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교회의 개혁1 ( 배태진 총무의 한국기독교장로회 장로회임원수련회 강연 )
저는 지금껏 축사와 인사 격려사를 주로 해왔지 강의는 별반 해오지 않았는데 오늘 안 해 보던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장로회임원들 앞에 강의를 할 만큼의 강사가 아닙니다만 아마도 회장이신 유영준 장로님께서 사랑하셔서 저를 세워주신 것 같습니다. 유영준 회장님께 감사드리고 우리 기장을 한국사회와 한국교회 가운데 굳건히 세워지기 까지 참으로 헌신해 주신 여기 모이신 장로회 임원님들과 전국에 계신 모든 기장의 장로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요즘 한층 더 "한국기독교"가 인터넷 공간에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고 있고 엄청난 비판과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세월호를 소유한 그룹의 실질적 CEO가 유병언 목사이고 그 목사가 기독교복음침례회 소속이고 구원파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 뉴스를 통해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미디어들은 대다수의 승객들을 내팽개친 채 세월호의 선장을 비롯한 선원들은 전원 탈출하여 살아서 생존자 명단에 들었는데 그 선장과 선원들이 대부분 구원파에 소속한 교인들이라 보도하였습니다.
정통 기독교는 그들을 이단이라고 합니다만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와 이단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네티즌들은 기독교하면 구원이요 구원파라고 해서 기독교와는 엄격하게 구분하여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와 개독교의 차이로도 보지 않고 개독교일반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류의 비판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쯧쯧! 개독교가 또 사고를 쳤구만! 개독교의 구원이란 자기네들(선장과 선원)만 살리고 다른 이들은 다 죽이는가봐!" 여기에다가 최근 상영되고 있는 영화 <노아>는 그런 인식에 한 몫을 합니다. 영화 <노아>는 창세기의 노아를 블록버스터의 재미를 더하기 위하여 심각하게 오용을 하였습니다. 홍수가 닥치자 살려고 방주 안에 들어오려고 하는 사람들을 네피림들이 노아를 도와 다 죽이지 않습니까?
"거봐! 개독교의 구원이란 자기네와 자기네 가족들만 살리고 나머지는 다 죽여버리거나 죽도록 내버려 두는거야! 걔네가 믿는 하나님도 그렇게 무정한가봐!!" 그런 비난입니다. 저는 영화 "노아"를 보았는데 성경을 심각하게 왜곡한 것을 도처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구원파 교리의 핵심은 역시 구원인데 <죄를 깨닫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고 한 번 영혼의 구원을 받으면 육신은 자연히 구원된다>고 주장하고 <회개와 믿음이 빠진 "깨달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나중에 성경의 가르침과 다른 구원파와 권신찬 목사는 이단으로 정죄됩니다.
<정통과 이단>의 문제를 다룬 신학책들을 보게 되면 이단은 왜 생기는가? 근원적인 문제를 질문합니다. 한마디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서 역할을 잘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므로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복음침례회나 구원파 유병언과 그의 일파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 기독교 일반을 비판한 대 대하여 우리 한국기독교는 "우리는 유병언이나 구원파가 아닌데!!" 하면서 비난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사실상 우리 기독교가 교회로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단들이 발호하게 되었고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되지 못하였기에 우리가 정의 평화 생명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이 세상에 각종 탐욕의 악과 이기주의의 악과 무책임의 악이 판치고 기승을 부려도 그것을 방기하고 나몰라라라 한 것이 젊은 군인들을 죽이고 대학생들을 죽이고 단원고 고등학생들을 죽인 것이 아니었냐고 참으로 하나님 앞에 진실로 회개해야 할 이들이 바로 우리 한국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을 죽였고 우리의 죄가 어린학생들을 죽인 것이라고 참회하고 회개하면서 참으로 생명을 우선시하는 문화를 만들고 정의로운 사회구조와 체제를 만들어갈 때 조그마한 소망이라도 생길 것입니다. 금번 세월호 참사와 함께 우리 한국기독교의 일그러진 모습을 직시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직면하게 된 문제를 <루터의 종교개혁과 한국교회의 개혁!>이라는 주제로 풀어가고자 합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해가 1517 년이니 이제 3 년 후면 종교개혁 500 주년이 됩니다. 유럽의 교회만이 아니라 세계교회는 종교개혁 500 주년에 즈음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루터가 애시당초 종교개혁을 일으키려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카톨릭교회의 부패상과 하늘의 구원을 인간의 돈이나 물질로 사고파는 비성서적인 현실을 성경을 인용하며 조목조목 95 개조로 비판한 것이 출발점이었습니다.
