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한복음 5:1~18
영국의 화가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는 희망을 잃고 몰락하는 부랑자들을 다룬 교훈적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이다. 그가 그림을 그린 지 7년밖에 되지 않았을 때 런던의 성 바돌로매 병원에 무료로 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그 작품이 바로 '베데스다 연못의 그리스도'이다.
그림 중앙에는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38년 동안 병을 앓던 환자에게 "일어서라, 자리를 들고 일어나서 걸어라"라고 말하고 있다. 두 사람 주변에는 연못으로 들어가려는 많은 환자들이 그려져 있다. 호가스는 한쪽에 연못에 빨리 들어가려고 뇌물을 주는 부자의 행동까지 넣어 주변 사람의 무관심과 부조리로 인해 38년된 병자가 연못에 들어가는 일이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고발했다. 그에게 관심의 손길을 내뻗는 분은 오로지 예수님 한 분이셨다. 호가스는 그림을 통해서 환자들에 대한 자비의 필요성, 당시 사회의 부패성과 어두운 단면들을 그대로 묘사하려고 노력하였다.
호가스의 그림처럼 오늘 본문의 병자는 사람들의 이기주의와 무관심으로 인해 버림받아 삶의 희망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예수님께서 직접 찾아오셨고 그를 치유해주셨다. 그러나 저자 요한이 이 사건을 통해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단순한 치유사건 그 이상이다. 38년된 병자와 예수님의 만남은 우리가 이제껏 살펴본 만남과 사뭇 다르다. 38년된 병자는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도 없었고, 예수님이 그를 치유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고침을 받은 후에도 예수님께 대한 감사나 감격이 없다. 과연 이 무덤덤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유대인들에게는 여러 절기들이 있다. 우리가 대표적으로 알고 있는 3대 절기 이외에도 부림절, 수전절, 대속죄일과 같은 절기들이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해야 하는 명절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이 대표적이다. 모든 명절 때마다 예루살렘을 방문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마을 전체가 텅 빌 수 있으므로) 마을사람들은 서로 순차적으로 바꿔가며 예루살렘에 방문을 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는 것은 바로 이 3대명절 중 한 때에 방문하셨음을 뜻한다(1절). 저자는 본문의 명절이 어떤 명절인지 정확하게 기록해놓지 않았다. 하지만 3절에 보면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라는 언급을 통해 이때가 베데스다못 가에 물이 오기를 고대하는 시점이며 이는 '초막절'때임을 암시한다.
초막절은 9~10월 사이에 치러지는 절기인데 건기철이 끝날 무렵인 가을에 한주간 동안 지켜졌다. 그래서 초막절은 광야의 생활을 기념하는 동시에 건기철이 끝나고 우기철이 시작되기를 바라는 명절이었다. 성전에서는 일주일간 성대한 제사가 치러졌고 매일마다 이른 비를 구하는 기도가 행해졌다. 제사장들은 기혼샘에서 물을 길어서 제단에 붓는 행사를 거행하였다. 제사장이 금그릇에 기혼샘물을 가득 채울 때에 찬양대는 이사야 12장 3절을 합창했다.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사 12:3)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3대 명절은 모두 출애굽과 관련되어 있다. 유월절은 애굽에 탈출할 때를 기념하고, 칠칠절은 시내산에서 율법과 십계명을 받은 것을 기념하며, 초막절은 38년의 광야생활(신 2:14)동안 방랑하던 유목생활을 기억하는 절기이다. 그리고 성경은 오랫동안 병으로 고통 받던 병자라고 이야기하지 않고 38년이라는 구체적인 기간을 지적하며 이 환자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과 관련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명절 때의 예루살렘은 무척이나 분주하다. 거리는 수많은 상인들과 순례객들로 넘치고 모든 숙박시설은 이미 예약이 된 상태였다. 사람들은 성벽을 따라 장막을 치면서 일주일간의 명절을 보냈다. 명절을 보내려 예루살렘에 오신 예수님은 그런 인파들을 헤집고 어디론가 향하셨다. 도착하신 곳은 예루살렘의 북동쪽에 있는 '양문'(sheep gate) 옆에 위치한 베데스다라는 못이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아람어 '베티스다'라는 말의 음역으로 '자비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이 못은 다섯 개의 행각과 함께 예루살렘 구시가지에 자리잡고 있으며 옆에는 성 안네 교회가 위치해있다.
