계를 유지 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끼리끼리의 관계,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관계, 도움이 될 수 있는 관계, 이런 관계들이 아니면 언제든지 버리고 심지어는 죽일수도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역사적 존재들이다. 예수님이 말씀 하신 것처럼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 이시다. 악의 씨앗으로 태어나 악을 먹고 악을 뿌리며 사는 존재 이상 인간에게 기대할 것은 없다.

억울하면 출세하고 원수를 갚으려거든 힘을 가지라. 돈을 가지든지, 권력이나 교권을 가지든지, 혹은 세상이 인정할 만한 출중한 인물이 되라. 이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썩을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탐욕도 욕심도 버리고 내가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자기 한계를 깨닫고 썩을 가치를 넘어서는 썩지 않을 가치를 위하여 사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영원한 가치 , 생명을 살리는 가치를 위하여 부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하여 이 세상에서 해양 할 일들을 가르치고 명령하여 제자들을 파송하고 있다. 파송받아서 할 첫째 일은, 모든 귀신을 내어쫓는 일이다.

귀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악의 세력이고 악한 힘이다. 생명을 병들게하고, 아프게하며, 관계를 이간질 시키고 분열시키며, 상처를 주고 병들게 하고 절망케 하며 마침내는 그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그 귀신은 우리 개인의 내면의 정신과 영혼을 파멸로 몰아가기도 하고 우리의 가정을 해체시키기도 하며 민족과 나라 마침내는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를 파멸로 몰아가기도 한다.

귀신의 실체는 작게는 개인과 집단간의 싸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며 크게는 민족과 나라의 전쟁을 통하여 생명을 대량 학살하기도 한다. 귀신의 가장 큰 특징은 창조주나 신의 이름을 빌려 종교적인 형태를 띄고 악을 행한다. 은퇴를 계획하고 있는 어느 목사님은 교회는 희망이 없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교회 안에 정의와 사랑은 고사하고 윤리와 도덕적 개념, 그리고 공동체의 연대성도 없다. 교회안에 진리가 없다라는 말은 진리 되시는 예수가 없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교회 안과 밖에서 작금의 한국 교회에서는 더 이상 역사와 생명 살리는 기대를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교회 안에 패거리 , 거짓말장이, 위선자, 허풍쟁이, 모사꾼, 사기꾼들은 득실거리지만 제 몸을 불살라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예수의 진정한 제자는 없다는 것이다.

오늘 날 예수는 제자들을 파송하며 그 첫째 사명을 귀신( 모든 거짓말장이들 모사꿈 사기꾼 등)을 내어 쫒으라고 말씀 하신다. 둘째는, 병들을 고치라. 지금은 의학이 발달하여 병고치는 것을 그것에 많이 의존하지만, 예수 당시는 작은 병도 고치지 못하고 생명이 상하거나 쉽게 죽는 시대였다.

병이란 육신의 병도 있지만 마음으로부터 시작 되는 병이 허다하다. 육신적으로 영양이 공급 되지 못하여 오는 병도 많지만 마음에 상처를 입어 오는 병이 많은 것이다. 마음이 상처를 받거나 누군가로부터 버림과 거절을 당하거나 할 때 육신이 함께 병드는 경우가 많다. 관계의 단절이 바로 그것이다.

삶의 중심으로부터 소외 되고 변두리로 쫓겨나고 밀려나서 외로움이나 깊은 고독 속에 방치 되거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사랑 받지 못하면 병이 든다.어느 때나 이런 사람들이 즐비하다. 역사와 그 사회의 3% 혹은 15와 5- 20% 외의 사람들은 늘 불안과 초조한 삶 속에서 병들어 간다.

이유도 알 수 없는 억울한 한을 쌓고 희생된 이 시대의 가장 큰 비극, 세월호의 희생자들과 그들의 가족 그들과 함께 하는 모든 자들은 크고 작은 병을 앓고 있다. 가진자들의 거짓되고 악한 힘에 의해서 병이 든다. 빼앗기고 짓밟히며 억눌리고 병들고 죽어 간다. 이런 현상이 어찌하여 거룩을 위장한 교권(성전) 안에서라고 없겠는가?

예수께서 먼저 귀신을 내 쫓으라고 말씀 하신 후에 병을 고치라는 것은 바로 악한 힘들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 주요요인이라는 것이다. 말라리아나 천연두 홍역, 중풍병이나 손마름병 열명, 염병, 부인 병, 귀머거리 소경, 앉은뱅이 등 수많은 병들이 있지만 가장 큰 병은 마음이 병드는 것이다. 마음은 관계의 단절이나 깨어짐으로 오는 것이다.

예수는 귀신을 쫓아 내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도록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단순히 허공에 뜬 공간, 피안의 이상적인 영역이 아니라 이 땅 , 구체적인 인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그리고 전 피조물과 인간, 집단과 집단,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간의 하나님의 나라를 말 하는 것이다. 너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바라는 정의와 공평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진정한 평화와 자유, 모두가 함께 행복을 구가하는 평등의 나라가 이루어진 사회일 것이다. 썩은 샘에서 생명의 물을 마실 수가 없다. 이미 더러워진 샘에서 병을 고칠 수 있는 맑은 물을 마실 수가 없다.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것 조차 힘겨운 몰락하는 문명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악한 생쥐가 문명의 생명 줄을 빠르게 갉아 먹고 있다. 진보나 보수 모두가 위선의 껍질을 뒤집어 쓰고 역사와 하나님과 자연을 모욕하고 있다. 거짓을 일상으로 삼고 생명 없는 거짓을 연출하려고 쇼를 하고 있는 것이다.