마치 성냥불 하나를 그어댄 것이었는데 나중에 그것이 당시 카톨릭교회를 뒤엎어 버리고 기독교세계만이 아니라 당시 유럽을 불태워버리는 커다란 불길로 타오르게 되고 급기야 세계역사를 중세에서 근대로 전환시키는 촉발점이 되었다는 것을 마르틴 루터 역시도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당에 붙인 95 개조의 핵심은 하나의 성경말씀이었습니다. 구약 하박국 2 장 4 절에 나오기도 하고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인용한 구절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기서 <의인>이란 사도 바울에 의하면 의로운 일을 행하는 사람이거나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게 인정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로마서 4 장 18 절 전반에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그리고 22 절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게 여기셨습니다. 여기서 의인이란 구원과 직접적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사람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루터가 당시 카톨릭교회를 비판한 것 중에 하나는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하여 돈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한 것"은 "인간이 하는 그 어떤 행위가 교회가 정한 기준에 의하여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획득케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하늘에서가 아니라 인간이 정한 인위적인 것으로써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배치됨을 말한 것입니다.
당시 면죄부 판매사였던 테첼이라는 신부는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면죄부를 세일즈하였는데 그가 한 말 중에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면죄부를 사기 위해) 금화를 통 속에 떨어뜨려 "땡그랑!"하는 소리가 들리는 그 순간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너희 부모님들의 영혼은 지옥이나 연옥에서 천국으로 자동적으로 옮겨지게 되는 것을 믿으시라!!" 마틴 루터는 "그거야 말로 성경말씀을 무시한 사기다!" 한것입니다.
그 이유를 성경 로마서와 하박국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지 무슨 면죄부를 산다고 해서 무슨 선한 행위를 한다고 해서 무슨 공적을 쌓는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카톨릭교회는 구원을 인간이 하는 행위나 업적으로, 그리고 무슨 선한 행위와 교환수단이거나 교회에 헌금하는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시켰던 것인데 마르틴 루터는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할 교회가 그런 사기를 치면 되느냐 강력하게 비판하고 저항한 것입니다. 95 개조 중에서 32 조는 이렇습니다. <32. Wer durch Ablassbriefe meint seiner Seligkeit gewiss zu sein, der wird ewiglich verdammt sein samt seinen Lehrmeistern. 32. Those who believe that through letters of pardon they are made sure of their own salvation will be eternally damned along with their teachers. 32.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업적이라 할 때 마르틴 루터와 같은 동시대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은 좀더 철저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데 그 믿음도 인간의 공적이 아니라 성령이 주시는 은총의 선물이라 하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주님의 구원을 받았다고 할 때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아브라함의 믿음도 온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약속을 바로 믿지 못하는 신실치 못한 여러 구석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갈이라는 첩을 두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이스마엘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여기신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연약한 믿음을 보시고 그것을 온전케 하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전적인 그의 은혜로서 그를 의롭다 인정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 의하면 아브라함은 천국에서 나사로를 위로하고 있다 하였으니 그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른 것입니다. 베드로의 믿음도 온전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걸어 내게 오라 하였을 때 한 발을 뗐습니다. 그러나 의심하다가 물 속에 빠져갔지만 예수님은 그를 붙잡아 주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지만 그 믿음을 보시고 은혜로우신 하나님께서 그를 온전케 하시고 그를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이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생각입니다.
