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잃어도, 내 안에 있는 감성 만큼은 걷어가지 말아달라고 기도했다"

신미식 사진 작가, 필름포럼서 '이미지에 나타난 삶의 숭고함' 주제로 강좌
1일 신미식 사진 작가가 필름포럼에서 '이미지에 나타난 삶의 숭고함'이라는 주제로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박성민 기자

"좋은 사진의 첫 번째 조건은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과의 교감이다."

2014년 문화선교연구원 봄 아카데미(주제 : 삶으로 그리는 거룩함의 신비) 첫 번째 강좌로 신미식(53) 사진 작가의 '이미지에 나타난 삶의 숭고함'이 1일 저녁 필름포럼 2관에서 진행됐다.

2시간 여 동안 진행된 이날 강좌에서 신 작가는 지나온 세월에서 겪었던 무수히 많은 일들과 사진에 대한 그의 사랑과 성찰,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그의 애틋한 심정을 전했다.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신 작가는 보통 교회나 기독교와 관련된 곳에서는 강의를 잘 하지 않는 편이라고 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너무 부끄럽고 예수님 처럼 사는 건 너무 불가능하기 때문에. 80살이 되면 모르겠는데, 그런 강의는 잘 못하겠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가 강의를 하게 된 것은 이날의 특강 까지 세 번째라고 한다. "다른 때 보다 많이 떨리고 설레였다"고 했다.

신 작가는 그가 느끼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저를 작고 위축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늘 설레이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라며 "네가 뭘 하든, 어디를 가든 나와 함께 하고 계시다는 느낌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첫 번째 책 제목은 '머문 자리'인데, 이같은 제목이 정해진 이유는 그가 스위스 여행을 했을 때 너무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한 달 정도 혼자 여행을 하며 "왜 이렇게 외로워야 하나요"라고 불평을 하고 있었는데, 그 때 들었던 느낌이 그 분이 늘 옆에 계시다는 것이었다고 그는 전했다. "늘 네 곁에 있는데 왜 외롭다고 하니"라는 깨달음이 그에게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와 이 책을 낸 것이었다. 이 책은 작은 책이었는데 한 달 동안 기독교 베스트 셀러가 됐다.

그는 사진을 시작하기 전 첫 번째 꿈이 세 권의 책을 내는 거였고 교보문고에서 사인회를 한번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교보문고에서 한 사진 작가가 사인회를 하는 것을 보고 큰 동경을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는 교보문고에서 이런 사인회를 세 번이나 했다. 교보문고로 부터 그 년도에 최고로 많은 사람들이 왔었다는 말을 들었다. 이름도 별로 없고 책을 낸지도 얼마 안 되었기에 교보문고 측에서는 놀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었다.

신 작가의 간증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과거 '경배와 찬양'에서 일 년 동안 스텝을 했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선교사님이 말썽 피우지 말고 일 년 있다가 나가라는 말을 하셨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났는데 내가 흙탕물인 줄 알았는데, 흙탕물이 가라 앉더라. 난 마치 미꾸라지가 물 흐리 듯, 그런 사람이었다. 헛 돌며 살았는데, 일 년이 지나고 나니 흙탕물이 가라 앉더라"라며 "돌아 나올 때는 직원들이 내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고 말했다. 일 년을 쉬지 않고 하루에 세 시간 씩 기도하니 광채가 안 날 수가 없었겠죠"라고 돌아봤다.

원래 그의 전공은 디자이너다. '빛과 소금', '생명의 삶'에서 디자이너를 했고 그 이후 신문사, 잡지사에서 디자인을 했다. 신입 초에는 광고 대행사에서 일했다. 그는 13 남매 중 막내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43세에 낳았다.

신 작가는 가족 얘기를 전했다. 그는 현재까지 125개 나라를 넘게 다녔지만 집에 얘기하고 간 것은 두 번 뿐이었다고 한다. 신 작가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번은 NGO 단체를 통해 아프가니스탄을 가려고 준비한 일이 있었다. 그의 막내 형에게 얘기를 했더니, "남들 가기 힘든데 가서 너무 좋겠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위험하니 가지 말라라고 한 것이 아니라 식구들이 다들 그를 부러워 했었다고. 당시 상황은 통역사 김선일 씨가 이라크에서 납치·살해되기 바로 전이었다. 그러나 결국 사건 때문에 가지 못하게 된다.

이후 일 년 후 아이티에 가자는 연락을 받게 됐다. 그러나 당시 아이티에 콜레라가 돌아 한 달에 3500명이 죽은 상황이었다. 또 그는 형에게 전화를 했더니, "너는 남이 가지 못하는 곳만 가냐. 너무 좋겠다"는 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신 작가는 "제가 사진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첫 번째 조건을 얘기할 때 하나가 집안의 무관심"이라고 재미를 가미해 말했다.