앓는 자를 고쳐라, 많은 생명들이 여러 가지 이유로 신음하고 탄식한다.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한 파송의 두 번 째의 목적은 바로 이것이다. 병든자들을 고쳐 주리는 것이다. 아니 병든 사회를 고치라는 것이다. 병든 자들과 역사를 고쳐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화 시키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있어서 3절에서는 제자들의 삶의 태도, 하나의 원칙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 실현을 위하여 여행을 하는 동안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가진 자는 예수님의 명령을 행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기득권자는 그것을 지키려고 갖은 변명을 다 늘어 놓고 자기 정당화 합리화를 꾀하게 마련이다. 그 기득권을 가지고 오만과 거드름과 자만에 빠져 정의를 행동화 하지 못한다.

가진자는 가진자들과 패거리를 이루며 자기 울타리를 견고하게 하려 한다. 가진자는 교만을 떨며 가지지 못한자를 속으로 깊이 멸시 한다.가진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는 불필요한 자들이다. 예수님은 말씀 하신다. 지팡이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가든지 거기서 머물다가 거기서 떠나라 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않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신다.(5절) 구차하게 거기에 기대거나 빌 붙어 살지 말라는 것이다. 다른말로 하면 구걸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예수의 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그대로 나아가 각 마을에 두루 다니며 곳곳에 복음을 전파 하며 병을 고쳤다 라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예수의 제자라고 말 할 수 있는가? 주님 앞에서 고개를 들 수 있는가? 평생을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사는 목사님이 얼만 전에 어디 가서 목사라고 하기가 부끄러운 세상이라고 하였다. 그런 말을 쉽게 할 수 있는 분이 아닌데 말이다.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 목사라고 하기가 부끄럽다. 그럼 장로나 집사 권사나 평신도는 그리 생각하거나 말하는 사람이 없는가? 부끄럽고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좋은 집에서 편리한 도구를 쓰고 소위 문명과 과학, 자본의 풍요로움을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외치는 소리와 메아리가 허공을 치고 있지는 않은가? 우리는 행복해 하며 주님을 찬양해야 한다. 감사와 찬양이 땅과 하늘을 울려퍼지게 해야 한다. 기울어 가는 문명과 새로운 문명의 시작이 동 터 오는 지금에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가진 것을 버리고 모든 것을 팔아서라도 밭에 감추인 보화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

이단과 사이비 썩어질 신들이 생명들을 병들게 하고 속이는 혼돈의 홍수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앓는 자들을 고치며 새로운 희망을 창조하는 그리스도인 예수의 사람, 성령의 사람,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 예수의 제자들이 기도해야 한다. 아니 행동해야 한다. 아니 일어서야 한다.

예수 제자들의 사역은 이미 예수님께서 먼저 본을 보이신 것이다. 유럽의 복음은 너무 식민제국의 학확장의 뿌리가 있고 신학화 되었다. 미주의 복음은 자본과 결탁 되어 있다. 그래서 성장으이 논리와 정복의 논리가 중심에 있다. 한국의 복음은 이 모두의 뿌리를 지니고 있고 동시에 주체성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민중신학은 독재와 불의, 그리고 자본의 독점 횡포 때문에 발생하였다. 그것들이 민중을 폭압적으로 억압하고 쥐어 짜며 짓밟는 동안 시대의 저항이 만든 것이다. 7-80 년대의 민중은 더 이상 민중이 아니다. 민중위 복음도 이름만 남고 민중의 복음은 기록에 묻혀버렸다.

예수와 제자들의 복음은 민중들의 자본의 재 분배와 자본의 상승을 위한 복음이 아니다. 독재와 독점 독단의 횡포가 사라지는 동시에 인간의 인간 됨을 위한 위한 변화와 거듭남을 바라는 것이다. 완전하거나 온전한 인간이 아니라 최소한의 도리를 알고 행하는 인간의 회복이 복음의 핵심 내용이다.

잘못을 회개할 줄 알고 최소한의 창조의 회복을 위한 인간의 회복이 복음의 중심을 이룬다. 자신이 한 일에 대하여서는 책임적 존재로 살고 죄를 느끼며 부끄러워 할 줄 알며 사는 이유가 무엇인지 왜 사는지 등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복음은 악을 멀리하고 아니 단호히 끊어버리고 하나님의 선한 본질을 회복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예수와 제자들의 복음은 다르지 않다. 적어도 예수와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제자들은 나사렛 예수의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귀신을 내어 쫓으며, 각종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이다. 악한 세력을 내면으로부터 꾸짖어 쫓아 내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살며 병든 자를 고쳐 주는 일이 복음이다. 이것은 개인적이며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원의 도를 화육화 시키는 것이다.

글ㅣ홍성표 목사(예수제자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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