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는가?

목회·신학
목회
편집부 기자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갈라디아서 6:11~18
2013~2014 송구영신예배에서 설교를 전하고 있는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   ©채경도 기자

오늘 본문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끝맺는 부분입니다. 그는 먼저 쓰기를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본문 11절) 합니다. 바울은 편지를 보낼 때 종종 자기가 구술하는 것을 가까운 다른 사람이 받아쓰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끝내려 할 때 마지막 부분만을 직접 친필로 쓰곤 했습니다. 이때 글자체가 달라지고 대필한 부분보다 글씨가 커지곤 한 것입니다.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한 것은 자기 손으로 쓴 부분뿐 아니라 편지 전체가 자기 자신의 편지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기 위해 직접 쓴 부분에서 다시 한 번 편지 전체의 주된 주제를 상기시킵니다. 할례 문제는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다룬 주된 주제의 하나입니다. 그가 갈라디아 지방을 떠난 후 그곳 교회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그와의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 자들이 강조한 것의 하나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먼저 유대교인이 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직접 겨냥하며 직격탄을 날립니다. 본문 12-13절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여기서 사도 바울이 자기를 비방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요점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들은 할례를 받은 자들이지만 할례 받은 이들답게 율법을 지키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그들이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려 한 것은 자랑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이렇게 많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했다"고 공을 내세우며 자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그런 자랑을 특히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셋째는 그들이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할례 받기를 강요한 이유는 그들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한 구원의 복음을 믿고 전하는 것 때문에 오는 박해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당시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곧 유대교로부터 박해를 부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기는 하면서도 유대교로부터의 박해를 피해보고자 이방의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할례를 받게 하고 예루살렘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우리가 이렇게 율법을 준수하고 할례를 지키게 하는 데 열심 있는 자라"고 알림으로써 그들로부터 박해를 받지 않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비방자들이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이 받는 할례를 자기들의 자랑거리로 삼고자 한 데 반해 바울은 자기에게는 다른 자랑, 오직 한 가지 자랑이 있을 뿐임을 선언합니다. 본문 14절을 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나 사도 바울 당시나 십자가는 전혀 자랑거리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에게 주어지는 십자가의 처형은 그 누구에게도 결코 자랑이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를 고귀한 것, 아름다운 것, 거룩한 것,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꾸어 놓은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에 십자가는 패배와 수치와 죽음의 십자가에서 승리와 자랑과 구원의 십자가가 된 것입니다.

아름답고 고귀하게 꾸밀 이유가 하나도 없었던 섬뜩하고 흉물스러운 십자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때문에 그 이후로 오늘날까지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황금과 보석 등 온갖 귀한 물질로 장식되게 된 것입니다. 무시무시한 형틀인 십자가가 많은 미술가들의 예술작품의 주제가 되었고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즐겨 목에 걸고 다니는 장신구가 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죄의 용서와 구원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무조건적인 은혜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고귀한 자기희생의 실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의한 화해와 평화의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그 모든 것을 상징하는 십자가이기에 전 세계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장신구가 된 것입니다.

반면에 기독교를 적대시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증오하는 자들에게서는 십자가는 반감을 일으키며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멸시와 차별과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거나 몸에 지니고 있는 것은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적대적인 세상에서 몸에 십자가를 지닌다는 것은 용기와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그 세상에 대하여 죽기를 다짐하지 않으면 할 수 없을 일입니다. 외적으로뿐 아니라 내적으로도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지 않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과의 결별을 결단하지 않고는 결코 십자가를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육적인 삶의 의미, 목표, 기쁨, 방식 등은 다 세상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어야 십자가를 목에 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뜻으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한 말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죄의 용서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얻었기 때문에, 그래서 새롭고 참된 삶의 의미와 목표와 기쁨과 방식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그만 따라가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하는 말씀의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할례를 받았거나 안 받았거나 하는 것은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았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을 들어봅니다. 본문 15절입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새로 지으심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나라 백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새로운 삶의 목표를 얻어 새로운 삶의 기쁨을 누리며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의 말을 따르자면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령의 열매를 맺으며 사는 것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신자들에게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을 권면하며 그렇게 사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평강과 긍휼을 베푸시기를 빕니다. 본문 16절을 봅니다: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사실상 갈라디아 교회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마친 사도 바울은 끝으로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여기서 "흔적"이란 옛 사회에서 노예의 신분을 표시하기 위해서 지워지지 않게 그 몸에 남겨두는 상처를 말합니다. 흔히 시뻘겋게 달군 쇠로 살을 지져서 표지를 남기곤 했습니다. 또 어떤 종교에서는 그 종교가 섬기는 신이나 그 의식에 대한 충성과 헌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문신을 새기기도 했습니다. 그런 것도 여기서 말하는 흔적에 해당합니다. 갈라디아 지방에서의 바울의 적대자들은 몸에 행해진 할례를 자기들의 흔적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이에 반해 바울은 자기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몸에 있는 예수의 흔적이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의 회심 이후에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바친 그의 복음전도사역의 삶을 사는 동안 실제로 수많은 흔적을 그의 몸에 지니게 되었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고 사람들이 죽은 줄로 알 정도로 돌로 맞아 쓰러지기도 했으며 뱀에 물리기도 했습니다. 그의 몸에 상처가 남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들이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 삶의 흔적들 곧 "예수의 흔적"일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삶의 의미이고 목표이며 기쁨이고 방식이었던 바울의 삶의 증거로 그의 몸에 남은 흔적입니다. 바울의 몸에 그런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삶의 자세와 같은 예수의 흔적을 우리는 지니고 있는가?" 우리 각자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이번 사순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경찬송가를 손에 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무리 봐도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되지 않아." 하는 말을 듣고 있는 나는 아닌지, 그 누가 보기에도 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확실한 흔적이 나에게 있는지, 마귀가 감히 빼앗아갈 엄두를 낼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고한 흔적을 내가 지니고 있는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사는 삶의 흔적이 내게 뚜렷이 새겨져 있는지를 돌아보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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