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오순절과 우리의 신앙

교단/단체
편집부 기자
이기영 목사   ©기장총회

오순절과 우리의 신앙(요엘 2:28-32, 사도행전 2:37-47)

2014년 성령강림절

1. 오순절과 성령강림

오순절은 연대적인 의미에서 보나 근본적인 의미에서 보나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의 탄생일입니다. 사도행전의 주인공도 베드로나 바울이 아니라 성령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은 <성령행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은 28장 31절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속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미완성의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도행전의 속편의 저자는 바로 오늘을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 이하에 보면 성령의 은사는 특정한 곳, 특정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21절)."의 말씀대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로 신뢰하는 순간 그는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입니다. 오순절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발생했으나 그 중심적이고 영구적인 사건은 "저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2:4)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중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 것은 첫째로, 그리스도인 생활의 순결성의 비결입니다. 둘째로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능력의 비결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생활이란 엄격하고 고정적이고 정체된 그런 생활이 아닙니다. 그것은 열심 있고 역동적이고 진보적인 생활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로서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 아홉 가지를 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뿐입니다. 즉 그것은 "사랑"입니다. 희락은 행복을 얻는 사랑입니다. 화평은 안정가운데 있는 사랑입니다. 인내는 기다림 중에 있는 사랑입니다. 자비는 응답 속에 있는 사랑입니다. 양선은 공손한 태도 속에 있는 사랑입니다. 충성은 신뢰 가운데 있는 사랑입니다. 절제는 억제 가운데 있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만 가지면 성령의 모든 열매를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2. 성령에 대한 새 이해와 그 배경

"창조주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개혁교회는 이 구호를 거듭 외우며 그를 기다려 왔습니다. 20세기 중엽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나고 폐허와 혼돈, 허무를 되새기고 방황하는 인류를 향하여 신학자 칼 바르트는 창조주 성령강림을 무(䉑)에서 창조에 못지 않다고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있다는 사실과 성령으로 이런 자유를 얻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과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했다는 사실보다, 또는 세계가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사실보다 결코 적은 기적이 아니다."고 했습니다.

이미 언급했듯이 오순절 성령강림절은 신약성서의 처음교회가 탄생한 날입니다. 이 날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탄생한 날이면서, 제자들 개개인의 신생의 날이므로 온 교회가 새로운 감격으로 맞아야 할 날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와 부활이 일회적(once for all) 사건인 것처럼 오순절 성령강림도 일회적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은 구약성서 요엘의 예언의 성취입니다. 요엘은 성령의 예언자로 기원전 400년경 사람입니다. 이 시기는 고대 근동에서 페르시아가 지배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의 포로후기에 예루살렘 중심의 유대는 팔레스틴의 여러 작은 나라들 사이에서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통하여 다윗적인 신정국가 수립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요엘은 이러한 시기에 예루살렘의 무역 경쟁국들인 두로, 에돔, 그리고 블레셋을 원수들로 규정하고 종말론적인 "야웨의 날"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 국가의 회복과 구원을 묵시적으로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은 요엘의 야웨에 대한 굳건한 신앙으로써 위기를 극복하도록 선포된 위로와 격려의 메시지였습니다. 요엘은 동족이 외적의 침입과 억압에 시달려 실의에 빠질 위험에서 국가적 재난이 종식되고 땅이 풍성한 곡식과 열매를 생산하는 새로운 시기가 도래할 것이라고 위로의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새로운 구원의 시기는 성령의 충만한 강림이 누구에게든지 임하며,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되는 은혜의 때가 될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강림으로 약속된 마지막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처음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종말론적인 신앙으로 발전시켰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래에 어느 때가 되면 야웨는 이 세상의 모든 육체에게 성령을 물 붓듯이 부어 줄 것인데, 자녀들은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요엘의 이 본문을 처음교회의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에 대한 예언으로 받아들이고, 베드로는 이 본문을 예언의 성취로 해석하고 있습니다(행 2:16-21).

3. 새 천년(New Millennium)의 징조와 성령

오늘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까? 새 천년(New Millennium)을 맞이하여 과학자들은 인간 게놈 프로젝트의 완성으로, 불치의 질병들을 모두 정복되고, 사람들은 앞으로 150년을 살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은 2020년대에는 100세 시대에 진입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100세 시대는 사망자가 가장 많은 나이가 90세라는 것입니다.

