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의 로마서 읽고 회심한 웨슬리, 갈라디아서는…

서울신대 종교개혁 기념강좌 ‘웨슬리안 신학과 종교개혁’

“대륙 종교개혁의 여러 줄기와 웨슬리를 비교해 보면, 웨슬리에 대한 해석을 주도했던 대중적인 신화는 깨지게 된다. 이 과정이 웨슬리안 전통과 성결 전통 이해를 위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길 희망한다.”

종교개혁 주간을 맞아 웨슬리 전통을 이어받은 서울신학대학교(총장 유석성 박사)에서 25일 ‘웨슬리안 신학과 종교개혁’을 주제로 제494주년 종교개혁 기념강좌를 개최했다. 강사로 초청된 도날드 W. 데이튼 교수는 감리교의 창시자이자 성결교의 뿌리인 웨슬리의 신학을 마틴 루터로부터 나온 루터란 운동, 존 칼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개혁주의 운동, ‘급진적인 인물’들에 의해 시작된 재세례파 운동 등 3가지 종교개혁 중심운동과 비교했다.

 

▲25일 열린 서울신대 100주년 기념 종교개혁 기념강좌 모습. ⓒ서울신대 제공

 

데이튼 교수의 이같은 발표는 웨슬리가 신학적으로는 ‘이신칭의’를 재발견한 루터란이며, 존 칼빈으로부터 이어지는 개혁주의에는 강력한 반대자였고, ‘재세례파’로 대표되는 종교개혁 급진파와 별 관련이 없다고 보는 통념에 반론을 제기하기 위해서다. 그는 “이 문제를 탐구하는 일은 웨슬리 신학의 윤곽을 파악하는 탁월한 길”이라며 “결론적으로 웨슬리는 루터와 달랐고, 오히려 칼빈과 재세례파와는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이분법적 사고방식, 웨슬리는 통합적 사고방식

먼저 웨슬리가 루터를 따랐다는 인상은 그 유명한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 회심’, 즉 루터의 로마서 주석을 읽다 가슴이 뜨거워진 사건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데이튼 교수는 “루터와 웨슬리의 일관성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로마서 서문이 루터의 저작들 중 매우 특이한 작품이었음을 간과하고 있다”며 “로마서 주석은 독일 경건주의자들이 선호했고, 그들이 루터에서 벗어났다는 정통주의의 비판에 논쟁하기 위해 흔히 사용된 작품”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웨슬리는 루터의 핵심 저술인 갈라디아서 주석을 읽은 후 자신이 루터와 너무나 다름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고, 올더스게이트 체험에 근거해 루터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어떻게 되돌릴지 무척 고민했다고 한다. 웨슬리는 루터의 갈라디아서 주석이 ‘온통 신비주의적 색채’였다고 했는데, 더 이상의 언급이 없어 해석이 쉽지 않다. 데이튼 교수는 이에 대해 “웨슬리는 ‘율법무용론’ 관점을 언급한 것이라 생각된다”고 추측했다.

웨슬리와 루터의 차이점은 야고보서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루터는 야고보서를 ‘그야말로 지푸라기 같은 서신’이라며 그리스도에 대한 강조가 결핍된 책으로 봤지만, 웨슬리는 야고보서에서 ‘두 마음을 버리라는 권면’, ‘마귀 자신은 정통주의이지만 진정한 심령의 종교에서는 멀다는 주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호의’ 등 독특한 주제를 많이 찾아냈다. 데이튼 교수는 “루터는 ‘믿음 아니면 선행’이 대표하듯 분리적 성향이 강하지만, 웨슬리는 ‘믿음과 선행’ 등으로 둘 모두를 결합해서 생각한다는 점에서 둘의 차이점은 대조적인 사고방식에 뿌리가 있다고도 설명할 수 있다”고 풀이했다.

데이튼 교수는 그러나 웨슬리와 루터의 관계를 ‘상호간의 교정자’로 생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루터주의는 비윤리적·수동적·비규율적으로 흐를 위험이 있고, 웨슬리안은 율법주의·은혜무용론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종교개혁에는 웨슬리라는 ‘교정자’가 필요하다고 확신한다”며 “이 둘의 균형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지만, 두 운동이 서로 긴장 안에서 사는 방법이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웨슬리가 칼빈주의의 냉혹한 적이라고?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칼빈에 대해서는 “우리 대부분은 웨슬리를 ‘이중예정’, ‘하나님의 주권’과 같은 칼빈주의의 냉혹한 적으로 생각하고,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면서도 “웨슬리는 칼빈주의의 5대 강령 중 ‘무조건적 선택’, ‘제한 속죄’, ‘불가항력적 은총’, ‘성도의 견인’은 반대했지만, ‘전적 타락’의 교리를 강력하게 주장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칼빈과 웨슬리 모두는 은혜의 필연성과 하나님의 주도적 활동에 대해 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서 “다만 그 은혜의 성격과 특성이 달랐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데이튼 교수는 “웨슬리는 웨슬리안과 칼빈주의 사고의 근본적인 친밀함을 알았다”며 “그는 후에 이 친밀함의 감각으로부터 더 멀리 떠났지만, 종종 자신의 생각을 ‘칼빈주의의 가장자리’, ‘칼빈주의와 머리카락 정도의 차이’라 묘사하기도 했다”고 정리했다. 웨슬리 이후 칼빈주의에 대항했던 격렬한 웨슬리안 교조주의자들에 대해서는 “강한 교조주의자들은 신학적 차이보다는 ‘한 가족의 경쟁자’라는 표시인 경우가 종종 있다”며 “차이와 분리의 감각은 중요한 가족관계를 파괴하는 잘못된 역사로 이끌곤 한다”고 설명했다.

많은 해석가들이 웨슬리를 분석하면서 재세례파를 생각하지는 않지만, 데이튼 교수는 이것이 재세례파를 주로 유아세례 반대와 교회와 국가의 분리 측면에서만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논증했다. 그에 따르면 웨슬리는 경건주의의 과격파라 할 수 있는 고트프리드 아놀드를 좋아했고, 종종 전통적인 기독교에 반대한 성 프란시스나 예언적·은사주의적 몬타누스 같은 반항가에게 편안함을 느꼈다.

데이튼 교수는 강연을 마치면서 “대륙 종교개혁의 여러 줄기와 웨슬리의 관련에 대한 조망으로, 그의 사상에 대한 해석을 주도한 대중적인 신화는 깨지게 된다”며 “이 과정이 웨슬리안과 성결 전통의 이해를 위한 새로운 비전의 각을 제시하기를 희망하고, 루터와 칼빈, 재세례파 각각의 경우와 웨슬리는 어떤 주제는 받아들이고, 다른 것은 때로 극단적인 비평과 함께 제쳐뒀던 양면적 관계였다”고 밝혔다.

이같은 자세에 대해 데이튼 교수는 “웨슬리의 자세는 수미일관하지 않고 무작위적인 절충주의가 아니라, 교회일치에 중요하고 진지하며 포괄적인 신학적 전망”이라며 “그는 가톨릭주의 교회론, 위엄있는 개신교주의, 자유교회 전통을 함께 붙들었고, 이같은 사상은 여전히 많은 것을 우리에게 가르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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