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문화로 성경읽기’를 주제로 대담중인 이어령 박사(양화진문화원 명예원장)와 이재철 목사(한국기독교선교100주년기념교회)가 ‘달리다굼’을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본문은 마가복음 5장 21-43절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그의 집으로 가다 12년간 혈루증 앓던 여인이 자신을 만져 병이 낫고, 그 사이 딸이 죽었지만 다시 살리시는 이야기다.
이어령 박사는 “달리다굼, 할렐루야, 마라나타, 호산나, 에바다, 아멘처럼 성경에는 번역이 안 돼 원어 그대로 나오는 말들이 중요하고, 여기서 기호학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며 “언어라는 게 뭔가, 하나님은 무슨 말을 쓰시는가, 하나님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이 오늘의 주제가 될 것”이라고 서두를 열었다.
이 박사는 “신약성경 기자들이 다른 말은 모두 헬라어로 번역했는데, 실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아람어인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소녀야 일어나라’고 하면 될텐데 굳이 왜 원문 그대로 썼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이어령 박사의 설명은 이렇다. 예수님 말씀은 크게 ‘비유로 된 말’과 ‘하나님의 말’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말’은 성령, 살아있는 말, 음을 고치면 안 되는 말, 우리가 말하는 ‘주문’ 같은 말인데, 이런 부류는 산스크리트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처럼 종교마다 존재한다. ‘달리다굼’은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말씀과 가장 가까운 원형이었다.
이어령 박사는 “지난 시간에 비유를 함께 봤는데, 예수님께서 왜 비유를 쓰셨을까”라고 물었다. “여러분들이 만약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면, 한국에만 있는 것을 미국인에게 설명할 때는 천상 비유로밖에 얘기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이것을 비유로 너희에게 일렀거니와 때가 이르면 다시는 비유로 너희에게 이르지 않고 아버지에 대한 것을 밝히 이르리라(요 16:25)”는 말씀을 제시했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말씀인데, 참 기막히고 눈물나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이 아닌, 제자들이 쓰는 ‘땅의 언어’로 그들이 모르는 얘기를 하려니 서로 너무 답답했다. 예수님은 그토록 사랑하는 제자들과 서로 통할 수 없음을 화내시지 않고, 다만 안타까워하셨다.
이어령 박사는 “성경에서 가장 슬픈 장면 중 하나로, 준비하면서 눈물이 났다”고 털어놓았다. ‘지금은 하나님을 비유로밖에 보여줄 수 없지만, 나중에는 보여줄 수 있다’, ‘나를 못 보게 되면 나를 보게 되리라’, ‘곧 떠나는데, 이제 만나게 되리라’는 기막힌 말이지만, 제자들은 또 알아듣지 못한다. 부활 후에는 새로운 관계로 만난다는 말인데, 못 알아들으니 다시 ‘아이를 낳는 고통’을 비유로 쓰신다. “내가 죽어 슬피 울고 애통해야 나를 만나는 기쁨이 생긴다”는 것.
그리고 말씀하셨다. “얘들아, 이제까지는 내 이름으로 간구해 봐야 얻은 게 없었지만, 내가 죽고 부활해서 아버지와 부자관계가 되면 내 이름으로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지만, 그때가 되면 비유로 하지 않고 진짜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겠다고 하신다.
그렇다면 ‘천상의 언어’, 하나님 말씀인 진리는 무엇인가. 한 마디면 된다. 모르면 길어진다. 비유는 길다. 진리는 “빛이 있으라” 하면 있는 것이다. 비유나 기호는 가짜이고, 그림자다. ‘달리다굼’은 영어에서도, 한글에서도, 어디서도 그대로다. 시대가 바뀌고 어떻게 해도 못 버린다. 절대 번역이 안 된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는 현장에 있던 사람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말도 어감과 상황에 따라 수백 가지가 된다. 다르다. 그래서 번역이 안 됐던 것이다. 진짜 하늘의 말이다. 그래서 언어의 감옥에 갇혀서는 안 된다.
그 사람들이 기호학과 언어학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다. ‘번역하면 안 되느니라’ 해서 못한 것이다. 아멘은 그냥 아멘이다. ‘할렐루야’는 일종의 주문 같아서 다른 말로 바꾸면 하나님이 알아들으실 수 없을 정도로 신성한 말이다. ‘호산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환영하면서 하는 말이다. ‘우리를 구해 주십시오’ 하는 애절한, 그러나 환희의 목소리로 정말 구세주가 오셨구나, 하는 뜻이다.
‘달리다굼’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살아있는 게 아니라 죽어 있었구나, 여태껏 살아있는 줄 알았는데 좀비처럼 죽어 있었는데 하는 깨달음이 온다. 이 소녀는 죽었다가 ‘소생’했지만, 우리는 ‘부활’을 원한다.
하지만 사실 우리는 극한에 가서야 하나님을 찾는다. 절대로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제 힘으로 한 줄 안다. 그런데 제 힘을 다 쏟아도, 모든 걸 다 해도 안됐을 때에야 ‘아이고 하나님’ 소리가 나온다. 하나님 만나려면 얼마나 이처럼 고생을 많이 해야 하나. 그걸 알고 교회 나올 사람이 있겠나. 인간이 원죄임을, 한계임을 알았을 때 “달리다굼” 같은 권능의 말이 나온다.
이어령 박사는 “그래서 세례를 받는데 ‘난 죽었구나’, 욥처럼 끝없는 환란이 오겠구나 하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라며 “내가 편하고 옆에 아내가 있고 귀여운 자식이 있고 통장에 잔고가 두둑한데 하나님을 왜 찾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재철 목사도 거들었다. “2000년 전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요즘 말로 하면 어머니가 ‘아가야 일어나거라’ 하고 아이를 깨우는 말이다. 매일 듣던 말이다. 아침이 와서 황홀하게 태양이 떠오르고 햇빛이 비치는 가운데, 그 소리를 듣고 눈을 부비면 그 빛 속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의 모성애적 사랑으로 이 죽은 아이에게 새로운 삶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주시고자 하니, 절대 어느 나라 말로도 번역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