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부독재에 맞서 직선제 개헌을 이끌어낸 6·10 민주항쟁이 27돌을 맞았다.
'반독재 민주화 항쟁'인 6·10 민주항쟁은 4·19혁명과 5·18광주민주항쟁과 더불어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앞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위시한 군부 내 사조직인 '하나회'는 신군부세력과 함께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는 데 성공했다.
이후 제5공화국을 이끌던 전두환 대통령은 1985년 일명 '체육관 대통령'으로 불리는 간선제를 통해 연임에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독재정권에 지쳐가던 민중을 자극했다. 이듬해인 1986년 개헌 서명운동에 1000만명이 동참하는 등 군부 정권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여야가 헌법 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하는 등 정치권을 중심으로 한 헌법 개정 움직임이 가시화되기도 했으나 1987년 4월13일 전 전 대통령이 '4·13호헌(護憲) 조치'를 내리면서 개헌 논의는 중단됐다.
이 조치를 통해 전 전 대통령이 군부독재정권을 유지하겠다는 뜻을 천명하면서 정국과 민심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슬 퍼런 독재 정권 아래 드러내지 못했던 민주화를 향한 열망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책상을 '탁' 치니 '억'하며 쓰러졌다"는 말로 잘 알려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했다. 서울대 학생이던 박종철씨는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물고문을 당하던 중 1987년 1월14일 숨졌다.
당시 경찰은 이 사건을 조직적으로 축소·은폐 발표했으나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에 의해 고문에 대한 내용부터 경찰의 축소·은폐 시도까지 모든 사실이 만천하에 밝혀졌다.
전국에서 시위대가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같은 해 6월10일 박씨 고문치사 사건 조작·은폐를 규탄하고 호헌 철폐를 요구하기 위해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이 전국 22개 지역에서 개최한 국민대회에 24만명(주최측 추산)이 참가했다.
경찰이 수천 명을 연행하고 국본 간부 220여명을 구속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했지만 항쟁은 명동성당을 중심으로 5일여 동안 이어졌다.
잠시 잠잠해졌던 항쟁의 불씨는 6월15일을 기점으로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당시 젊은 직장인들로 구성된 '넥타이 부대'의 가세가 결정적이었다.
같은 달 26일 전국 30여개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린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까지 참여한 인원은 500여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최루탄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를 외치는 국민의 함성에 결국 전 전 대통령은 굴복했다.
1987년 6월29일 당시 민주정의당(민정당) 대표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한 6·29민주화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같은해 12월 16년만에 직선제로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 민정당 소속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면서 6·10민주항쟁은 절반의 성공만 거둔 채 마침표를 찍었다.
한편 6·10민주항쟁은 20주년을 맞이하던 지난 2007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 말기에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으나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동안 6·10민주항쟁 기념식에 단 한 번도 얼굴을 비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