고대 당시에는 이런 치유의 장소들이 로마제국 전역에 많이 있었다. 아마도 베데스다도 온천과 같은 곳으로서 사람에게 이로운 광물질이 풍부하게 포함된 물이었을 것이다(2세기 순례자들의 사료에 의하면 베데스다의 샘이 움직일 때는 못이 붉은 색으로 변했다고 전해진다). 그런 물에 목욕을 함으로 인해서 일부 환자들의 건강이 호전되었고 소문이 퍼져 많은 병자들이 찾아오는 장소가 되었다. 사람들이 자주 찾는 장소가 되면서 그 속에 미신적인 요소들도 첨가되기 시작하는데 유대인들은 그런 치유현상을 천사의 활동과 연관 지어 생각했다. 긴 가뭄 끝에 비가 오기 시작하면 지하의 수로를 따라 간헐천의 물이 연못으로 유입되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때 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천사가 내려와서 물을 동한다고 생각하였고(3절)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바로 고침을 받는다는 미신이 사람들 사이에 퍼지기 시작했다(4절). 그리고 38년동안 병으로 신음하던 한 남자가 그런 미신에 대해 막연한 기대를 걸면서 그 못 가에 누워있었다.
그는 너무나도 쇠약해져서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물이 유입될 때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그곳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주변에는 서로 들어가려는 사람만 있을 뿐이지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7절). 그렇게 하루 하루 낙담하며 지내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 앞에 나타났다. 병자는 예수님을 전혀 만난 적도 본적도 없었다. 예수님은 병자를 측은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몸을 가눌 수 없어 땅바닥에 누워있는 그를 보시면서 예수님은 그의 병이 매우 오래되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러셨던 것처럼 그를 치유해주기 원하셨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병자의 가장 큰 소망이었겠지만 느닷없는 물음에 그는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물음에 베데스다의 병자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1. 그는 예수님의 직접적인 치유를 원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지속된 병으로 인해서 병자는 치료에 대한 소망을 잃어버린 채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 병 고침은 한낱 뜬 구름에 불과했다. 그는 주님이 병을 낮기 원하느냐는 물음에 자기 현실상황의 암담함만을 늘어놓았다. 자신의 병을 고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연못뿐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서 가망이 없다고 한탄했다. 또한 자기보다 좀 더 건강한 사람들이 먼저 들어가서 자기에게는 그런 기회조차 없다고 항변하였다. 그는 그렇게 한탄만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와 병을 고쳐주실 것을 간청했던 반면 이 사람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예수님의 물음에 "꼭 낫고 싶습니다"라는 소망을 이야기하지도 않았다. "제가 이렇게 몸이 힘들어서 들어갈 수 없으니 제가 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라는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예수님이 누구인 줄 알았는지 잘 알 수 없으나 예수님을 주님이라 호칭하면서도 결코 어떤 도움도 요청 드리지 않았다. 이처럼 주님을 알지 못하는 이 병자의 모습은 주님을 만나고 대면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찾지 않는 크리스천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우리가 믿음을 갖게 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바로 그분의 지배아래 놓이게 된다. 매 순간 순간 그분과 만나고 기도를 통해서 삶의 숱한 어려움들을 극복하고 삶의 지혜로운 방향을 걸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나의 삶의 해결사라는 생각과 믿음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삶은 변화를 맛볼 수 없다. 주님을 바라보는데 있어 우리를 방해하는 것은 바로 현실의 장벽이다. 38년된 병자처럼 우리는 언제나 문제가 생겼을 때 현실의 어려움에 집중한 나머지 낙담하며 기도할 용기조차 내지 못한다. 삶의 극적인 변화는 한낱 기적에 불과하거나 특정한 은혜를 입은 사람에게만 나타나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런 기적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단정하고 주님께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힘, 돈, 배경, 잘난 부모, 능력, 지혜 등이 없어 결코 어려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주님을 위한 멋진 인생과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는 실패의식에 사로잡혀 있다.
주님께서는 매 순간 우리에게 물으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변화 받고자 하느냐?", "네가 일어서고자 하느냐?" 그런 주님의 물음에 우리는 더 이상 부차적인 변명을 늘어놓지 말아야 한다. 주님께서 물으실 때 우리의 답은 이전의 믿음의 사람들처럼 "예 주님 제가 낫기를 원합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 일어서기 원합니다. 말씀만 하시옵소서"라는 즉각적인 응답이 필요하다. 매일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면서도 그분께 인생의 도움을 청하지 않는 것은 한낱 거짓된 믿음에 불과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다.
2. 병자는 고침을 받았음에도 깨닫지 못했다.
