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계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과 1970년 이후로 일어난 한국 사회의 산업화 과정 속에서 세계 기독교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교인 수 증가와 물질적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50개 교회 가운데 26개의 교회가 한국에 위치하고 있고, 기독교 인구는 전 국민의 30%에 달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영향력이 날로 확대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교회 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어두운 측면들이 점차 드러나면서 기독교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했다. 최근 유명한 인기 목사가 성추문 사건에 연루 되어 있음에도 아무런 회개와 사죄 없이 버젓이 교회를 다시 개척했고, 서울의 한 대형교회 목사의 논문 표절과, 교회 이전으로 수백억에 달하는 공사비를 지출한다는 소식은 기독교인 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사회의 각 영역에서 지도자적 역할을 감당하는 기독교인들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의미를 잃어버리고, 도리어 기독교 교회 공동체를 사회적 성공과 인맥을 형성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제 기독교는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아니라,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 '개독교' 로 불리고 있고, 인터넷에는 수많은 '안티 기독교' 카페가 생겨날 만큼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왜 이렇게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버렸는가? 필자가 보기에 이는 전적으로 한국 교회가 '십자가'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밤을 환하게 비추는 수많은 교회의 십자가 불빛과는 반대로 한국 신학계와 교계에는 십자가가 없다.
한국 교회 강단의 말씀 선포는 영광과 축복을 선포하는 말로 가득 차 있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긍정의 힘', '자기 확신'을 강조한다. 은연중에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지위가 하나님의 축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오직 믿음만으로'(Sola fide)라는 교리는 인간의 내면에서 생겨나는 '자기 확신'과 '자기 신뢰'라는 말로 왜곡되었다. 그 어디에도 '십자가의 말씀 선포' 를 찾아볼 수 없다. 목회자들은 이 '십자가 말씀' 선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교인들이 듣기를 꺼려하고 교회를 떠나갈까 봐 두려워한다. 그저 교인들이 듣기 좋은 선포로 교인들을 만족시켜 주려 한다.
신학 연구에서도 '십자가'는 이미 오래된 유물처럼 생각한다. 최근의 신학적 연구들은 우리 인간 자신에 대한 문제들보다, 사회 정치적인 이슈들에 매달린다. 신학이 이 사회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개혁의 목소리를 내기보다, 그저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흐름에 따라 이리저리로 흔들린다. 그저 이 사회와 교인들의 입맛에 맞는 신학을 추구한다. '선포와 설교를 위한 신학', '교회에 봉사하기 위한 신학' 이라는 명제는 '교회와 사회의 관심과 후원을 더 받기 위한 신학' 으로 왜곡되었다. 이러한 신학적 분위기 속에서 중요한 신학적 의미들이 왜곡되어간다.
죄'(sin)는 더 이상 인간의 영과 육이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어 고통과 죽음 가운데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저 심리학적 용어를 빌려 '내적 상처'일 뿐이다. 인간의 영과 육을 구원하기 위한 '십자가의 구원하는 능력'은 사라지고, 구원의 의미가 그저 '상처의 치유'라는 심리학적 개념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 때문에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십자가 앞에 철저하게 엎드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을 소망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내적 긍정의 힘', '자기 확신'을 통해 위로 받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고자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라, 상처를 위로해줄 심리적 치료가 필요하다.
이러한 현상은 중세 말기 유럽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 중세에 교회의 사회 정치적 영향력은 이전에 전례가 없을 만큼 최절정에 도달한 시기였다. 교황과 사제들, 신학자들이 오랫동안 교회 내에서 지녔던 영적 권위가 사회 정치적 영역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중세기에 걸친 교회의 정치적 성공과 더불어 어두운 그림자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평신도들뿐 아니라 성직자들조차도 교회를 하나의 재판과 재정과 행정, 그리고 외교를 위한 하나의 거대한 법률기구로 인식하는 사람이 늘어만 갔다.
성직자들은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에 관심하기 보다는. 세속적인 문제들에 더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성직이 사회적 성공으로 여겨지면서, 돈으로 성직을 사고파는 일이 빈번해졌다. 더구나 로마 교황청은 이러한 문제에 관심하기보다, 더 큰 성전과 교회를 짓기 위해 소위 '면죄부'를 팔기에 이르렀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로마 교황청의 타락과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도리어 그것을 조장하는 글과 연구를 진행했다. 신학자들은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 안에 있는 것'(quod in se est)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다.