어머니에 대한 애틋하고 가슴 저린 사랑 얘기도 전해졌다. 신 작가의 어머니는 그에게 가장 관대했지만 딱 하나 관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고 했다. 그건 '신앙'이었다. 그가 어릴 때 부터 교회에 가지 않으면 그건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때 그는 그것이 그렇게도 싫었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의 신앙에 대해 전했다. "13 남매의 가족이 시골에서 얼마나 가난했겠어요. 그런데 꼭 토요일 저녁이 되면 옛날에는 10원 짜리도 지폐였는데, 그것을 분무기로 물 뿌려 다리미질을 하셨다. 또 집에 먹을 것도 없는데 꼭 쌀을 교회에 가지고 가셨다. 그 많은 식구들이 있는데 닭을 반을 목사님께 가져다 드리신 그런 분이셨다"고 했다. 그가 신앙이 가장 힘들었던 때는 어머니가 아플 때 마다였다고 했다. "저런 분이 왜 아프지? 한 번도 걸러 본 적이 없는 새벽 기도, 정말 최고의 열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신 분인데 왜 매일 아플까?"라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신 작가는 "이런 어머니가 저에게 줬던 것이 있다. 제가 찍은 사진들"이라며 "제가 찍은 그 많은 사진에는 나의 어머니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12년 동안을 신용 불량자로 살았다. 그의 나이 50세가 되어 가면서 끝날 수 있었다. 어느 날은 걷다 보면 눈물이 뚝 떨어졌다. 경찰만 지나가면 피했고, 검문을 많이 하는 공항은 가지 못했다. 또 주민 등록을 5년 동안을 말소를 시키고 살았다. 신 작가는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나에게 그렇게 힘들게 하셨을까 생각하게 된다. 만약 크리스천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 땅에 아마 없었을 것 같다. 너무 힘들었으니까"라면서 "서울 대학교 병원에 콩팥을 팔아 빚을 갚으려고 두 번 갔었다. 근데, 그 때 마다 어머니의 기도가 들렸다. 돌아가셨지만, 나를 불쌍히 바라보는 어머니의 기도가 들려서 차마 그렇게 못했다"고 말했다.

그 때 마다 그에게 가장 위로가 됐던 것은 성경의 '욥기'였다. "하나나님은 감당할 시험 밖에 주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신 작가는 "축복이라는 건 생각하지 않았고 단지, 감당할 시험이라는 말이 늘 위로가 됐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왜 오랜 시간 그 길을 걷게 하셨나에 대해 '교만'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딱 교만하지 않을 만큼만 저를 거기에 두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시간들을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내가 이 길을 온 것에 대해,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라는 것에 대해 확신이 있었다. 이 한 길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고 했다.

그가 어떻게 해외를 그렇게 많이 다닐 수 있는지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신 작가는 인력 시장에서 인부로 일을 해 비행기 표를 샀다고 한다. 그는 "보름 동안 일을 해 비행기 표를 사면 갔다 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내가 카메라를 들고 길을 걷는 그 순간 만큼은 세상의 그 어떤 것 보다 멋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나님께 항상 기도했던 것은 단 하나였다. 내가 카메라를 잃어버리고 돈이 없어도 다 좋은데, 내 안에 있는 감성 만큼은 걷어 가지 말라고 했다."

그가 절대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있다. 사진 수업인데, 기쁨이 있어서가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 하는 그 일을 "굶어 죽더라도 안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너무 사랑하는 사진으로 지식을 팔아 돈을 버는 건 너무나 창피한 일이다. 마지막 갖고 있는 자존심이다. 65세가 되면 그 때는 돈 안 받고 사진 수업을 할 것 같다"고 했다.

신 작가는 아프라카에 대한 큰 사랑을 전하기도 했다. 8년 전 그는 마다가스카르 항공사의 권유로 마다가스카르에 가게 된다. 메모를 하지 않는 습관이 있는 그이지만, 시내로 들어가는 20분 정도의 거리에서 그는 노트를 꺼내 한 줄의 글을 쓰게 된다. "내가 44년을 한국에서 살았는데, 나머지 삶을 살아야 된다면 여기일 수도 있겠구나"라고.

그는 열흘 동안을 있다가 왔는데 하루도 이 생각이 떠나지 않았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 일주일 후 신 작가는 항공사에 마다가스카르에 다시 가고 싶다는 말을 하게 된다. 그래서 보름만에 혼자 다시 떠나게 된다. 신 작가는 "거기서 느꼈던 것 같다. 하나님이 왜 나에게 오랜 시간 나를 가난 속에 두었을까. 그게 교만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고백했다.

