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칼럼] 우리의 항해 길은 안전 한가

목회·신학
칼럼
편집부 기자
창세기 12:10-20절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모든 생물계의 한 특징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적으로 구비된 안전 태세와 본능적으로 동작되는 안전 책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 실례로 사자와 호랑이와 같은 맹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사슴 같은 짐승은 뿔이 자신을 안보하기도하며 어떤 벌레(포도벌레)는 보호색이 있어 자신을 나무 잎 새에 감추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만 아니라 창작 적으로 자신을 보호 할 수 있는 안전 책을 창안 강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있어 인간됨이 분명 하다고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살고 있을 때 심한 흉년을 당하여 부득이 애굽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원하던 안전 책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수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참된 안정은 참된 안전 책을 수립하고 그대로 살아가는데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1. 진실이 진정한 안전 책 입니다

"원 컨 데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아브라함은 애굽인을 두려워했습니다. 자기 아내 사라를 보고 탐내어 자기를 죽이고 아내를 빼앗을까 염려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허락도 받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애굽에 내려간 것도 잘못 이었고 애굽에 가서도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한 것도 실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한 것은 애굽 사람들이 하나님의 보호를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다니엘과 같은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렇게 거짓말로 속이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모든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믿음이 약해지고 시작하면 세상과 타협하게 되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가는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한 번도 없습니다. 거짓말을 하게 되고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자기 수단과 방법으로 상황을 회피해 보려고 하다가 바로와 타협하고 아내를 빼앗기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거짓은 언제나 안전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임시적으로는 안전하듯 하나 미구에 실패와 수치가 돌아오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짓과 위계로 안전 책을 삼고 나아가는 일이 너무도 많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요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상은 위조 범람 시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위조지폐, 위조 졸업증명서, 위조이력서, 위조약품, 유조입장권 허위진단서 심지어 위조신앙도 있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고도 많은 것들이 위조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파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거짓 교리로 침례교인체 위장을 했습니다. 위조품 가짜가 득세하고 활개를 치는 판입니다. 진실하면 손해요 도산 되고 만다는 인식이 팽배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세상이 다 거짓이 통하는 세상인데 고지식하게 나만 바르게 산다고 세상이 뭐 달라지나. 적당히 불의에 아부하고 타협하고 세상과 짝하고 사는 현실입니다.

거짓과 사위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죽이는 독약 이라는 만인 고지의 사실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참된 위인 참된 승리자는 다 진실을 위주로 끝까지 생활한 사람들 들이었음은 다시 말할 여지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회와 나라를 심판 하십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도 이러한 인간의 탐욕과 거짓의 총체적인 불의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2. 준법이 진정한 안전 책입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부부입니다. 이것이 법입니다. 진정한 안전 책입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한 부부입니다. 일시적으로 안전을 꾀 하려고 법대로 된 부부를 남매라 한것은 법을 어긴 위법 행위요. 불법 행위인 것입니다. 위법을 거스르고 안전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법은 곧 죄가 되는 때문입니다. (요일 3:4) 만 가지 화와 불행은 모든 위법에서 오는 것입니다.

아합왕은 법 치리자로서 위법적 방법으로서 평민 나봇을 무참하게 죽이고 불법으로 그의 소유를 강탈 하였더니 그 뒤 불법은 마침내 그에게 갚음을 주고야 말은 것입니다.

교통법을 어기니 교통사고가 생기는 것이고 해양 선원의 기본이 구명 조키가 이상이 없는가를 확인하고 정당하게 화물은 적재 되었나 확인을 하고 항해를 해야 하는데 이번 사고에서도 이런 부실이 만 천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선거법을 어기니 선거 혼란이 일어나는 것이요 세법과 은행법을 어기매 경제 파탄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가운데 사회에 부정이 생기며 부패가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생에 대하여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 내가 도무지죄를 범하지 아니하였노라"고 담대히 말 할 수 있을 만큼 법을 지켰습니다. 준법정신이 바로 서지 않고는 진정한 안전을 기대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람마다 법을 존중하며 법대로 생활 하려는 정신을 길러야 합니다. 법을 어기거나 무시하는 사회는 다른 곳 아닌 지옥이 되는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영원히 안전하고 행복 하도록 율법과 은혜의 법을 주셨습니다. '내가 이 말씀을 네 앞에 두었노니 너와 네 자손이 영원히 살기 위하여 이 명령을 지키라고 말씀 하십니다.

