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 오후 2시부터 감리교신학대학교(총장 박종천)에서 열린 2014년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 심포지엄이 '조만식과 한국의 시민사회'를 주제로 개최됐다.
이날 박명수 교수(서울신대)는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만식'을 주제로 발제하며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창설과정, 조직, 활동, 그리고 해산과정을 평양의 기독교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중심으로 소개했다.
먼저 그는 "해방이후 서울에서 건국위원회(이하 건준)의 주도권은 좌파성향의 여운형과 박헌영이 잡았으며 이것은 전국 구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며 "평양의 상황은 서울과 달랐다"고 말했다.
그는 "서울의 건준이 중도좌파 주도하에 중도우파가 가담한 조직이었다면 평양의 건준은 우파주도에 일부 좌파가 가담한 조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며 "평양의 건준은 대부분 정치적으로는 민족주의자들이었으며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항일경력이 있고 사회적으로는 책임 있는 시민생활을 감당하는 사업가들이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위원장 조만식과 부위원장 오윤선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의 위원들이 민족주의자들이었다"며 "좌익으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은 총무부장 이주연, 선전부장 한재덕, 그리고 무임소의 김광진 정도였다"고 했다.
그는 "이주연은 함남 출신으로 중학생 때 공산주의에 심취했으며, 신간회 활동에도 좌익으로 참가했다. 그후 일제와 협력해 사업을 하는 한편 만주의 독립운동가에게 자금을 대기도 했던 친일파 공산주의자였다"며 "하지만 해방 당시에 사람들은 이주연을 민족주의자로 인식하기도 했다"고 했다.
또 "한재덕은 와세다 대학시절부터 공산주의에 심취했으나 일제 말 옥고를 치루고 나서 전향하여 대화숙에 참여했다"며 "대화숙은 일제의 사상 감시단체로서 민족주의 및 공산주의를 감시하는 단체였다"고 했다.
그는 "사실 이주연도 처음에는 민족주의자로 오인할 만큼 성격이 뚜렷하지 않았고 한재덕은 더욱 입장이 모호했다. 김광진의 활동도 두드러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당시 선전부장을 지낸 한재덕의 증언을 소개했다. "20여명의 위원 중에 거의 전부가 민족진영이고, 좌익진영측 위원이라고는 이주연은 총무부장, 나는 선전부장이었다. 그나마 이 두 사람조차 좌익진영이라고 하나 기실 당시로서는 색깔이 분홍색도 채 못 되는 애매한 존재들이었다. 이주연은 처음에는 많은 인사들로부터 민족 진영 사람으로 오산했을 정도이었고, 나(한재덕)는 그보다도 좀 더 두리뭉실한 존재였다."
좌익 대 우익의 비율이 20:2 내지 3 정도였지만 "평양에서 민족주의의 세력이 컸고, 조만식의 위치가 대단했기 때문에 좌익에서 아무런 불평을 하지 못했다"고도 박 교수는 말했다.
한재덕은 이에 대해 "이와 같이 민족진영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 발족이었으나 좌익진영에서는 아무 불평이 없었다. 있을래야 있을 수 없다. 그만큼 조만식 선생의 신망은 말할 것도 없었거니와 이 지방에서 민족주의 진영의 세력이란 비교할 나위도 없을만큼 절대적으로 우세하였던 것이다"고 '김일성을 고발하다'는 책에서 증언했다.
박 교수는 "조만식은 건준이 비록 민족주의가 주도한다고 할지라도 좌익을 포함해서 범민족적인 성격을 갖기를 원했던 것 같다"며 "이같은 범민족적 입장은 조만식이 신간회 활동할 때부터 보여 왔던 태도였다"고 했다.
그는 "이것은 조만식의 평소의 원칙인 대동단결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며 "오영진에 의하면 조만식은 이주연을 매우 귀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건준의 총살림을 맡는 총무부장을 시켰지만, 그는 후에 조만식을 배반했다"고 했다.
1945년 8월 15일, 조만식 장로 "일본 지사가 타던 차를 내가 탈 수 있겠는가?"
