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석근 목사
|
신약성경 4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우셨다는 기록이 두 번 나온다. 한번은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그의 죽음을 동정하여 눈물을 흘리셨는데(요 11:35), 그것은 나사로에 대한 사랑의 증표였다. 참된 사랑은 눈물을 수반한다. 또 한 번은 생애 마지막 유월절 약 1주일을 남겨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 전에 그 도성을 바라보시며 우셨다.
“가까이 오사 성을 바라보시고 우시며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다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눅 19:41~44)
본문 41절에 ‘우시며’라는 말은 헬라어로 ‘에크라우센’인 바, 소리를 내어 통곡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눈물을 흘리신 것 ‘에다크뤼센’보다 강한 표현이다. 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그렇게 소리 내어 우셨을까? 그 까닭은 A.D. 70년에 있을 로마 장군 디도(Titus)의 예루살렘 함락 사건을 예견하셨기 때문이다. 과연 유대민족은 주님께서 울면서 예언하신바 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지 37년 후인 A.D. 70년에 예루살렘 성과 함께 멸망당했다.
당시 로마 장군 디도는 4개 군단 약 8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선민의식으로 로마의 통치에 항거하는 유대인을 섬멸시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예루살렘을 토성으로 완전히 가두었다. 이 토성은 3일 만에 급조하였기 때문에 때마침 유월절로 모인 백만이 넘는 유대인들은 성안에 갇혀 많은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은 성이 함락 당할 때 110만 명이나 불과 칼에 죽임을 당했다. 또한 디도 장군은 성전과 성곽을 위시하여 전도시를 완전히 파괴할 것을 명하였던 바, 누가복음 19장 44절에 기록된 주님의 예언처럼 돌 하나도 돌 위에 첩 놓이지 아니하고 완전히 무너졌다. 오늘날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찾아가 기도를 드리는 이른바 ‘통곡의 벽’은 당시 로마 군인들이 기념으로 남겨 둔 예루살렘 성의 서쪽 벽의 일부이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기하여 세계 전역으로 흩어졌으며(신 28:58~59; 64~67), 그들은 수 세기 동안 집 잃은 나그네가 되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이 머지않아 이렇게 무서운 재난을 겪게 될 것을 아시기에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우셨던 것이다. 이것도 자기 백성을 향한 연민과 사랑의 증표였다. 항상 진실한 사랑은 눈물을 수반한다. 예수님은 일전에도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며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환난 당할 자기 동족에 대한 한없는 사랑을 나타내신 바 있다(마 23:37-39).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본을 따라 사망과 흑암의 그늘 아래 있는 북한의 구원과 평양의 회복을 위해 한없는 연민과 사랑으로 울며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평양은 ‘동방의 예루살렘’이 아니었던가.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복음이 한반도에 전해진 이후 가장 뜨겁게 전파되었던 지역은 남한이 아니라 북한이었고 그 중심은 평양이었다. 복음의 중심지답게 평양에는 이 땅에서 가장 큰 성경학교가 있었고, 한국인 최초의 목사들이 평양의 신학교에서 배출되었다.
1907년 평양에서는 1906년의 미국 아주사 부흥보다 더 위대한 부흥이라고 평가되는 평양대부흥이 일어났다. 이 부흥운동은 1907년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서 시작 되었다. 이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오순절과 같은 강력한 성령의 임재와 성도들의 회개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한국교회는 교인수가 3.5배로 증가한다. 그리고 이 평양대부흥운동은 1909년의 100만인구령운동의 계기가 되었으며, 향후 100년간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당시 외국 언론들은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오늘날 평양의 모습은 어떤가? 놀랍게도 현재 평양은 지구상에서 기독교를 가장 극심히 박해하는 공산독재정권이 자리 잡고 있다. 공산권 및 이슬람권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오픈도어선교회는 기독교 박해국가 명단을 발표, 이들 나라의 기독교인들을 위해 기도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이 단체는 북한을 4년 연속 ‘세계에서 기독교를 가장 심하게 박해하는 국가’로 지목했다. 오픈도어선교회의 보고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들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나라가 북한이며, 지난 한 해에만 북한에서는 수백명의 기독교인들이 처형을 당했다.
