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선(감독 이장호)>이 16일 개봉했다. 불균질했지만 역동적이던 명작과 괴작을 만들어온 이장호 감독이 한층 성숙한 작품 <시선>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4억원 현금 지원, 2억원 현물 지원으로 제작된 저예산 영화다.
이스마르(가상 국가) 리엠립 지역으로 8명의 교인이 선교 봉사에 나선다. 통역 선교사 조요한(오광록)은 해외로 선교 활동을 떠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가이드를 하며 뒤로는 커미션을 챙기기 바쁜 세속적인 사람이다.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선교 봉사를 떠난 8명의 한국인을 안내하던 요한은 선교단과 함께 갑작스레 반군에 납치당하게 된다. 반군은 그들을 인질로 잡고 국가에 우두머리 석방과 돈을 요구한다. 동시에 "세상에 신은 한 명 뿐"이라며 선교단에게 기독교를 버릴 것을 강요한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반군들에게 선택을 강요당하는 요한과 선교단은 이내 혼란에 빠지게 되고 결국 그들 사이에는 위선, 거짓, 불신, 미움만이 남는다.
영화는 신앙심 깊은 이들이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서 순교와 배교를 갈등하고 이면에 감춰졌던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치명적인 결점을 지적한다. 배교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게 되는 위급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기독교인들의 방황과 번민이 강렬하게 다가온다. 선교단 납치라는 사건을 대하는 국내 신도, 국민, 국가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노련하게 균형 감각을 조율하며 전개된다. 피랍된 선교 단원이 겪을 법한 상황을 캄보디아 올 로케이션 촬영으로 리얼하게 그려냈고, 인질과 납치범의 관계를 설정할 때도 어느 한편을 극도로 악마화하지 않았다.
시나리오는 3년여 수만 번 수정됐다. 주제를 전달하는 감독의 스타일은 촌스런 종교 영화를 답습하진 않는다.
과거 이 감독의 종교 영화인 <낮은 데로 임하소서>(1982)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이청준의 실화 소설을 원작으로 한 흥행 영화로 대중의 공감대와 맞닿아 있었다. 분명 <시선>은 <낮은 데로 임하소서>보다 원숙한 만듦새의 영화다.
영화의 백미, 캐릭터를 리얼하게 살려낸 배우들의 열연도 주목할 만하다. 주연 배우 오광록을 중심으로 故 박용식, 남동하, 김민경, 이영숙, 서은채, 홍성춘, 이승희, 이호 등은 입체감 있는 연기로 캐릭터를 살렸다. 오랜만에 주연을 맡은 오광록은 영화를 끈질기게 이끌어나가는 열연을 펼쳤다.
한편, 이 감독은 영화 '별들의 고향'(1974년)으로 감독 데뷔를 한 지 올 해로 꼭 40년이 됐다. 그가 한국 영화사에 차지하는 위치는 분명 남다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올 초 선정한 '한국 영화 톱 9'에 그의 작품이 <바보 선언>(1984년), <바람불어 좋은 날>(1980년) 등 3개나 들었다는 사실은 그의 가치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데뷔와 함께 벼락 스타 감독이 됐고 10여년 절정의 꽃을 피웠지만 그후 비바람 맞으며 20여년 지리멸렬한 시간을 보낸 주인공도 그다. 그는
그런데 무려 19년 만에 신작을 들고 빙그레 웃으며 다시 나타났으니, 이런 족적의 감독은 한국 영화계 그가 처음이지 않겠나. 오랜 공백이 믿기지 않을 만큼 편집의 완성도 면에서도 흠잡을 구석이 없다.
<시선>은 그의 지난 날들에 대한 반성과 참회, 회개를 담은 자전적 고백 영화로도 볼 수 있다. 살기 위해 배교를 한 뒤 다시 영적인 체험을 통해 순교자가 되는 요한, 강직한 성품으로 순교보다 더 숭고한 길을 택하는 목사 구민영만 영화 속에 있는 게 아니다. 권사 아내에게 수시로 폭언하는 장로도 있고, 부인은 집에 두고 애인과 함께 선교에 나선 집사도 있다.
이 감독은 기본적으로는 '순교보다 위대한 배교'를 주제화한 엔도 슈사쿠의 장편소설 <침묵>의 결말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내년 공개될 마틴 스코시즈의 동명 소설 각색 영화 <침묵>과도 비교해볼 만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