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6월 4일, 중국 베이징에서 일어났던 천안문사태가 25주년을 맞으면서 중국 당국은 최고 수준의 테러경계령을 내리며 대규모 경찰력을 천안문 일대 배치했다. 또한 인터넷 상 보안통제수위도 높이며 정보통제에도 나섰다.
4일, 중국 당국은 테러경계령을 내리고 베이징 시내 곳곳에 경찰 인력 10면명과 경찰견 600마리 등을 투입해 삼엄한 경계태세를 내렸다. 천안문 사태 유혈 진압 당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곳인 무시디(木樨地站)의 지하철역 일부 출입구도 차단됐다. 톈안먼 광장과 인민대회당 주변은 차량 출입이 통제됐다. 중심가와 주요 도로 진입로에서 무장경찰이 24시간 순찰을 하고 있으며, 외지에서 베이징으로 들어오는 버스터미널 승객들을 상대로 신분증 검사도 실시했다.
또한, 당시 희생자 유족에 대해서도 가택에 연금시키기도 했다.
중국의 인터넷 검열 감시 기구인 '그레이트파이어'는 지난주부터 구글 검색과 지메일 등 일부 서비스 접근을 막기도 했다. 아울러 중국정부는 자국 웹서비스 사이트인 바이두(百度)와 웨이보(微博)도 통제되거나 차단해 가장 강력한 수준의 검영을 실시했다. 미국 구글 본사 대변인은 "최근 4일 간 중국 정부의 검열로 이메일, 번역기, 캘린더, 이미지를 포함한 구글 서비스 대부분이 차단돼 구글 접속량이 평소보다 절반 가량 줄었다"고 밝혔다.
한편, 중국 내에서 표현의 자유가 허용된 홍콩에서는 이날 천안문 사태 희생자를 추모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중국 외교부는 3일 "1989년의 정치적 풍파에 대해 중국 정부는 이미 명확한 결론을 내렸다"고 밝히며 국제 사회의 천안문사태 재평가 요구를 받아들일 계획이 없음을 나타냈다.
천안문 사태는 1989년 당시 개혁개방의 중요 인물이었지만 공산당 내 부패를 비판하다 실각당하고 급사한 후야오방 공산당 총서기를 추도하기 위한 모임으로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억눌린 민심이 폭발하면서 학생, 노동자, 시민 100만여 명이 참여한 민주화시위로 번졌다. 당시 덩샤오핑 주석은 계엄군을 동원해 무력으로 시위대를 해산했다. 당시 시위대 875명이 목숨을 잃고 1만4550명이 부상당했다. 군경도 56명이 죽고 7525명이 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