16 세기 당시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 안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말씀 더 정확하게 보자면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초기 정신은 좋았는데 그 개혁이 수행되는 가운데 종교개혁의 불길이 일어나는 가운데 많은 가슴 아픈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종교개혁이 힘을 얻게 되자 그것을 빌미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서로의 지역에서 서로 각 나라에서 심지어는 한 가정 안에서도 카톨릭과 반카톨릭으로 나뉘어 싸움을 하고 전쟁을 일으켜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나쁘다 지적하면서 그것을 고치려 하다가 더 나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모두 다 기독교(Christianity)입니다.
둘 다 사랑의 예수님을 믿고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는데 그리고 성경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서로 죽고 죽여 유럽 각 나라에서 종교전쟁으로만 해도 수백 만 명의 피를 흘리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밝히고 하나님의 뜻을 밝히겠다고 하면서 서로 칼과 총부리를 들이대고 이교도라고 해서 죽인 것입니다. 그 당시 행태로 보면 카톨릭도 반성경적이었고 프로테스탄트도 반성경적이었습니다.
특히 종교개혁자 칼빈은 삼위일체를 부인한다는 이유로 셀베투스를 화형에 처하는데 묵인하게 됩니다. 개혁은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는데 성경의 중심은 사랑인데도 사랑과는 반대되는 증오와 미움에 사로잡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피흘리며 하신 말씀입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누가복음 23 장 34 절) 종교개혁이 지속되면서 생명을 살리고 구원하는 종교가 아닌 생명을 죽이고 해치는 미움의 종교가 되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개혁 500 주년이라 하여 기념하자는 것은 꼭 종교개혁이 역사적으로 선한 유산만 남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종교개혁 초기에는 당시 부패한 카톨릭교회의 안티테제(anti-these)로서 성경적으로 옳은 일을 하였으나 인간의 죄성은 종교개혁을 오히려 성경과는 동떨어진 하나님의 뜻과는 먼 그곳으로 인도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열심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처음 시작은 옳았습니다. 우리 이스라엘 민족이 왜 그토록 고난을 당하고 외세의 식민지가 되었는가?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면서 보다 더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우리는 고난에서 해방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지키기 위하여 더욱 세부적인 사항을 만들어 그것을 민중들로 지키게 하였습니다. 원래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것은 인간을 위해서 였는데 오히려 그 세세한 계명들이 인간을 구속하고 얽어매었습니다. 저들은 <율법>을 <율법주의>로 만들어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동떨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회칠한 무덤이라 하시면서 신랄한 비판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하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짐 지워 놓았던 율법주의의 짐도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마가복음 2 장 27 절)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법을 주시고 율법을 준 것은 인간을 자유토록 하기 위함이고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지 결코 구속하고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을 밝히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이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듯이 종교개혁의 프로테스탄트들도 종교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주장하는 바를 반대할 때 그들을 화형에 처하여 죽게 만들고 같은 하나님을 믿는 카톨릭교도들과 전쟁을 하여 많은 사람들이 죽고 죽였습니다. 인간의 죄성이 낳은 결과입니다.
한국의 교회들은 종교개혁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합니다. 종교개혁 500 주년을 앞에 놓고 있는 우리 한국교회는 종교개혁의 최초의 그 정신을 바로 이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프로테스탄트
라 하는데 "protest"는 항의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 아닌 것, 하늘 뜻이 아닌 것에 "protest"한다는 것인데 과연 한국교회는 오늘 이 시대 하늘의 뜻을 세우면서 악한 것들과 제대로 싸우고 있는지 되물어야 합니다.