아날로그로부터 디지털로의 변화는 또한 아주 가까운 장래에 가정과 사회에서 엄청난 변화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구 곳곳에서는 자연적 재앙들로 수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하게 건설되었다는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는 선진국들이 자랑하는 최첨단 과학기술의 취약성과 인류문명의 비합리성을 또다시 입증한 사건으로서, 환경단체들과 여성단체들이 요구하듯이 핵발전소의 단계적 폐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원전 르네상스"시대를 구가하는 데에 제동을 건 것입니다. 또한 지구는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으며, 지구 온난화로 인한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그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합니다. 세계 곳곳에서는 아직도 인종적, 종교적, 경제적 갈등으로 인한 분쟁과 전쟁이 무기개발에 박차를 가하며 세계평화를 저해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같은 사건들이 요엘서의 주제를 이루고 있는 "야웨의 날"이라는 점입니다. 요엘은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들의 부정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불의로 인하여 이 세상은 종말을 맞게 될 것을 경고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날 유대백성들의 불의와 세계곳곳에서 자행된 음란(3:3), 보복(3:4), 탈취(3:5), 인신매매(3:6) 행위들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이 우주와 역사의 주인 되심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세계 모든 백성은 정직한 마음으로 잘못을 회개하고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2:32). 다시 말하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를 위하여 세계만민에게 하나님의 영, 성령을 부어 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2:28-29).

성령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능력이며 하나님 자체입니다. 성령은 삶을 부여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life-giving power)입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 코에 숨을 불어 넣어 숨쉬는 존재가 되게 했습니다(창2:7).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을 향하여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요20:22)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으로서 부활의 능력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새로운 삶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나약하고 절망하며 불신앙적인 제자들을 일깨우고 새로운 사명을 주었을 뿐 아니라, 그들을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되도록 해 주셨습니다. 성령은 곧 치유하여 주시는 능력(the healing power)인 것입니다. 성령은 만물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능력(the creating power)입니다.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고 성서는 증언 합니다.

4.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역사들(works)

오순절 성령강림은 회개운동과 처음교회 탄생과 선교운동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교회의 세가지 직능은 1) 케리그마(kerygma), 즉 선포인데 이것은 하나님나라가 왔다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2) 코이노니아(koinonia), 사귐인데 이것은 교회공동체를 의미합니다. 이제(지금) 여기(now and here)에서 하나님나라의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며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사랑의 구현입니다. 3) 디아코니아(diakonia) 즉 봉사(servant)입니다. 아직 도래하지 않은 하나님나라의 확장을 이룩하는 도구입니다. 열심히 섬기고 희생하기까지의 봉사 섬김의 행위입니다.

회개(metanoia)는 지금 하던 일, 혹은 가던 방향이 잘못된 것을 알 때 뉘우쳐 참회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런 소극적 의미에서 그치지 않고 더 적극적인 뜻이 있는데, 즉 잘못된 것을 그만두고 뉘우치는데 그치지 않고 뒤돌아서는 결단의 행위입니다. 회개는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에 돌아와 안기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깊은 회개를 통한 거듭남, 중생의 역사, 새 생명의 탄생을, 인격의 변화운동 즉 참 사람 됨의 운동입니다.

성령강림 후 처음교회는 공동체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믿음과 사랑, 진실과 사귐의 공동체를 만들어 갔습니다. 처음교회는 그 신앙과 생활에서 '서로모임' 서로 어울림' '서로 나눔'의 공동체를 이룩해 갔습니다. 이런 공동체의 힘은 선교 뿐만 아니라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자연스럽게 미덕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무리가 점점 더하게 되었습니다.

성령강림 후 처음교회는 형제와 형제 사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 주인과 종들 사이에 거리감을 두지 않고 하나가 된 공동체였습니다.출신, 학식, 지위, 빈부의 차이 없이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같이하는 교회다운 새로운 공동체였습니다. 주님의 성령은 이렇게 처음교회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을 이루게 하고, 이러한 모습이 곧 선교의 힘이 되어 그 위력이 역사하여 세상 속으로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하나의 감격으로만 간직했던 처음교회는 성령의 임재를 체험한 후 그 감격적 사실을 전하는 실천적 교회로 변모되었습니다. 나아가 모든 사람이 모이고 복음을 전하고 함께 나누는 공동체적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신앙과 삶도 일치되어 기쁨으로 하나님나라 확장에 헌신함으로써 더욱 발전해 가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5. 성령은 계속 새 역사를 창조해 간다.