예수님은 꼭 자신에게 부르짖는 자에게만 병을 고쳐주시는가? 시원한 바람과 따사로운 햇살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공급되듯이 주님의 치유의 역사는 꼭 믿는 사람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 깊으신 섭리에 대해 우리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다른 이들처럼 간절한 소망과 간구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에게 일어나 걸어가라고 명령하신다(8절). 순간 몸에 변화가 오는 것을 느꼈고 다리에 힘이 생겼다. 그런 신비한 기적을 체험했던 그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 매우 흥분되기도 했지만 38년동안 전혀 체험하지 못했던 낯선 그 경험에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걸을 수 있다는 기쁨에 곧바로 그 장소를 벗어났다. 얼마나 걷고 싶었고 뛰고 싶었겠는가?
그렇게 기쁨에 겨워 어디론가 향하고 있을 때 그의 얼굴을 알아보는 한 유대인 무리와 마주쳤다. 누구보다도 그의 병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그가 걷고 있는 모습에 놀라며 그에게 물었다. "자네 도대체 어떻게 나았는가? 누가 너의 병을 고쳐주었는가?"(12절) 그들에게 누구라고 말하려는 순간 그는 자신을 고쳐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침을 받았다는 기쁨에 취한 나머지 그분께 감사하다는 말도 전하지 못했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를 묻지도 않고 그냥 온 것이다(13절).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그는 베데스다로 돌아가보았으나 이미 그곳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다.
우리는 모든 삶의 이면에 항상 주님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가 어려움에 부닥치기도 하지만 뜻하지 않은 성공을 하기도 하고 기적과 같은 일을 체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몹쓸 질병에서 나음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인생의 좋은 일들이 바로 주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운으로, 때론 인생의 절호의 기회를 잘 잡았기 때문에, 때마침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내가 열심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가 너무나도 많다. 이런 교만과 무지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며 그분을 우리의 삶으로부터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는 삶에서 나쁜 일들이 생기게 되면 내가 뭘 잘못했나 하면서 삶을 되돌아보며 주님께 매달리곤 한다. 그러나 뜻하지 않았던 좋은 일들이 우리 삶에 일어날 때는 그 즐거움에 심취하여 그런 일이 왜 우리에게 일어났는지는 생각지도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복과 은혜를 주심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위해 더 가치있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기치 못한 은혜에도 주님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음을 반드시 깨달아 아는 영적 지각이 필요하다. 그뿐만 아니라 돌이켜보면 우리 삶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누구나 실오라기 하나 가지지 못한 채 이 땅에 태어나지만 이후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운데 오늘의 삶을 영위해가고 있다. 이 은혜를 깨닫고 감사할 줄 아는 영적지각이 있을 때에 우리의 삶은 더욱더 풍요롭고 가치있는 삶이 될 것이다.
3. 자신의 안위만 찾는 자는 결코 주님을 증거할 수 없다.
병 고침의 기쁨도 잠시 그는 곧 곤경에 빠지고 말았다. 이전까지 그 병자의 가장 큰 불행은 바로 곁에서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병에 걸려 아파할 때도 그는 자신을 부축해서 물 속에 넣어줄 친구하나 있지 않았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가 큰 죄를 짓거나 저주를 받아 그런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를 불쌍히 여기기 보다는 멸시하였을 것이다. 이제는 병이 나았으니 사람들은 그를 받아줄까? 불행히도 그가 병이 나은 것을 알아본 사람들은 그가 병이 나았다는 사실에는 관심조차도 없다. 그들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그가 구전 전통을 어겼다는 것이다.
원래 구약 성경의 안식일 규정에는 "처소에 머무르는 것(출 16:29), 불을 피우지 않는 것(출 35:3), 짐을 옮기지 말 것(렘 17:22), 상업적인 일이나 농사일을 멈춤(느 13:15-22)"과 같은 일들을 금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런 금지사항을 만드신 것은 사람의 휴식을 위한 것이며 특히 노예까지도 모두 쉬게 하려는 하나님의 자비의 뜻이 담겨 있었다. 안식일의 가장 큰 의미는 "무엇을 해라 말아라"가 아니라 바로 "쉼"이다.
하지만 인간들이 이런 하나님의 자비의 뜻은 무시한 채 금기사항에만 집중하기 시작했다. 종교지도자들은 더 철저하게 지킨다는 구실로 말씀을 확대해석하고 수 없는 규정들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강요하였다. 오죽하면 당시 사람들이 이런 규정들을 머리카락에 매달린 산과 같다고 말했을까?
구전을 기록한 "미쉬나"에서 안식일을 다룬 <샤밧>편을 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 서른 아홉 종류를 금지사항으로 규정해놓았다
"씨뿌리기, 밭갈기, 빵굽기, 세탁하기, 잠자리 펴기, 두 땀 이상의 바느질, 물건을 끌어내리는 것, 물건을 쌓아 올리는 것, 망치질, 매듭매기......" 심지어 식탁 위의 빵 부스러기의 양이 올리브 한 알 크기를 초과하면 지저분해도 치울 수가 없었다. 그 중 오늘 본문과 연관되는 규정이 있는데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물건을 옮기지 말라"는 사항이었다.