아니면 한국교회는 개혁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현재의 기득권을 지키려고만 하고있지 않은지? 또 다른 한편으로 혹시 한국교회가 개혁을 한다면서 혹시 바리새인과 같은 우를 범하지 않았는지 혹시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같이 개혁을 한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는 더 멀어지지 않았는지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한국사회로부터 엄청나게 비난받고 있습니다. 특별히 인터넷 공간에 가보면 한국교회는 도가 지나칠 정도로 얻어 맞고 있습니다. 네티즌들이 당연하게 쓰는 용어가 바로 개독교입니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개같은 종교", "독을 품어내는 종교"란 뜻입니다. 제가 제일 처음 이 말을 인터넷에서 접했을 때는 화가 났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우리 기독교를 매도하고 욕할 수 있는지 해도 너무 한다 싶었습니다. 그때 만해도 저는 시골에 있는 교회 담임목사로 있을 때였습니다. 우리 기독교가 그래도 잘하고 있는 것들도 많은데 못하고 있는 것들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켜서 그렇게 비난을 하는 것은 상궤에 벗어난다 싶었습니다.
제가 (기장)총회 기관목사를 하고부터 한국교회의 실상에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게 되면서부터 저들이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들에 정확하게 해당하는 너무나도 많은 면모를 우리 기독교가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우리 기독교의 현상을 보고 기독교 밖에서 기독교를 비판하거나 비난하는 강도가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생각, 잘못한 것보다도 매를 덜 맞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길거리에는 노숙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교회들은 수백억, 수천억씩 주고 교회를 짓는다든지, 교회를 사유재산과 같이 여겨서 대형교회들을 자식들이 세습한다든지, "살인마 전두환을 교회강단에 세우고 축사를 하게 한다든지, 저들 독재자들을 위하여 조찬기도회를 개최한다든지", "독재자 박정희를 찬양하는 예배를 드려준다든지", "교회들 사이에 교단들 사이에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또 교단장이 되기 위해 법정소송을 벌인다든지", "가짜박사학위를 받거나 제조한다든지 그리고 교회주보에 버젓이 내놓는다든지", "목회자가 여러 가지 스캔들을 일으킨다든지", "온갖 이권에 개입해 있다든지!" "헌금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천국의 축복과 치환시킨다든지!" "기독교를 반공이데올로기와 일체화시킨다든지" 등등 오늘날 교회의 안과 밖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소재들과 꺼리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인터넷 공간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는 저들은 <기독교>를 <개독교>로, <기독교지도자>를 <개독교의 괴수>로, <성경>을 <똥경>으로, <그리스도인>을 <예수쟁이>로, <평신도>를 <병신도>로, <집사>를 <잡사>로, <목사>를 <먹사>로, 혹은 평신도 피를 빨아먹고 산다고 <뱀파이어>로 말합니다. 저들에 의하면 <교회>는 개들이 사니까 당연히 <개집>이라 합니다. 기존 교회들은 이렇게 비판하는 저들을 적그리스도(anti-Christ)로 말하고 기독교를 해하려는 "붉은용의 세력들" 혹은 "공중의 권세잡은 이들"이라 평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저들을 공격하고 사탄의 무리라고 공격하기 전에 저들이 왜 그렇게 우리를 그토록 공격해댈까? 우리 자신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은 없는 것일까? 조용히 우리의 모습들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신학교를 다닐 때 학교 앞에 기독교서점이 있었는데 마르크스를 예언자 씨리즈에 담아 만든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을 보자 "아니 마르크스는 하나님을 믿지 않은 무신론자인데 이 따위 인물을 예언자씨리즈에 담은 연유가 무엇일까? 궁금해 하면서 그 책을 샀습니다. 가만히 서문 속에서 그 의도를 찾았는데 대충 그러했습니다. 소련에 공산당 혁명이 일어났을 때 당시 민중들은 굶주려 죽어가고 전제정치에 의해 죽어갔을 때 당시 러시아기독교인 러시아정교회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성직자의 후드 색깔을 무슨 색으로 할 것이냐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민중의 고난에 대하여 아랑곳하지 않고 높은 상아탑 위에 고고한 논쟁이나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민중들의 고난을 아파하면서 당시 현상의 기독교를 무신론자 마르크스로 하여금 비판하게 하고 "민중들의 아편"으로 비판한 것이니 마르크스야 말로 당시 하나님께서 시대의 예언자로 삼으신 게 아니었겠는가 그런 논조였습니다. 성경에 이방왕들을 들어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이스라엘 백성을 치지 않습니까?