오순절 처음교회에 강림했던 주의 성령은 오늘 이 시대에도 똑 같은 모습으로 임하시고 역사 하십니다. 교회의 원형인 처음교회의 모습을 본받아 성령의 은사를 힘입고 주님께서 분부하신 하나님 선교 사역을 충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역사의 교회는 항상 처음교회를 본받아 새로운 변화, 개혁을 해 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교회의 타락의 전세계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그리스도 교회는 무엇보다도 정직함을 회복해야 합니다. 오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핵심이 무엇이고, 그리스고 교회가 지향하는 본래 신앙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고 재해석해야 합니다.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그의 책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2천년 그리스도교 역사의 흐름을 "개울"로 비유합니다. 물이 흘러 들어오는 개울에는 온갖 쓰레기와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다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로마 가톨릭이 무너지지 않고 2천년 동안을 흘러 왔겠는가 라고 한스 큉은 반문합니다. 그것은 시대마다 교회가 빛을 잃고 몰락을 거듭해 왔지만, 그 쓰레기 가득한 개울에 썩지 않는 한줄기 맑은 물이 끊어지지 않고 공급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 한줄기 맑은 물은 예수의 영, 성령입니다. 제도가 아니라 예수의 영이 그리스도교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중세기 교회가 아주 어둡고 타락했을 때 예수의 영은 성 프랜시스에게 나타났고, 그 후에는 아빌라의 테레사 같은 사람이 등장하고, 로마에 베드로 대성당을 짓기 위해 속죄부를 팔자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20세기에 교회가 사회적으로 커다란 죄악을 범하던 히틀러 나치 하에서는 본 회퍼 목사가 고백교회를 일으켰습니다.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교회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제도나 숫자가 아니라 소멸되지 않은 예수의 영이 맑은 샘물처럼 그리스도교 역사의 개울을 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6.25 한국전쟁의 참화 동안에도 한국교회는 교권 쟁탈과 근본주의 문자주의 성서해석의 악몽 가운데 있을 때 장공 김재준목사는 <십자군>으로 교회개혁(마치 한국의 루터가 되는 자의식으로)을 했습니다. 나라가 군사 독재정권으로 어둠의 나락에 있을 때 <제3일>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으로 맥을 이어가게 했습니다. 이와 같이 역사의 교회는 언제나 예수의 영, 성령에 사로잡혀 사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처음교회의 원형을 회복해 갔습니다.

A. 토인비는 '우수의 도식'으로 역사를 관찰하였습니다. 인간의 비참한 역사는 일종의 구속사(Heilsgeschichte)가 되는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갈대아의 문명이 한 바퀴 일어났다가 굴러 넘어가는 시대의 깊은 우수를 체험한 이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같은 높이의 영성을 가진 이가 났고, 애굽 문명의 수레바퀴가 일어났다가 굴러 넘어가는 때에 역사의 비극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에서 모세가 났으며, 바벨론 문명의 바퀴가 넘어가는 시절에 이사야가 났으며, 헬레니즘의 비극의 종막에 바울이, 또한 로마제국의 영원한 도시 로마가 게르만의 알라릭의 말 발굽에 유린 당하고, 그 불길에 무섭게 타오르는 시절이 어거스틴을 산출한 것입니다. 시대의 우수를 이렇게 경험할수록 사람들의 영은 더 높은 경지로 승화합니다. 그렇기에 토인비는 상정할 수 있는 최고 최종적인 영도자는 나사렛 사람 예수와 같은 '종교가'로서 한 개인 한 사람의 심령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인 '서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시대의 방향을 이끌고 나아가기 전에는 현대 서양문명이 당면하고 있는 난국을 타개할 수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6.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예수의 영, 성령을 어떻게 무엇이라 정의 내릴 수 있습니까? 성령은 지혜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책망하십니다. 성령은 모든 것을 아시며,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와 은혜를 알도록 도와주시고, 영적 분별력을 주십니다. 성령은 또한 보혜사 입니다. 위로와 상담의 역할을 하시며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기쁨을 주시며, 열매 맺게 하시고 은사를 주십니다. 이 모든 역사는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사실을 증거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이 성령은 이제 만민에게 주어져야 할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능력의 영으로 구박이 있는 곳에 풀어주는 영이요, 불의가 성행하는 곳에서 정의를 실현시키는 영이요, 거짓이 있는 곳에서 사랑과 용서의 꽃을 피우는 영이요, 어둠과 실의에 주저앉아 있는 자에게 희망과 창조적 능력을 부여하는 영입니다. 분단으로 남과 북의 소통이 끊어진 한반도 우리민족이 진정으로 형제자매로서 하나가 되는 평화통일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 질 것을 믿는 것입니다. 나아가 평화통일문제, 복지국가 건설과제, 자연생태환경파괴문제, 이주자(떠돌이)문제, 양성평등의 문제, 장애인 문제 등의 올바른 해결을 위한 지혜와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이 모든 문제가 선교의 과제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인 성령을 받은 자는 책임질 줄 아는 자요, 정직하고 성실한 자요, 불의와 거짓과 세상적인 모든 것에 예속되지 않은 자유인입니다. 그는 창조적 능력을 이어받은 만물과 역사와 운명의 주인입니다. 그는 창조의 수고를 할 줄 알며 안식의 기쁨을 즐길 수 있는 자유인, 곧 그리스도의 현존을 사는 자입니다.

