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의 역사를 짧게 정리하면서 귀감이 되는 장로들 몇 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작년에 총회 역사위원회에서는 새 역사 60주년을 맞이하여 교단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만든 바 있다. 본인이 위원장으로 재직 중에 만든 자료집이기에 여기에 기장의 역사를 그대로 옮겨 본다.
목포연동교회 순교자 김개수 장로
김개수는 1900년 4월 6일 전남 장흥에서 김문오의 외아들로 출생하 였다. 1927년 5월 20일 안장례씨와 결혼하면서 목포 양동교회 출석해 예수를 영접하였고 그 교회 민족주의자 박연세 목사 밑에서 신앙생활 을 하고 세례를 받았다. 김개수는 일본사람들을 상대로 어묵을 만들어 장사를 하며 성공적인 사업가가 되었다. 교회를 봉사하던 중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리하면 내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에 감명을 받아 순교하기 까지 어린이교회학교 교장으로 섬겼다. 조실부모하고 외로움을 경험한 그는 같은 처지에 있는 아이들을 위해서 부모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교회학교 교사로 또는 밤늦게 박연세 목사의 뜻을 받들어 부녀자들과 청년을 위한 야학당을 개설하여 나라를 구하고자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1929년 박연세목사의 목회 지침에 의해서 목포 동쪽 연동교회를 기도처로 하여 출석, 봉사하였다. 연동교회는 1934년 초대 교역자로 문명록 전도사가 부임하였고,초대목사로 이남규 목사가 부임, 교회가 부흥하고 김개수는 여러 집사들 틈에 끼어 스데반 처럼 살겠다고 다짐한 일등 집사였다. 김개수는 1946년 6월 장로로 임직하여 이남규 목사의 영향을 받아 애국적으로 행동하는 신앙인으로 자리잡았다. 신사 참배에 항거하다가 박연세 목사, 김창옥 장로, 이남규 목사 등 20여명이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순교 등 고문을 당했고, 김개수장로는 기독교교조선교단으로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한 이남규 목사를 모시고 30리 밖의 시골인 무안군 일로면 상리교회로 출석하면서 신사참배 없는 예배를 드렸다.
해방 후, 정부수립을 위해 많은 역할을 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철저한 반공주의로 국방장관 표창을 받았고 해방 후 첫 선거를 공정하게 치른 공로로 국회의장의 공로표창을 받기도 했다. 해방 후 무법천지에 동네 파출소를 손수 지어 6명의 순경을 두어 악습에 빠진 청년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기도 했다. 당시 연동교회를 시무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옷도 벗어주는 자애롭고 경건한 최명길 목사를 존경했고, 최 목사는 김 장로를 든든한 동역자로 여겼다. 그는 행동하는 애국자이면서 신앙인이었다. 그의 강연은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유모어와 탁월한 설득력이 있어 청중을 사로잡아 이끄는 거인이었다. 그의 집에 세 들어 사는 식구까지 불러모아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정에도 모범이 되고 자녀들을 철저한 신앙의 사람으로 양육하며 아브라함이나 고넬료를 흠모하였다.
6.25전란으로 애국청년단체의 단장으로 숙청대상 1호였다. 제주도는 이미 빨치산 수중에 들어가고 목포도 시간문제였다. 연동교회 당회가 모여서 교인들을 어디로 피난을 시켜 보호할 것인가를 의논하다가 특별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회의를 마치고 문밖에서 김개수 장로가 최명길 목사에게 "그러면 우리 잘 죽읍시다"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최명길 목사도 김개수 장로를 붙들고 "그래요 우리 잘 죽읍시다."하고 인사를 하면서 헤어졌다. 김개수 장로는 최 목사와 약속한대로 총칼로 무장한 공산당들에 의해 연행되었으나 그의 신앙을 조롱하는 자들에게 담대하게 예수를 전하고 갖은 고문을 당했으나 신앙을 저버리지 않고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에 애국청년단의 일에 대해서도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변호하였다. 1950년 음력 8월 16일 밤중에 대박산으로 끌려가 기도하고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집단 처형당해 순교했다.
후예로는 장남 김옥남(전주중앙교회원로목사. 기장증경총회장), 차남 김승남(미국장로교회목사) 등 2남 4녀의 후손들이 김장로의 순교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주중앙교회 순교자 김두병 장로의 감동 스토리
김두병은 1906년 3월 25일 전북 남원군 대강면 풍산리에서 김창원의 3남 1녀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예수를 믿기 전 무속에 빠져 교회를 아주 못마 땅하게 생각하던 그가 첫 아이를 잃고 아내를 동부교회에 보내고 아내가 교 회에 가서 목사님의 기도 중 마귀 잡귀를 일체 틈타지 못하게 해달라고 기도 했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치면서 나도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하고, 그 다음 주부터 동부교회에 출석하였다. 후에 친구들의 권유로 전주 중앙교회로 옮겨 극진히 봉사하였다.