이 사람은 예수님이 "자리를 들고 가라"하는 말에 따라 자신이 깔고 있던 담요를 들고 걸어갔다. 그리고 바로 이점이 유대인들의 눈에 띠였고 유대인들은 그가 안식일 규정을 어기는 심각한 죄를 지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후 치유받은 병자는 성전에 와있었는데 이는 제사장에게 자신의 병이 나은 것을 보여주고 확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확인을 받으면 앞으로 정상적으로 사회 생활이 가능했으나 동시에 누군가 자신이 안식일을 범했다고 고발하면 재판에 넘겨질 수도 있었다. 병을 고침 받은 기쁨도 잠시 담요를 옮긴 죄로 오히려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안식일을 의도적으로 범한 자는 사형에 처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초조한 마음을 가지고 성전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을 만났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다(14절). 이것은 무슨 말인가? 이는 죄를 지으면 다시 병에 걸린다는 뜻이 아니다. 38년동안 괴롭혔던 육체의 질병보다 "더 심한 것"은 바로 영혼의 질병, 즉 구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즉 예수께선 병 고침만을 기뻐하지 말고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전의 병자들 이야기를 통해서 병 고침 후에 항상 주님께서 그들이 구원을 받았음을 확증해주시던 일들을 기억한다. 결국 이 사람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했던 것도 영혼의 구원이었다. 마땅히 그는 그것을 사모하고 구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혼의 생명보다 육신의 생명에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예수님의 우려는 현실이 돼버리고 말았다. 그는 예수님의 경고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는 자신을 고쳐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자 유대인들에게 바로 달려갔다. 그는 자기의 허물을 알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한다. 안식일 전통을 어긴 것은 모두 예수란 사람이 시켜서 그렇게 했던 것이지 결코 자신이 원해서 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예수님께 감사를 표해도 모자를 판에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생명의 은인을 팔아 넘겼다. 또한 16절에 보면 결국 이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향한 유대인들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16절)
병을 고침 받은 후에 예수님을 전파했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베데스다의 병자는 병고침을 받은 후 오히려 예수님을 향한 박해를 불러왔다.
주님께 은혜를 입은 우리의 삶은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증거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주님을 향해 빚진 자의 삶이 아닌 우리의 안위와 욕심만을 위한 삶을 살아가게 되면 결국 그 인생의 결과는 주님을 욕되게 만들고 팔아먹는 인생으로 접어들게 돼버리고 만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성공에 관심이 없다. 우리가 얼마나 어려움을 당하는지 힘들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 그들은 끊임없이 우리의 잘못을 찾아내며 넘어뜨리려 한다. 그 경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우리는 지친 삶을 살아가게 되고 때때로 그들과 타협할 것을 강요 받는다. 주님과 멀어질 수록 그들과 가까워질 수 있고 그러면 우리의 삶이 좀 더 안정적으로 보장을 받을 것이란 유혹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삶은 결국 우리 주님을 욕되게 하고 교회를 핍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세상이 점차 악해진 측면도 있지만 오늘날 일부 목회자들과 기독교인임을 자처하는 유명인사들의 잘못된 행실들은 한국교회를 점차 어려움으로 빠트리고 있다.
광야에서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를 감사하는 초막절에 베데스다(자비의 샘)에서 일어난 사건은 한결같이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그 자비하심을 깨닫지 못한채 세상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어리석은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스스로 기적을 체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은혜를 배신하는 삶을 살았다. 언젠가 어떤 분이 내게 출애굽기에서 인상깊은 기적을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난 신명기 29장 5절이라고 답한 적이 있다.
"주께서 사십 년 동안 너희를 광야에서 인도하셨거니와 너희 몸의 옷이 낡아지지 아니하였고 너희 발의 신이 해어지지 아니하였으며"(신 29:5)
사십 년 동안 옷이 낡아지지 않았고 신이 해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기적중의 기적이었고 한결 같은 하나님의 자비였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신과 옷이 너무 익숙한 나머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끊임없는 불순종을 저지르고 말았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기적을 체험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적신으로 이 땅에 온 우리가 의식주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당연시 받아들여야 할 사항이 아니라 날마다 우리 안에 일어나는 하나님의 기적이자 자비이다. 이 은혜에 감격하지 못한다면 우리 또한 출애굽의 백성처럼 베데스다의 병자처럼 말씀에 불순종하고 주님을 져버리는 결과를 맞이할지도 모른다. 우리 속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넘친다면 우리의 삶을 더욱더 은혜가 넘치는 삶으로 변화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