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석태 칼럼]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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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기자
손석태 박사(개신대학원대학교 명예총장)
손석태 교수   ©갈렙바이블아카데미

하나님께서는 6일 동안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날에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기사를 보면 다른 피조물을 창조할 때와는 다른 점이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특별한 점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그의 창조의 목적과 그 구상(design)을 밝히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고, 그들이 바다의 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 위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고 말씀하신다.

사람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그의 대리자(agent)로 세우자는 것이고, 이 목적에 부합한 사람을 "그의 형상을 따라 그의 모양대로"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형상'과 '모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우리 신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질문에 답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많은 논의를 하고, 논쟁을 벌여왔다. 이들의 논쟁점은 형상과 모양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형상과 모양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타락 이후의 인간에게 아직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유지되고 있는 것인가? 등이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형상과 모양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칠십인역이 마소라 본문을 충실하게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소라 사본은 본문을 "우리가 사람을 우리의 형상, 우리의 모양대로 만들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데, 칠십역은 본문을 마소라 사본과 달리 "우리가 사람을 우리의 형상과 우리의 모양을 따라 만들자"(ποιήσωμεν ἄνθρωπον κατ᾽ εἰκόνα ἡμετέραν καὶ καθ᾽ ὁμοίωσιν)라고 번역하고 있다. 마소라 사본은 형상과 모양 사이에 칠십인역처럼 접속사 '그리고'(καὶ )가 없다. 따라서 마소라 본문은 형상과 모양을 별개의 실체로 구분하지 않는 반면, 칠십인역은 형상과 모양을 분리함으로 마치 우리 인간이 두 개의 서로 다른 실체로 구성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종교개혁 이전까지 칠십인역의 번역대로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여 우리 인간을 '형상'으로 번역하는 '체렘'(~lc)과 '모양'이라고 번역하는 '대뭇'(twmd)의 두 요소로 구성되었으며, '형상'은 인간의 이성적인 면이며, '모양'이란 인간의 영적인 면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으로 '모양'(대뭇)은 잃었지만, 동물들과 구별되는 '형상'은 사람들에게 남아있고, 여전히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구분이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배격하고 형상과 모양을 통합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를 뒷받침이나 하듯이 주전 9세기 시리아의 텔 파카리에(Tell Fakhariyeh)에서 출토된 앗수르 아람의 이중 언어로 쓰여진 비문에는 왕 하두-이시(Haddu-yisi)의 상을 가리켜 형상(mlc)과 모양(twmd)이라고 짝을 지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두 어휘는 서로 구별 없이 같은 의미를 가지고 교환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창세기 5:1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의 '모양'(twmd)대로 창조하셨다고 적고 있다. '형상'이라는 말을 생략하고 있다. 그리고 5:3에는 아담이 셋을 "그의 모양대로, 그의 형상을 따라"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성경 내의 용례를 볼 때도 '형상'과 '모양'은 서로 교환 사용하는 같은 의미의 말임을 알 수 있다.

형상과 모양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면 이것을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는 통치적 기능을 가진 면을 나타내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고대의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문헌들은 이러한 기능적인 면을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실마리를 제공한다.

고대의 셈족 사회에서는 그들을 통치하는 왕을 가리켜 신의 형상이나 신의 모양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왕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인사를 한다. "내 주 왕의 아버지도 바로 벨의 형상(tsalam bel)이요, 내 주, 왕도 곧 벨의 형상(tsalam bel)입니다" "땅의 주, 왕께서는 샤마쉬(shamash)의 형상입니다" "오 주거하는 세계의 왕이시여, 당신은 마둑(marduk)의 형상입니다" 또한 이집트에서도 왕의 이름으로 같은 개념을 사용하고 있는데 투탄카문(Tutenkh-amun)은 '아문(Amun, 신의 이름)의 살아있는 형상'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투트모스 4세는 '르(Re, 신의 이름)의 모양'이라고 불리웠다. 이처럼 왕을 가리켜 신의 형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왕권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며, 지상의 왕이 천상의 신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자라는 의미에서 그의 신적 권위와 능력을 상징하는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시편 8:5-6에서는 창세기의 하나님의 사람 창조를 기술하며,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워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만물을 다스리게 했다고 적고 있다.

개역성경은 여기서 칠십인역을 따라 하나님을 '천사'로 번역하고 있는 데 마소라 본문이 더 문맥상 옳다. '관'이라고 번역하는 히브리어 '아타라'(hrj[)라는 말은 왕관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왕관을 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마치 고대 근동 세계의 왕들을 신의 형상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이 성경에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왕으로 세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사람을 창조하고자 할 때의 목적과 같이 사람을 그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고 그에게 만물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하여 만물의 왕이 되게 하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은 대왕으로 사람의 종주이시며, 사람은 그의 분봉왕이며 그의 속주로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고대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주종관계, 곧 계약관계를 볼 수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란 사람의 기능적 속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나 칼빈을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은 신약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에 대하여 참 지식, 의, 거룩함이라고 가르치며(엡 4:23-24; 골 3:10), 심지어 형상이라는 말에 우리의 몸도 포함된다고 말한다.

'형상'을 사람의 기능적인 면보다는 내면적인 면에 대해서 설명하려 한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라고 말한다(골 1:15).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우리에게 온전하게 보여주며, 십자가에서 구원을 이루신 그리스도만이 타락하여 손상된 우리의 형상을 치유해주실 수 있는 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점차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고전 3:18). 따라서 우리 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인생 목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닮아 가야할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롬 8:29; 고전 15:49; 골 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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