1943년 일제 말기에 징용병으로 일본 북해도 북단 아오모리 광산지구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해방을 맞아 귀국선을 타고 오던 중 부산 앞바다에서 어뢰에 난파되어 기름 바다를 헤치며 가까스로 생환했다. 1949년 6월에 전주 중앙교회에서 제 6대 장로로 임직하며 기쁨에 넘쳐 주님을 위해 죽도록 충성할 것을 결의했다.
1950년 6.25전쟁 발발로 교회시설에 '중앙교회'라고 페인트로 표시하는 등 마지막 순간까지 교회를 사랑하며 목회자를 섬기고 자신의 직임에 충성을 다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부산으로 피난을 갔다. 교회의 일이 마음 놓이질 않아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전주로 돌아와 지하실에서 살다가 인민위원회 사무실에 끌려가 민주인사들과 줄줄이 묶여 개처럼 끌려다니며 가두시위를 했다. 전북 토목관구사무소에서 인민재판을 했는데, 학살에 가담한 자들은 술을 마셔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삽과 곡괭이를 가지고 쳐죽이는 천인공로할 만행을 저질렀다.
공산주의자들은 김 장로에게 "너는 믿는 사람이니 어디 죽여도 사나보자"고 조롱하면서 마지막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할 때 김장로는 "죽으면 천국에 갈터이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만 다만 아쉬운 것은 나는 일흔이 넘으신 어머님이 계신데 내가 먼저 죽는것이요. 또 하나는 마지막 죽는 자리에서 사랑하는 교우들과 함께 고별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라고 대답하며 손을 모으고 머리 숙여 하나님께 기도를 올리고 곡괭이와 삽에 찍혀 순교했다.
그는 평소 야곱이 이스라엘이 된 것처럼 완전히 변화된 생을 살다가 간 사람으로 교회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했으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몸으로 살아 낸 사람으로 후손들에게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라"는 유언과 함께 몸소 그런 삶을 유산으로 남겨주었다. 1950년 9월 28일에 순교하였고 전주시 효자공원묘지에 모셨다.
유족 아내 김복순 권사는 81세를 일기로 1994년에 소천했고, 장남 용신은 집사로, 차남 용희, 삼남 용문, 사남 용운은 열심히 교회에 충성하고 있다. 특히 고인의 장손인 김정곤은 현재 서울 '송암교회' 담임목사로 시무중이다.
익산 동련교회 동학 소접주 출신 백낙규 장로
전남 승주 태생의 백낙규(1876~1943)는 원래 동학군의 소접주 출신 으로 개혁과 개화에 꿈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1904년 세례를 받음 으로 이 교회에서는 최초의 세례교인이 되었다. "동학보다 예수를 믿 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첩경이다" 동학군에서 술꾼으로, 술꾼에 서 복음전도자가 된 백낙규 장로의 말이다.
백낙규장로는 사재를 털어 교회신축을 도왔으며 추가로 학교도 설립하였다. 동련교회는 민족의 계몽을 염두에 두고 계동학교를 설립하니 그때가 1909년이며, 사립학교로 인가를 받은 날은 1910년 8월 15일이다. 이어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하여 1916년 학교후원회를 조직하고 지원을 하게 된다. 이때 세웠던 학교의 국기봉 지주석은 항상 감시하고 방해하던 일제가 가져갔다.
1894년 19세때 동학농민군으로 참가, 동학군이 패하고 난 뒤 실의에 빠져서 동련마을로 잠입하여 포목장수를 하며 술만 드시면 울분을 터트리곤 하였다.
1900년 함라 장터에서 공주출신 오긍선 조사(후에 연세대 의대학장)가 "동학보다 예수를 믿는 것이 나라를 사랑하는 첩경이다."고 전해준 이 말은 실패한 동학군에서 술꾼으로 전락한 한 사람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백낙규는 그 길로 상투를 잘라버리고 예수를 영접했다. 그 좋아하던 술도 끊었다. 그러고는 구국의 신념으로 1900년 익산지역 최초의 교회인 동련교회를 세웠다. 백낙규가 하위렴 선교사로부터 세례를 받은 1904년 이었다.
마을에 궂은 일이 발생하면 백낙규는 솔선수범해서 해결했고, 심지어 한 여름 전염병에 걸려 죽은 시체들을 직접 염을 하고 장례를 치르기도 했다. 가정이나 생업보다 교회 일을 더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성실한 교인이 되었다. 이런 그를 두고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려면 동련교회의 백낙규처럼 믿으라"고 할 정도였다.