박명수 교수는 1945년 8월 15일 해방 당일의 상황도 소개했다. 그는 "해방 당일 당시 평안남도지사 후루가와는 패전 이후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군 사령관과 이 지역의 유력자인 김동원, 최정묵, 김항복과 함께 상의했다"며 "김항복은 조만식의 제자로서 평양의 기독교인들이 세운 숭인학교 교장을 12년이나 지낸 기독교민족주의자이다"고 했다.
이어 "아마도 평남 도지사는 일본의 패망을 알고, 이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조선인들을 만났던 것 같다"며 "이들은 해방 후 혼란을 피하고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양 기독교민족주의의 대표자인 조만식과 오윤선을 초빙하는 길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했다.
이들은 8월15일 오전 10시경 조만식의 제자인 김항복과 도지사의 자동차를 보내서 조만식과 오윤선을 모셔오게 했다.
8월 15일 오후 김항복은 조만식을 찾아 자동차도 다닐 수 없는 시골인 반석면 안골에 와 "아무래도 이북에서는 고당(조만식의 호)이 주인이니 업무를 인수해 달라"는 도지사의 말을 전했다. 하지만 조만식은 "일본 지사가 타던 차를 내가 탈 수 있겠는가?"라며 김항복을 나무랬고 "나는 인수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며 돌려보냈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
김항복은 대동군으로 가서 또 다른 민족주의자 오윤선 장로를 태우고 8월 15일 저녁 9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오윤선 장로는 일제 말 총독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대동군 고평면 사천동으로 피신해있었다.
오윤선 장로는 평양의 그의 집에 모인 사람들과 하니씩 문제를 해결했고, 먼저는 치안문제를 위해 숭실전문학교의 체육 교수였던 최능진을 중심으로 학생들을 동원해 학생대를 만들어 치안을 담당하게 할 것을 논의했다. 그리고 태극기를 만들어 학교와 단체에 배포할 것과 조만식 장로를 모셔오는 것을 의논했다.
박명수 교수는 "그것은 해방된 조국에서 일본인이 아닌 조선 사람들의 민의였던 것이다. 김항복과 김동원은 조만식과 가장 가까운 친구인 오윤선의 친서를 갖고 반석으로 가도록 했다"며 또 "오윤선은 총독부 차가 아닌 민간인 차로 조만식을 모시러 보냈다"며 이것이 8월 16일 오전 11시였다고 했다.
16일 오윤선은 치안유지를 위해 평양방송국을 통해 시민들에게 냉정과 침착을 호소하기도 하며, 밤늦게까지 조만식을 기다렸으나 그는 17일 새벽 2시에 오윤선의 집에 도착했다.
오윤선의 차가 조만식이 있던 반석에 도착한 것은 16일 오후 3시경이었으나 평양의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들은 후 부인에게 저녁을 준비하게 하고, 혼자 뒷산을 거닐고 저녁 후에는 또 좁은 방으로 들어갔다가 자정이 되어서 나왔다고 박명수 교수는 말했다. 박 교수는 "아마도 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미래를 구상했을 것이다"며 "그리고 밤 늦게 차에 올라 평양에 온 것이다"고 했다.
그는 "조만식은 17일 오전부터 사태수습을 위해 노력했고 오전 11시 자신의 동료들과 모여 건국방안에 대해 상의했다"며 "그래서 내린 결론은 '평남건준은 지방정권이 아니고 정당도 아니다. 중앙정권이 확립되고 중앙정부가 수립되는 대로 모든 권리와 사무를 무조건으로 이양하고, 이양을 위한 과도기적이고, 순 민간적인 애국단체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건국준비위원회' 명칭은 받아들였지만 모임 성격은 '치안'
이어 박 교수는 "아마도 처음부터 사용하던 치안유지위원회라는 명칭과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두 개의 명칭 사이에서 논란이 있었던 것 같다"며 "조만식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그는 "'조선종전의 기록'에 의하면 처음에는 치안유지회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 같고, 아마도 이것은 일본이 원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조선 사람에게 치안을 유지해 달라고 했지 건국을 준비하라고 하지는 않았다"며 "그러나 좌파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해방 정국을 통해서 인민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이주연을 중심으로 한 좌파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을 고수했고, 여기에 대해서 민족주의 계열은 받아들인 것 같다"며 "조만식은 여운형과 좌파 계열의 입장을 고려해서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을 받아들인 것 같다. '조선종전의 기록'은 치안유지회에서 건국준비위원회라고 명칭을 바꾸었다고 지적한다"고 했다
그러나 박 교수는 "하지만 당시 조만식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사람들은 다 같이 건준은 실제로 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단지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평남 건축의 명칭은 여운형의 건준과 같지만 내용에서는 서울의 민족주의자들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서울에서는 해방 당일 이미 건국준비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송진우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은 여운형 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다"고 했다.