우리가 영원히 지켜서 복을 받고 영원히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3. 신앙이 진정한 안전입니다

아브라함의 애굽 이주는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가나안 영주를 명하셨고 그 땅에 축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 없이 자의로 이주 하고 말았습니다. 가나안에 흉년을 두려워 한 나머지 안전 책을 세운 것이 애굽 이주 이었습니다. 이 길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여 취한 일 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위적 방법으로 안전 책을 삼는 것은 잘 못된 처사인 것입니다. 얼핏 생각에 잘된 것 같았으나 결국은 실패에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믿음 없이 자의로 하는 것은 진정한 안전 책이 되지 못합니다.

지금 어려워도 주님만 의지하고 순종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마침내 안전과 행 복은 내게로 오는 것입니다.

요셉은 아무 이유 없이 형들의 질투로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습니다. 낯선 땅 이방나라로 팔려가서 당한 고독과 고생 모략과 오해 등 죽을 일 다 당하면서도 오직 하나님께 향한 신앙만은 변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결코 인위적인 방법으로 안전을 구하거나 모색하려 하지 아니 하였습니다. 무어나 그대로 죄인인 양 그는 후욕과 억울함을 그대로 참고 나아갔습니다.

안전 책이 무엇임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그의 신앙 그대로 마침내는 그에게는 안전과 행복 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인간은 한계 상황이 무 출구 지대에 이르면 방법을 찾으려고 하지만 인위적인 방법은 출구가 아닙니다. 참 출구는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의 인위적인 방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가 깨달은 후에 그의 외아들을 바친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양을 준비 하시고 자식 대신에 그 양을 바치라는 명령으로 바꾸어 졌습니다. 인위적인 방법을 찾을수록 하나님은 나에게서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그러나 뜻을 찾은 사람에게는 바로 우리 곁에 계셔서 숨겨놓았던 축복의 카드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그의 본토를 떠나야 했고 아비집을 버려야 했습니다. 그렀습니다. 희생이 없이는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는 자기희생입니다. 만일 새로운 것을 받으려고 한다면 내 손에 있는 것들을 버려야합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은 역사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역사하기 시작 하시고 거기서 하나님은 도우실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것 보다 하나님이 채워 주시는 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인간이 준비한 포도주보다 주님이 준비하신 포도주가 더 맛있고 몸에도 좋은 것입니다. 신앙을 넘어서는 안전 책은 없습니다. 혹시 손해되는 듯 하고 실패인 것처럼 보이지마는 실은 이득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름지기 인간 두뇌의 인위적 방법으로 안전 책을 삼으려는 어리석음을 걷어치우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전능하신 하니님을 의지하는 신앙이 진정한 안전 책임을 확실히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이 실패한 아브라함도 버리지 아니 하시고 연단에 연단을 가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벗이라 할 만한 신앙의 사람이 되게 하셨은즉 오늘 우리도 아브라함과 같이 너는 나의 벗이 라고 칭찬 받는데 까지 나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약속을 믿고 찾아온 신령한 의미의 가나안 이민자들입니다. 괴롭고 답답해도 애굽 같은 세상으로 내려 갈 생각은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신 다고 약속을 저 버렸다고 속단하지 맙시다. 실수하고 넘어지고 끝까지 찾아와 후하게 너그럽게 사랑해 주시는 이가 아브라함과 이삭 의 하 나님 야곱의 하나님 곧 저와 우리의 하나님 이십니다.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글ㅣ이선규 목사(금천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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