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말 만주 이주민, 덜 보수적이고 덜 배외적(less anti-fore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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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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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26회 학술 발표회, '존 로스 선교사 시기 만주 이해' 발제
박형신 교수   ©오상아 기자

7일 진행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세미나실에서 진행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26회 학술발표회에서 박형신 교수(남서울대 교수)는 '존 로스(Rev. John Ross) 선교사 시기 만주에 대한 이해'를 주제로 발제했다.

그는 "이 연구는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소속 존 로스 선교사가 활동하던 1872년부터 1910년까지의 만주를 연구대상으로 설정한다"며 "이 시기는 청대 역사 연구에서 흔히 '청말'로 일컬어지는 시기로서 정치적으로는 1851년 이래 함풍제, 동치제, 광서제 및 선통제의 통치 하에 양무운동 및 다양한 개혁운동이 실패하고,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배했으며 결국 신해혁명(1911)을 통해 전통적인 왕조가 무너지고 공화정의 중화민국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시기와 대략적으로 일치한다"고 했다.

덧붙여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개신교 선교부들이 선교지부를 마련하였거나 선교활동을 펼쳤던 곳으로서의 만주에 대한 기초연구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먼저 박 교수는 "'만주'의 정의에 대해 지리학적으로 볼 때 대체적으로 한국, 중국, 몽골, 시베리아의 사이에 위치한 지역을 가리키며 중앙지대, 남부, 서부, 동부 및 북부의 하위지역들로 분류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중앙지대는 송화강과 넨강을 중심한 지역이며, 남부지대는 지금의 요녕성이 자리하는 곳으로 이 중앙지대와 남부지대를 일컬어 내만주라고 부른다"며 "내만주 외에 서부, 동부 및 (중앙지대의 위쪽에 있는)북부지대를 외만주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어 "중국 청대의 판도는 내만주와 외만주 모두를 포함했지만 1858년도에 중국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아이훈조약을 따라 흑룡강으로부터 스타노보이산맥에 이르는 지역을, 1860년에 제2차 아편전쟁에 이어진 북경조약으로 우수리강 동편의 지역을 러시아에 넘겨줌에 따라 중국 측의 만주는 외만주를 상실했다"고 했다.

이에 "1860년 이후로 중국 측의 만주는 주로 내만주를 의미하며, 이는 대체로 현재의 행정구역인 흑룡강성, 길림성, 그리고 요녕성을 포함하는 지역을 가르킨다"고 했다.

그는 "아일랜드장로교회 선교부가 첫 선교사를 요녕성에 파송하는 1869년은 바로 이러한 축소된 만주시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했다.

(가운데)박형신 교수가 발제하고 있다.   ©오상아 기자

또 '만주지역'과 관련된 역사적 명칭에 관해서 "만주는 이 지역에서 발원한 만주족이 자신들의 발상지를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단어이고, 영어표현 'Manchuria'로서의 만주는 19세기 말엽 서양인들이 즐겨 사용한 표현이며 선교사들 역시 그에 따랐다"며 "만주국은 1932년 일본에 의해 세워진 괴뢰국의 명칭이다"고 했다.

그는 "중국본토 또는 한족 중국인들이 사용한 '관동(East of the Barrier)'이라는 표현은 장성 안쪽에 살던 이들의 장성 밖의 국외자들을 대하는 인식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며 "특히 한족 중국인들이 사용한 '동북'이라는 용어는 이전 왕조 청나라의 정체성 등을 거부하고 일본, 러시아, 한국 등 인접세력의 접근을 견제하면서 이 지역을 중국의 소유권으로 강력하게 선언하고자 하는 것이다"고 했다.

이어 청말 시기 '만주'의 정체성에 대한 견해에 대해 첫째는 '만주의 역사적 정체성과 통일성을 부인한 중국화된 동삼성의 논리', 두번째는 '만주의 역사적 독립성과 내적 통일성을 인정하면서 만주족 및 만주전통을 긍정하는 견해', 세번째 연구경향은 '다양한 정체성들 사이에 존재하는 경계지역 또는 중간지대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했다.

만주 지역에 분포한 종족-민족에 대해서는 "만주는 만주족과 한족 등 다양한 종족-민족이 공존해왔던 지역으로서 샤머니즘과 중국종교들 뿐만 아니라 라마교와 이슬람까지도 포함하는 매우 다양한 종교들을 보여준다"고 했다.

또 "풍부한 자연자원과 만주평원을 보유하면서도 적은 인구를 지니고 있던 만주는 중국본토와 조선 등지로부터 대규모의 이주민을 끌어들였다"며 "빈곤한 주변의 이주민들은 청말 시기에 지속적으로 만주의 북부지역 등으로 이동하였으며 만주사회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동인이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1902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 밀러 그래함(J. Miller Graham) 선교사가 출간한 그의 책 'East of the Barrier'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이민자들이 항구를 통해 만주로 들어오고 있는데그 대부분은 중년남성이라고 확인해준다. 물론, 그는 가족단위 이민자들도 목격했다"며 "이주민들은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만주에 정착하며 청 정부는 이들 이주민들이 개간한 땅에 대해 4년 동안 무료로 임대한다고 서술했다"고 했다.

또 "대체로 이러한 북쪽 성들에 사는 거주자들이 남쪽에 있는 그들의 형제보다 덜 보수적(less conservative)이고 덜 배외적(less anti-foreign)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이 예전에 의지하던 것들을 떠나서 자유로운 삶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더욱 진보적이고 더욱 견고하며, 서구적 영향들에 감수성이 더 풍부하다"고 평가한 그 책의 한 부분을 소개하며 "복음선교를 위한 밝은 전망을 내놓았다"고 말했다.

그는 "이 시기에 만주에서 선교활동을 펼친 아일랜드장로교회(PCI)와 연합장로교회(UPC)/스코틀랜드연합자유교회(UFCS)는 중앙선교지부 기준으로 볼 때 주로 봉천성과 길림성에서 활동했다"며 "빈곤한 이주자와 전쟁으로 인한 이재민들 속에서도 복음선교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외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지배에 대한 강한 의도를 드러냈으며, 결국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20세기 초에 요동지역을 차지하는 세력이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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