평양대부흥운동의 중심은 장대현교회였다. 예배당은 2000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장대현교회가 위치한 장대재 언덕은 평양의 중심지에 있어서, 장대현교회는 명실상부하게 평양 주민들의 영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성스러운 장대재 언덕은 공산정권이 들어선 후 이른바 ‘혁명적 언어’로 개명되어 ‘만수대’라고 불리게 된다. 그리고 지금 유명한 김일성 동상이 서 있다. 1972년 북한정권은 김일성의 60회 생일을 기념하여 20m 높이의 초대형 동상을 건립했다. 동상 참배객은 꽃다발을 반드시 준비해야 하고, 헌화한 다음 “2, 3m 뒤로 물러서서 2, 3초 동안 동상을 우러러 본다”라는 행동지침도 있다. 인도하는 사람이 “수령님께 인사 올리겠습니다”라고 하면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평양 출신 한 탈북자는 “묵념이라 아니라 살아있는 수령에게 인사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북한에서 요란하게 내세우는 구호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이 김일성 동상은 일찍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두라 평지에 세우고 모든 백성이 절하도록 명령했던 그 거대한 우상과 같은 것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김일성은 사망했지만 김일성의 우상화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성지였던 장대현교회는 지금 이렇게 만수대광장(김일성 광장)으로 변해 김일성 우상화의 성지가 되어 있다. 아, 어쩌면 이렇게도 극단적으로 역전이 되었을까?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기독교를 박해하며 인권을 탄압하는 전 세계에서 가장 악랄한 공산독재정권이 둥지를 틀고 있는 사단의 견고한 진으로 변했다. 그리하여 흑암과 저주의 땅이 된 북한은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기근이 들어 300만명이 아사(餓死)했다. 그리고 현재 차이나 대륙에는 5만명의 탈북 난민들이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다. 탈북 남성들은 날품팔이로 연명하고, 탈북 여성들은 생존을 위해 차이나 남자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어 가정부나 매춘부 신세가 된다. 어떤 탈북 여성들은 신부를 구할 형편이 못되는 가난한 한족(漢族) 가정으로 팔려가 차이나 남자와 결혼을 하고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70년이 차면 황무함이 마치게 하소서!
어찌하여 ‘동방의 예루살렘’이었던 평양이 ‘사단의 견고한 진’이 되어 북한이 이렇게 저주와 흑암의 땅이 되었나? 그것은 일제강점기에 치욕스러운 교단 총회의 신사참배 결정이 바로 ‘평양’에서 가결되었기 때문이다. 1938년 9월 9일 장로교 총회는 평양 서문 밖 교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고 국가의식이므로 받아들인다”고 가결했다. 그 후 한국교회 모든 교단들은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시행하였다.
하나님께서 1907년에 평양에 큰 부흥의 은혜를 주셨는데 우리는 바로 그 땅에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에게 절하기로 결의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평양은 이가봇(삼상 4:21)이 되어, 전 세계에서 가장 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하는 공산독재정권의 수도가 되었고, 장대현교회가 있던 장대재 언덕은 오늘날 거대한 김일성 동상이 서있는 ‘만수대광장’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북녘 동포들은 무신론 공산독재정권의 폭정 아래 포로생활,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애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교회가 주님의 긍휼을 구하며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의 황무함을 그치게 해달라고 울며 간구한다면, 자비하신 하나님은 진노를 거두시고 그 당을 고쳐주실 줄 믿는다. 우리는 평양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고 북한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북한의 구원과 평양의 회복을 위해 거룩한 손을 들고 애통하며 기도하자. 평양아, 평양아! 동방의 예루살렘아!
#유석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