동련교회는 세 가지의 자랑거리가 있는데, 첫째는 계동학교다. 배움에 목말랐던 백낙규는 서당조차 제대로 없던 시골에 계동학교를 세웠는데 후일 계동학교는 복음과 독립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둘째는 장학사업이다. 동련교회는 장학사업을 통해 중,고,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셋째는 신용협동조합과 양곡조합의 운용이다. 이런 사회선교 사업을 통해 동련교회는 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그의 후손들은 "세상의 물질보다 신앙의 유산이 더 중요하다"는 고백으로 5대째 대를 이어 동련교회를 섬기고 있으며 그의 사남 백형남 집사는 제헌국회의원을 지냈으나 신앙을 지키다 한국 전쟁 때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렸다. 그의 유일한 후손인 백운선 장로는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호남대학교 대학원장으로 재직 중인 교수다.
'해남의 간디'라 불리우는 계곡중앙교회 서영범 장로
'해남의 간디'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지역사회의 신망이 두터웠던 서영범 장로는 한평생 교회와 지역사회, 교역자의 목회 돕는 일에 헌신 했다.
1886년 12월 6일 해남군 계곡면 월암리에서 태어난 서영범 장로는 아버지의 방랑벽 때문에 어려서부터 모진 고생을 했다. 갑자기 집을 나가 연락을 끊고 살던 아버지는 다시 나타나 술주정을 하며 행패를 부리다 돈을 가지고 다시 나가는 등 이루 말로 할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생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마을 월암교회에 나가시면서부터 삶에 활력을 되찾고 기쁨의 생활들을 하자 이를 본 아들 영범이 어머니를 따라 교회를 나가게 되었다. 어머니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가족들이 모두 교회에 나가고 없는 어느 주일날 자신도 교회에 나가 맨 뒷자석에 앉았다. '술주정뱅이 호랑이영감' 으로 불리는 사람이 교회에 나오자 가족들은 물론, 교인들도 무슨 큰일이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을 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순한 양처럼 끝까지 예배를 마치자 아버지는 교인들 이 지켜보는 앞에서 "예수를 믿으면 새사람이 된다니까 나도 오늘부터 예수를 한번 믿어 볼란다."며 교회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이때가 1919년, 그의 나이 60세 때였다.
늘그막에 예수를 영접한 아버지 서중찬은 어찌나 열심히 예수를 믿었던지 입교 6년 만인 1925년 장로로 임직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들 영범도 3년 뒤 장로가 되었다. 모범적인 신앙생활로 교회와 교인들 앞에서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주일 성수와 십일조 생활, 교역자를 섬기고 받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주일을 지키는 일에는 머슴까지도 온전히 쉬게 하는 등 철저했다. 주일에 갑자기 비가 쏟아져 들에 나가 낟가리를 추스르는 머슴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농사 잘못하면 1년을 망치지만 신앙 잘못되면 일생을 망친다."며 주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하지 말고 성경말씀대로 안식을 취하라고 했다.
서장로는 농사꾼으로서의 자질도 훌륭했다. 농한기라는 말이 없을 정도로 사시사철 바쁘게 움직였다. 겨울에는 겨울대로, 여름에는 여름대로 새로운 영농방법을 연구하고 개발하는 영농 전문가였다. 그리고 그의 이런 영농 방법 개선을 마을과 지역사회, 그리고 이웃 마을 등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다니면서 가르쳐주고 지도했다. 서장로의 이러한 처신으로 그에 대한 지역사회의 신뢰는 대단했다.
따라서 서영범 장로는 지역사회는 물론 해남군내에서도 덕망 높은 지도자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러한 서영범 장로에게 해남군수가 찾아왔다. 군수의 부탁은 공석중인 마산면(월암리가 당시는 마산면 소속임) 면장 직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서장로는 곰곰이 생각을 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군수님의 배려는 고맙지만 저는 면장을 할 수가 없습니다." 놀란 군수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교회 장로입니다. 공직을 맡다보면 주일에도 나가 일할 터인데 그건 안 됩니다. 주일성수는 교인의 기본 의무입니다."