중세 말엽에 교회는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사회적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이 시기는 그 어느 때 보다도 개혁과 갱신의 목소리와 요구가 교회 내부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팽배해 있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는 이러한 중세 말엽의 교회 모습을 개혁하고자 원했다. 그리고 루터는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교회를 개혁할 것인가에 대해 오랜 기간 고뇌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답이 '십자가 신학'(Theology of the Cross)에 있음을 깨닫는다. 바울을 따라, 루터는 언제나 그의 신학의 핵심은 '십자가 신학'이라고 강조한다: '오직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다'.(CRUX SOLA EST NOSTRA THEOLOGIA) (WA 5.176.32-3)
그렇다면 이 '십자가 신학'의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이천년 전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수난' 이야기의 반복인가? 그것은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신학의 또 다른 부분인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교회가 서고 넘어지는 조항'이다. '십자가 신학'은 교회와 신학이 타락하고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 모를 때, 언제나 올바른 개혁의 방향과 힘을 제시해왔다.
'십자가'는 언제나 인간이 죄된 존재임을 끊임없이 드러낸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비난하는 죄가 인간 안에 있음을 계시한다. 만일 십자가가 인간의 죄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십자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겠는가? 십자가는 그 자체로 죄와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이고 비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 신학'은 '공격하는(offensive) 신학'이다.
십자가는 죄인들이 경건한 얼굴 뒤에 자신들의 악한 행위를 감추는 방식을 끊임없이 드러내고자 한다. 우리의 죄된 모습은 십자가와 함께 죽어야 한다. 십자가와 함께 우리 옛 사람이 죽지 않으면 우리에게 부활은 없다. 십자가의 말씀은 먼저 죽게 하고 살리게 만든다. 이 십자가의 말씀은 우리가 십자가를 그저 수수방관한 채 제 3자의 이야기처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게 만든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듯이 우리 또한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 십자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이것이 루터가 말하는 '십자가만이 우리의 신학'이라는 말의 참된 의미이다. 예수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죽음을 본다. 그리고 우리가 전적으로 악한 죄인임을 고백하게 된다.
우리는 병든 환자와 같아서 우리 안에는 그 어떤 치료제도 없음을 고백한다. 치료는 전적으로 우리 밖으로부터 온다. 그것은 '부활'의 희망이다. 십자가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부활을 동반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새사람이 된다. 이 십자가 말씀을 단지 '상처'와 '치유'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죽음 가운데 있었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했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격인가? 그러므로 부활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 이 진실을 듣고 고백해야만 한다.
루터는 하이델베르크 논제 21에서 십자가의 신학자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한다"고 진술한다. 이는 현대적인 용어로 십자가의 신학자는 "솔직하게 말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이제 이 '십자가의 말씀' 앞에서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제 이 십자가의 말씀을 선포해야만 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말씀이 올바로 선포되고 들려질 때,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될 수 있다. 신학자들은 더 이상 '영광의 신학'이 아닌 '십자가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이 십자가의 말씀이 신학 연구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나는 죄인이다'라는 사실을 고백해야만 한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셔서 죄가 없다고 선포할 때까지 '나는 죄인이다'라는 말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이 신학 연구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성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누가복음 18장 10절에 보면바리세인과 세리의 기도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세인의 행위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위를 자랑스럽게 보고하고 당당하게 구원을 요구하는 바리세인의 태도를 비난하시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세리는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그저 자신이 죄인이라는 말 밖에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에게 자랑할 것이 없다.
오늘날 한국교회와 신학은 바리세인과 같은 기독교인들을 원한다.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무언가 가시적인 행위를 할 것을 강조한다. 교회와 신학은 그러한 행위들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길임을 가르친다. 세상에서 세리와 같은 기도는 기독교인들을 비관주의자로, 또는 염세주의자로 만들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한국 교회와 신학이 우선적으로 선포하고 가르쳐야 하는 일이 세리와 같은 기도가 아닐까? 우리의 행위와 공로를 하나님께 자랑하고 구원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만이 참된 기독교인의 길임을 강조해야 할지 않을까?
지금 그 어느 때 보다도 교회와 신학의 개혁을 부르짖는 목소리가 팽배해있다. 그러나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그 기준은 무엇인가? 답은 분명하다. 다시 한 번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의 신학이 우리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의 말씀이 우리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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