신 작가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라는 것을 많이 만들어 냈다. 바오밥 나무를 처음으로 선보인 작가는 그였다. 그 전에는 한 장의 사진도 없었지만, 지금은 차고 넘친다. 또 그는 대한민국 최초 여행 사진 작가다. 그는 무지개가 보이는 바오밥 나무를 찍게 된 과정을 설명하며 "무지개가 있는 바오밥 나무는 한국에서 만날 수 없다. 그 사진은 제가 찍은 것이 아니라 그 곳에 있는 아이들과의 교감으로 나온 것"이라며 "그 때 전 다른 곳을 보고 있었는데 한 아이가 내게 오더니 저것을 찍으라고 알려준 것이다. 좋은 사진의 첫 번째 조건은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과의 교감"이라고 했다.

한 달 동안 여행을 하고 돌아와 '마다가스카르 이야기'라는 책을 내고 마다가스카르 전시회를 열었다. "너무 잘 팔린다"는 큐리에이터의 말을 듣고 그는 액자 값이 없어 카메라는 팔아 버린다. 그러나 전시회 한 달 동안 한 점의 그림도 팔리지가 않았다. 그 바람에 그는 일 년 동안 카메라 없이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희안한 일이 생기게 된다. 신 작가는 "카메라가 없으니, 그 때 부터 내가 뭘 찍고 싶은지 알게 되더라"라고 당시 심정을 설명했다. "카메라가 없으니까 일 년 동안 지나가는 곳 마다 아름다운 예술이었다. 찍지 않은 게 아니라 내 안에, 가슴에 다 박아 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독자들을 통한 경험과 그로 인해 고마웠던 일들에 대해 전하기도 했다. 생활고에 너무 힘이 들어 "그만두자"라고 생각하고 집에 왔는데 교도소에서 편지 한 통이 그에게 와 있었다. 어떤 제소자가 그의 책을 선물 받고 읽고서 "열심히 살겠다"는 말과 함께 편지를 보냈던 것이었다. "이렇게 열심히 살겠다고 고백할 수 있게 하는 책은 흔치 않아요. 포기하지 말라"라는 글도 있었다. 이틀 후 영등포 구치소에서 한 여성으로 부터 사진을 하고 싶다는 편지를 또 받았다.

또 한번은 아들을 익사 사고로 잃고 그의 책을 읽은 후 위로를 받게 되었던 교회 사모님이 그를 꼭 만나고 싶다고 찾아 오기도, 그 다음 주에는 수술을 받으며 병원에 있으며 그에 대한 인터뷰를 봤던 환자가 "포기하지 말라"는 말과 더불어 500만원을 가지고 온 일도 있었다.

신 작가는 이같은 경험에 대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어떤 작가가 독자들에게 이런 피드백을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마움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런, 저런 사연들이 제가 포기할 때 보내 왔다. 사실은 그래서 포기를 못한 부분도 있다"며 "왜 자꾸 이런 사람들이 나에게 올까. 내가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데, 왜 사람들이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내 올까 생각했다"고 했다.

신 작가는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내가 꿈 꿔 왔던, 기도했던 많은 것들이 더 많게 이뤄지면서 살아왔던 것 같다"고 고백했다. 이어 그는 "내가 가진 것을 생각하면 많이 행복한 것 같다. 근데, 남이 가진 것을 바라보면 불행하다"면서 "선택은 결국 우리들, 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더욱 더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신 작가는 마다가스카르에 5개의 도서관을 만드는 게 꿈이다. 3년 전 처음으로 한 개를 만들었다. 이 외에도 우간다 여행에서 한 선교사를 통해 아프리카 아이들이 신발을 신으면 사망률이 25%가 줄어든다는 말을 듣고 신발을 보내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이날 에디오피아 아이들에게 신발을 나눠주는 영상을 볼 수 있었다.

그는 또 1500명의 가족에게 가족 사진을 찍어 주기도 했다. "가족 액자 사진을 한 이유를 나중에 알았다. 내가 없다. 우리 집이 워낙 찢어지게 가난해서 가족 사진이 하나도 없다"며 "제 꿈은 가족 사진을 몇 만장이 됐든 찍는 것이다. 아프리카에 가서 하는 일 중 하나이며 너무 소중한 일"이라고 말했다.

신 작가는 5월 23일에 두 번째 도서관을 위해 다시 떠난다.

한편, 문화선교원구원의 봄 아카데미는 앞으로 세 차례 더 진행된다. 8일에는 '여행으로 만나는 인생의 본질'이라는 주제로 임영신 공정여행가가 강의를 진행하고 15일에는 김기현 목사(로고스서원 대표)가 '책 읽기와 글 쓰기의 영성적 삶'이라는 주제로, 마지막으로 22일에는 정혜레나 조각가가 '십자가 조각의 거룩성'이라는 주제로 강의한다.

#신미식 #필름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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