목회 협력자로서의 장로역할에도 그는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목회자에 대한 예의도 정중했다. 서울동광교회 김인호 원로목사의 증언이다. "제가 한신을 졸업하고 전도사로 갔던 1957년쯤으로 기억됩니다. 아들 같은 전도사를 얼마나 정중하게 대하시든지 몸 둘 바를 모를 때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는 항상 앞장을 서서 도와주셨습니다." 김목사의 증언을 통한 서장로의 교회 섬기는 모습은 독특했다. 당시 20마지기의 농사를 지으시던 서장로는 추수감사헌금 때 제일 잘된 논 2마지기를 골라 바쳤다고 한다. 또 성전건축을 앞두고 염려하는 김목사에게 서장로는 "목사님은 아무 염려마시고 목회와 기도하시는 일에만 전념하세요. 건축헌금이 모자라면 그 부족한 돈은 장로인 제가 다 내겠습니다." 예상대로 건축비가 모자라자 서장로는 자신의 임야를 모두 팔아 성전을 완공시켰다. 교인의 대표인 장로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실천한 산 지도자였다.
서장로의 환혼예배 일화는 감동이다. 교회에 "빈손으로 오지 말고 다소간의 부조금을 갖고 오라"고 광고를 했다. 그 분의 성격으로 볼 때 이상하다 생각한 교인들도 하도 부조금을 강조하는 바람에 모두가 부조금을 가지고 참석을 했다. 예배 후 인사말을 통해 서장로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여러분이 저를 위해 내주신 축하금과 물품은 모두 교회에 바치겠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목사님 사택 수리비로 쓰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날 들어온 모두를 교회 회계집사에게 전하여 사택을 건축하였다고 한다. 서장로는 1969년 7월 20일 83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정직했던 기업인 수도교회 최태섭 장로
한국유리 회장이었던 최태섭장로는 평안북도 정주군 염호동에서 1910년 8월 26일 출생하여 변호사가 되려고 공부하던 중, 헌법을 보 다가 일본 천왕을 신성으로 받들어야한다는 헌법조문을 보고 변호사 되기를 포기하고 사업을 시작했다.
정미소 사업으로 시작하여 비누사업 그리고 무역업으로 발전하였다. 그때 그가 취급 하던 제품이 폭등하여 계약을 취소하면 쌀 천가마니나 되는 돈을 벌 수 있었지만 본래 계약대로 진행하여 중국인들에게 아주 큰 신임을 얻었다.
그 후 1945년에 해방이 되면서 기업주들을 악덕상인으로 간주하여 체포하여 죽이는 인민재판을 하였으나 같이 근무했던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평소 노동자들을 가족같이 대한 결과물이다.
한국전쟁이 터져 모두 피난 짐을 꾸리는 난리통에 최회장은 빌렸던 사업자금을 갚고자 은행을 찾았다. 은행 직원은 전쟁통에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갚을 필요가 없다고 했으나, 그는 되레 "난리통에 내가 죽어 돈을 갚지 못할지도 모르니 어서 받으라"며 돈을 갚고 영수증을 챙겼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원양어업을 시작하려 했지만 돈이 없어서 부산은행에 찾아갔다. 담보가 없었기 때문에 돈을 빌릴 수 없었다. 그때 난리통에 돈을 갚으러 온 최태섭회장을 알아본 직원의 도움으로 무이자로 2억원을 빌릴 수 있었다. 신뢰로 만들어 낸 대출이었다.
유리왕국을 건설한 고 최태섭명예회장의 '경영자는 하나님이 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청지기 경영론'은 너무나 유명하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평생 외제차를 타지 않고, 골프장도 거의 가지 않은 청빈한 기업가다.
최명예회장은 평생 '유리'라는 외길을 걸었던 몇 안되는 외곬 경영인 중 한 사람으로 기업경영인은 욕심내서 이것저것 사업을 벌리면 안된다는게 그의 경영이념이었다.
그의 '청지기 경영론'은 1969년 일찍이 회사를 공개해 가족 소유 지분이 10%를 넘지 않도록 하였다. 또한 노조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해야 한다는 원칙도 지켜 나갔다. 한국유리공업 노조는 1961년에 결성돼 그룹 역사만큼이나 오랜 역사를 자랑하고 있으나 노사간에 극단적인 마찰은 단 한번도 일어난 적이 없다. 최회장의 노조활동 불간섭이라는 원칙이 모범적인 노사화합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깨끗하게 부를 쌓는 기업인, 버는 만큼 베풀 줄 아는 기업인이었다. 많은 재산을 학교에 기부하여 활발한 교육사업도 펼쳤다. 국제기아대책기구 한국지부 이사장을 맡아 국내외 굶주리는 이들을 돕는 일에 심혈을 기울였다.