그는 송진우의 측근인사였던 김준연이 17일 오전 조만식은 송진우에게 전화해 했던 내용을 소개하며 "송진우는 권력이 민중으로부터 나와야 하는 것이며 당시 모임이 해야 할 일은 건국이 아니라 치안이라는 것이다. 송진우는 건국준비위원회를 만드는 것을 반대하고, 임시정부를 기다려야 한다는 입장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박 교수는 "평남 건준은 17일 위원장 조만식의 이름으로 성명을 내고 패전한 일본인에 관해 관용을 베풀 것을 강력히 요청했고, 두번째로 강조한 것은 조선인 동포끼리 서로 가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했다.
덧붙여 박 교수는 "이때는 일제시대보다 치안이 더 잘 유지됐다"며 "조만식의 비서격이었던 오영진은 그 당시에 너무 '질서', '질서' 해서 해방 이후인데 기쁨을 분출할 기회가 없이 너무 조용했다고 부정적으로 말하기도 했다"고 했다.
조만식, 소련군에 '자본주의 입각한 경제제도 채택' 주장
이어 그는 "소련군이 진주한 다음에 평남의 건준은 해산을 당하게 되었다"며 "소련은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을 인민위원회로 바꾸기 원해 결국 인민정치위원회가 되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인민위원회라는 명칭은 바로 공산정권을 받아들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건준 측은 알고 반대했다"며 "그러나 평양에서 점령군인 소련의 요구를 무작정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해서 인민정치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덧붙여 "평남의 영향을 받아 평북, 황해도 인민정치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다"며 "하지만 나중에는 북한 5도의 자치위원회 명칭은 모두 인민위원회로 통일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8월 29일 치스차코프는 조만식과 건국준비위원회를 현준혁과 평남 공산당 지부와 함께 철도호텔로 초대해 "함흥에서 사용했던 1:1의 방법, 즉 건준과 공산당을 동수로 해서 새로운 인민위원회를 구성하는데 (평남 건준이)합의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 회담에서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는 건준 측에게 "이제부터는 도의 모든 행정에 있어서 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민족진영이 "그럴 수 없다"며 즉석에서 전원 사의를 표명하자 치스차코프는 자신의 발언이 오해를 만들었다고 밝히며 "공산당과 협력하라"고 금방 내용을 수정했다.
박 교수는 "소련은 조만식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협력이 없이는 정국을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고 말했다.
이어 '정치 문제'를 담당하던 레베데프 장군과 30일 대화하며 조만식은 그에게 "기본 정치 노선은 민주주의적이어야 하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제도를 채택해야 하며, 교육을 통해 인민을 깨우쳐야 하고, 피압박민족의 한을 자주 독립국가로 풀어야 한다"고 했다고 박 교수는 말했다.
25일 거지 행색으로 평양에 들어온 소련군이 여인들을 겁탈하고 약탈을 일삼는 등 소란을 일으킨 데 대해 "소련군대가 온 목적이 무엇인가?" 라는 조만식의 질문에 레베데프 장군이 "소련 군대는 조선 해방을 위해서 왔다. 영토 확장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조선 인민이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고 말한 후에 조만식이 한 말이었다.
박명수 교수는 "해방 직후의 상황을 보면 평양에서 소련군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해방 이후 한반도 서북지방은 쉽게 좌익으로 흐르지 않았을 것이다"며 "해방 이후 북한 지역에 형성된 좌파 성향의 인민위원회가 북한 주민의 자발적인 단체였다는 주장은 재고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