"성령을 받으라"(요20:22)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신뢰이며 사랑의 표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성령을 체험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가며, 이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폭로하고, 평화와 정의의 세상을 이룩해가야 합니다. 성령강림의 은혜가 충만하고 처음교회와 같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은혜가 풍성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7. 마감하면서-일치의 영과 성령체험의 새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성령체험과 성령의 활동하심은 일치(unity)를 향해 나아가게 합니다. 세상을 향한 빛과 소금이 영향력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와 예배 속에서 신령과 진리로 드리고, 일치를 찾아야 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이들에게 성령은 하나이며 평화를 찾아야 합니다. 분단의 상황, 한반도의 아픔을 함께 이겨내는 지혜와 능력은 "일치의 영성"(unity in Ecumenical spirituality)일수 밖에 없습니다. 에큐메니칼 영성이란 열린 마음의 영성입니다. 내가 소속된 교단의 신학이나 경건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공유되고 연결된 영성(spirituality in sharing and connecting)을 찾아야 합니다. 교회의 교회됨이란 세상을 향해서 일치된 또는 일관된 그리스도교 영성을 삶을 통하여 보여주어야 합니다.

중생의 거듭남이란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를 통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후에 자신의 삶을 두 가지 차원- 성령체험 이전과 성령체험 이후- 으로 설명합니다. 성령체험 이전의 삶은 수많은 악덕과 죄로 가득 찬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체험 이후의 삶은 중생(born-again)의 삶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옛 처음교회의 성령체험의 방식이나 해석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체험이해와 유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처음교회에서 성령 안에서의 삶이란 개인적이며 동시에 공동체적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성령의 통전적 이해는 교회의 일치를 향하도록 가르쳐 줍니다.

그러므로 에큐메니칼 영성이란 성령과의 관계성 속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진정한 에큐메니칼 영성은 각 교회들의 성령의 사역을 돕는 것입니다. 성령과 교회의 일치는 하나님의 영의 일하심(working of the Holy Spirit)을 통하여 교회의 관계적 본질을 나타냅니다. 성령의 사역을 통한 일치의 신비(mystery of the unity)는 교회를 통해서 나타납니다. 또한 일치의 신비는 교회와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관계의 그물망(the web of the relationship in the church and the world) 안에서 모든 것을 연결시킵니다. 일치의 신비는 특정 교파나 교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또한 일치의 신비는 그리스도의 윤리 안으로 모든 교회와 신자들을 초대합니다. 일치의 신비는 궁극적으로 세상이 인정하는 가치를 낳게 합니다. 일치의 신비 안에 들어가야만 진정한 제자 직이 수행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일치의 신비의 그 깊은 세계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의 영성을 에큐메니칼 시대에 이루어내야 할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오순절 성령강림의 은혜로 중생의 새 삶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글ㅣ이기영 목사(기장 총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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