유리처럼 투명하고 진실된 경영인이었던 최태섭명예회장은 1998년에 소천했지만 재계의 영원한 청지기로 후배 경영자들에게 모범이 되고 있다. 특히 젊은 나이에 수도교회를 담임했던 원로 김상근 목사는 크고 세심한 어른으로 추억한다. 생전에는 늘 정초에 세배를 다녔으며 자기가 목사였지만 오히려 최장로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으며 신앙의 아버지로 마음에 담고 있다고 고백한다.
장학사업으로 빛을 발하는 대전노회 윤재경 장로
1921년 충남 부여군 옥산면 봉산리 108번지에서 출생한 윤재경은 일찍이 경성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의예과 3학년 시 폐결핵으로 중퇴하여 예수 믿고 1952년에는 32세 약관의 나이로 판교교회 장로가 되고 일생 교회와 지역사회를 섬기신 분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는 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도리어 치료를 받게 되었으나 백약이 무효하여 가정에 돌아와 간호사를 채용하였는데 군산 개복동교회 착실한 신자로 정성어린 간호와 동시에 성경을 읽도록 권유하여 성경탐독 중에 마음에 평안을 얻었고 당시 판교교회를 시무하던 권영진 목사(증경총회장)기 심방하여 성경을 풀어주고 기도를 드렸는데 나음을 얻어 확실한 신자가 되었다.
필자가 출생하던 1955년에는 충남성서고등학교 이사, 1970년에는 부여에 합동연탄공업사를 설립하였고, 1971년 충남노회 제27회 부노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76년에는 지금 아주 큰 교회로 성장한 부여동남교회를 개척하였다.
특히 윤장로는 1980년대 초 대전노회 교역자 자녀 교육보험 가입운동으로부터 1988년에는 총회 밀알장학회를 설립하여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가서도 자녀들과 지인들을 규합하여 임종직전까지 장학사업을 펼쳤다. 필자도 가난한 개척교회 교역자시절 자녀교육보험으로 도움을 받은 바 있다.
그의 헌신으로 만들어진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밀알장학회는 교역자 자녀장학금으로 지난 1998년도부터는 매년 각 노회에서 1명씩 추천 받아 「교역자 자녀 장학금」으로 지급하다가 최근에는 윤재경 장로 그 자녀들의 뜻에 따라 24개 노회에 1명씩 추천을 받아 1학기(24명), 2학기(24명) 각각 1,000,000원을 지급하고 있다.(매년 5천 여 만원)
윤장로를 잘 아는 원로 안기중, 김옥남 목사 등 그를 아는 분들은 모두 바나바 같은 장로라고 입을 모은다. 젊은 시절 판교교회를 위해서, 부여 동남 교회 개척을 위해서, 그리고 동문교회 개척을 위해, 자기 재산을 바쳐 봉사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윤장로는 늘 남을 위로해 주고 격려해 주는 분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는 학교, 장학사업 등으로 늘 인재육성에 헌신하였고, 주변 사람들과 화목했기 때문에 바나바 같은 사람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그는 사업보다, 명예보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기고, 주의 일이 부흥되기를 원했던 분이다. 특히 겸손하기 때문에 누구와도 잘 인화 하셨다.
동남교회 원로장로로 추대받은 후에는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장남과 두 따님이 살고 있는 하와이로 떠나 밀알장학회가 활성화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의 후손을 돌보시사 호놀롤루 해변가 언덕에 위치한 주지사의 저택을 매입하여 아름다운 노후를 보내셨다.
2005년 10월 3일 향년 85세로 소천하여 구룡면 태양리 선영에 안장할 때 총회는 기념비를 세워주었고 장례식 또한 대전노회장으로 모신 바 있다. 그는 독실한 신앙, 풍부한 지식, 온화한 성격, 소외계층에 대한 배려 등 양무리의 본이 되고 지역사회에서도 덕망이 있던 분이었다. 3남 2녀의 자손들 역시 믿음으로 살아 장남 성호는 하와이 아이에아교회 장로로, 차남 철호는 부여 수목교회 권사로, 막내 광호는 서울 동광교회 장로로 섬기며 밀알장학회를 위해 매년 큰 헌신으로 운영하고 있다.
맺는 말
감동이다. 정말 감동이다. 그 외에도 삼애(三愛) 영성의 김제 임상교회 한상용 장로 이야기, 여권신장에 앞장을 선 한국문단의 거두 서울성남교회 김말봉 장로, 순교자의 아들로 총회를 섬겼던 군산노회 해성교회 홍삼봉 장로 등 찾아보면 얼마든지 훌륭한 장로들을 만날 수 있다. 마치 여름 더위에 생수를 만난 듯 감동이다. 지면관계로 이만 줄이면서 앞으로도 훌륭한 장로들이 나와서 우리 기장은 물론 한국교회를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다.
글ㅣ이상호 목사(공주세광교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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