그런 시각에서 보면 오늘날 인터넷 공간에서 기독교를 혹독하게 비판한 그 세력들은 <익명의 예언자들>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딸이라는 자들이 하도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행하니 하나님께서 안티기독교가 되어서 저들을 통해 기독교를 그렇게 혹독하게 비판하고 비난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저들은 "anti-Christ"가 아니라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말해주는 심판 예언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욕을 해대는, 비난을 일삼는 저들에게 우리의 참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라 생각하고, 우리의 옷매무새도 그걸 보고 고치고 우리의 얼룩과 흠도 그 거울을 보고 고치는 오히려 우리는 저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정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겠느냐?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 이니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짠 맛을 잃어 밟히고 있는데, 밟힌다고 밟는 저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항변할 수 있겠습니까? 왜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보냐고 저들에게 손가락질할 것이 아니라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서서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들은 우리를 공격하는 저들을 반격할 것이 아니라 왜 우리가 그렇게 공격을 받을까 연구하고, 우리들 안에 있는 저들이 말하는 "개같은 짓들"이 무엇인지 우리들 안에 독을 품어내고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보아야 합니다.
저는 언젠가 서울의 강남의 한 목사가 -물론 기장교회는 아닙니다만- 기독교텔레비젼에서 설교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설교의 요지는 "북한의 공산주의자들, 저 무신론자들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다 도말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하면 그 많은 교인들이 "아멘!"으로 응답하였습니다.
설교가 "공산주의자들을 회개하도록 하여 주께로 나오게 하여 저들도 하나님의 은총의 품 안에 있게 합시다!"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오만 있지 저들에게 복음을 전하자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그 설교 속에 사랑의 예수님은 없었습니다.
기독교를 개독교로 비난하는 주장들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하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저들의 비난 속에서 우리가 그 중심을 봐야 하는데, 비난의 핵심이 뭐냐? "너희 속에는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기독교를 말하고 예수를 선전하지만 너희들 자체 속에 그리스도가 없고 예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간디는 인도의 독립투쟁을 하는 가운데 서구 기독교를 경험하면서 그런 비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좋아한다. 하지만 기독교인은 싫어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와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 만이 아니라 유럽의 기독교도 비판을 받았고 역사적 기독교도 그렇게 비판을 받았습니다. 저는 몇 년 전 우리 교단과 선교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미국 제자교회 총회에 다녀왔습니다. 거기서 하비콕스 박사가 특별강연을 했는데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기독교와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로 나뉘어진다! 콘스탄티누스 이전의 기독교는 박해받고 순교도 한 초대교회 전통을 담지한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였다면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먹어버린 것처럼 여겨졌지만 오히려 제국주의에 의해 기독교가 먹혀 버린 껍데기만 남고 함몰되어버린 기독교의 탈을 쓴 제국주의 종교가 되었다.
기독교는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예수 정신은 어디로 온데간데 없고 제국주의 정신만 살아있어 그 정신으로 계급주의적 질서를 만들었다. -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 부제 복자 등 - 또한 십자군이라는 미명아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어린이와 부녀자를 포함해서 이슬람이라 이교도라 하여 칼로 도륙하였다.
제국의 질서는 통일성(uniformity) 인데 교리가 서로 다르다고 화형으로 다스리고 콘스탄틴 이후의 기독교는 한마디로 베려 버렸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한국기독교가 개독교로서 예수가 없다!"는 것과 하비콕스가 말한 "기독교의 탈을 쓴 제국주의"는 의미상 평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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