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강의-기독교 세계관] 총체적인 진리로서의 기독교 세계관

오피니언·칼럼
편집부 기자
서충원 목사(샬롬누리영광교회 담임, 샬롬나비 사무총장)
서충원 목사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이 더 이상 권위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불교나 가톨릭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방향을 인도해주고 세계에 대한 견고한 사고체계를 세워준다고 여겨지는 반면, 개신교 신앙은 하나의 주관적인 개인적인 종교적 체험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개신교 신앙은 타종교에 비해서 종교적인 열정은 강하나 이성적이지 못하며, 삶에 대한 총체적인 관점 즉 세계관을 주지 못함으로 공적인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본다.

왜 기독교는 공적인 영역에서 권위를 상실했는가? 이는 종교개혁의 전통에 선 개신교가 중세 가톨릭에 대한 변증의 과정에서, 그리고 서구역사의 세속화의 흐름에 대한 변증으로 인해서, 점차 그 신앙이 이성적인 사고와 대립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이런 서구 기독교의 흐름에 속해 있다. 그래서 세상의 희망이 되어야 할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 비지성적인 집단으로 비춰지고 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위기가 있다.

중세는 계시가 이성 위에 군림하면서 이성과 계시의 종합이 이뤄졌다면, 종교개혁은 중세의 계시와 이성의 종합을 깨뜨렸는데, 그 방향은 이성적인 사고로 오염된 계시적인 신앙을 순수하게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바울의 이신칭의론을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이성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없고 오직 믿음으로만, 이성적인 이해를 넘어서는 계시적인 진리에 도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오직 믿음으로'의 의미는 구원의 진리에 이르는데 있어서 이성은 무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이 계시에 이르는 전제 내지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확립된 중세 스콜라 신학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다.

이제 기독교신앙은 적어도 계시적인 진리에 도달함에 있어서 이성과 관계없이 신앙에만 의존하게 되었다. 물론 칼빈과 같은 개혁파 신학자들은 창조의 영역에서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강조하여, 신앙을 이성과 분리시키는 것에 대해서 경계했지만, 중세의 기독교 세계에서 경험했던 이성과 신앙의 종합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받는 개신교는, 자유주의적 입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성과 신앙의 대립적인 관점을 유지하였고, 기독교 신앙이 현실적인 세계에 대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지에 대해서 깊이 숙고하지 않았다. 더구나, 점점 더 세속화되는 세계에 대항하여 오직 믿음을 내세우면서, 교회는 이성적인 세계 이해를 비판하고 자신의 신앙적인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였고, 이로써 세상과 더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개신교 신앙은 구원의 진리로서는 성경진리를 보존하고 있지만, 실제의 삶의 영역에서는 점점 이성적인 세계와의 관련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런 경향이 기독교를 세계의 흐름에서 소외되게 만들었고,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 태동된 배경이다.

현대 기독교 세계관을 열어놓은 아브라함 카이퍼는 기독교 신앙을 단지 개인적인 경건의 경험을 넘어서는 삶의 총체적인 체계로서, 즉 삶의 전 영역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으로 이해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세속적인 이성을 배격하지만, 신앙이 이성과 배치된 것이 되어 실제의 세계내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이것은 성경진리의 심각한 축소라 보았다.

신앙은 구원의 진리만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삶의 영역에 대한 바른 인식의 체계이어야 한다. 기독교 세계관은 전통적인 신앙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요청이다. 기독교 신앙은 철저히 성경계시의 전제에 서 있으면서도 비신자들보다 더 세계에 대해 합리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제 개인 경건을 넘어서 세계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에 이르러 오늘의 시대적인 과제들에 적합한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의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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