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아버지! 거룩한 주일, 허탄한 내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이 허무함을 아시나이다. 말씀으로 찾아오는 영의 생각에 붙들리게 하소서. 거룩한 날 되게 하소서. 아멘"
구약학자 궁켈은 시편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나누었다.
찬양시(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찬양함), 공동체 탄식시, 왕조시(왕들에 대한 시), 개인탄식시(탄원과 탄식, 그리고 신뢰), 개인감사시(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찬양함)등이다.
시편 94편은 공동체 탄식시중의 하나이다.
공동체 탄식시는 이는 국가라는 공동체 위해 떨어진 재앙을 탄식하고 슬퍼하는 것이다.
이 시들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 대적자들에 대한 탄원, 구원을 행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구성된다.
공동체 탄식시들은 주로 BC 586년, 예루살렘 멸망과 이로 인한 하나님 백성들의 고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바벨론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 금식의 날을 정해, 그들이 당했던 재앙을 추모하였다.
공동체 탄식시들은 주로 그 날에 고백된 시편이다.
바벨론이 유다를 멸망시키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짓밟은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경건한 무리들은 그 심판을 기꺼이 받아들인다(12절). 오히려 심판이 복되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은 대적자(바벨론)들을 하나님이 복수해주기를 구하고 있다.
심판 중에 있는 주의 백성들이 부르는 하나님은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다(1절).
하나님은 자신들뿐 아니라 세계를 심판하시는 주님이시다(2절).
그리고 그 하나님께 탄원한다.
"교만한 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주소서. 여호와여, 악인들이 언제까지 흥에 겨워 날뛰도록 내버려두실 것입니까?"(2-3절)
하나님의 백성은 징벌 받아 고통을 당하는데, 그들을 괴롭힌 악인들은 흥에 겨워 날뛰고 있다.
그들은 교만한 말, 자랑하는 말을 함부로 내뱉고 다니며, 떠벌리고 다닌다(4절).
도대체 고통당하는 주의 백성들 앞에서 혀가 제어되지 않는 인간들이다.
그들은 주의 백성들을 짓누르고 주의 민족들을 괴롭힌다(5절).
의지할 곳 없는 과부와 고아들, 외로운 나그네를 소외시키고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6절).
그러면서 하나님까지 모독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여호와가 보지 못하며 야곱의 하나님이 알아차리지 못하리라"(7절).
시인은 교만한 자들, 하나님 앞에서도 안하 무인하는 자들을 고발한다.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언제나 깨닫겠느냐!"(8절).
귀를 지으신 하나님이 저들의 교만한 말, 떠벌리는 말을 듣지 않으시랴!
눈을 만드신 하나님이 저들의 악행을 똑똑히 보지 않으시랴!(9절).
하나님의 백성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어찌 교만한 저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겠는가!(10절).
시편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명백히 선포한다.
특히 시편 73-83편까지 "아삽의 시"로 불리는 시편들은 심판의 시편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하여(시 50; 77; 78; 80; 81), 예루살렘에 대하여(시 74; 79), 열방에 대하여(시 75; 78; 83), 사악한 개인에 대하여(시 73), 혹은 신들에 대하여(시 82).
하나님은 자기 백성뿐 아니라, 모든 민족, 개인, 신들에게까지 심판하신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생각할 때 두려워하며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심판의 날은 진노의 날이며 재앙을 당하는 날이며 끔찍한 날이다.
그래서 심판에 대한 시편들은 많은 신자들에게 닫혀진 책이 되고 말았다.
특히 일부 한글성경에서는 "심판"이라는 말을 "판단"이라는 말로 순화시켜버림으로써 심판의 진리를 희석시키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치명적인 오류이다.
영국의 기독교 사상가인 루이스(C.S. Lewis)는 시편기자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를 보고 크게 놀랐다고 고백한다(씨에스루이스의 시편사색).
시편에서 심판의 날은 온 우주가 기뻐하는 날이다.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시 96:11, 13).
하나님은 심판으로 나라들을 다스리며 온 백성은 심판을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온 백성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 주는 민족들을 공평히 심판하시며 땅위의 나라들을 다스릴 것임이니이다"(시 67:4).
하나님의 심판은 불의한 세상과 개인에게 공의를 실현하며, 시온의 딸들은 그로 인해 즐거워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과 같이 찬송도 땅 끝까지 미쳤으며 주의 오른손에는 정의가 충만하였나이다. 주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시온 산은 기뻐하고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시 48:10-11).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대적자들 앞에서 자신의 심판을 자청한다.
"오, 당신의 의를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시 35:4, 한글성경에서는 '판단'으로 번역됨).
그는 밧세바와 간음한 뒤 나단 선지자가 선포한 심판의 메시지를 받아들였다.
"주의 심판은 의로우십니다"(시 51:4).
다윗은 날 때부터 죄인된 옛 사람의 심판을 합당히 받아들이며, 정한 마음의 창조를 갈망한다(시 54:10).
심판은 죄인으로 태어난 옛 존재의 죽음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는 새로운 존재의 탄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곧 하나님의 구원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은 구원은 교리이며 관념에 불과하다.
그에게 새로운 존재로서의 영원한 생명은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심판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지내심에 연합되는 심판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 그와 함께 무덤에 갇힌 자가 복되다.
그런데 그의 죽으심과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무덤에 처한 자는 교만한 자들의 비방거리이다.
마치 유다 백성이 심판 중에 있을 때 바벨론이 그러했듯 말이다.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 중에 있는 이들을 조롱하고 압제하고 괴롭힌다.
하나님은 그들을 반드시 복수하실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복수, 하나님의 심판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자는 진실로 복된 자이다.
그에게는 심판에 곧 구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함에도 불구하고 평생 만사형통하여 심판이 임하지 않은 자는 참으로 저주받은 자이다(시 73:18-19).
그에게는 심판이 영원한 형벌이기 때문이다.
♦묵상 기도
아버지..
주의 심판을 두려워했나이다. 오히려 교만한 자가 되었나이다.
눈을 지으신 하나님, 귀를 만드신 하나님을 멸시했나이다.
죄인으로 태어난 저는 심판이 마땅한 자였습니다.
제게 심판이 임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임했습니다.
아버지..
그러나 자비하신 하나님은 심판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오늘도 심판중의 곤고한 날을 보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의 교제로 인해 안심합니다. 강건합니다.
오, 아버지..
저의 심판, 의인의 심판을 보고 교만한 자들이 둘러싸여 있습니다.
심판 중에 있는 주의 백성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떠벌리고, 멸시합니다.
눈을 지으신 아버지, 귀를 만드신 아버지, 저들의 교만을 보소서.
저들을 복수하소서. 그리하여 저들도 영생의 진리를 알게 하소서.
심히 두려운 것은 저들이 이 땅에서 심판받지 않은 것입니다.
오, 주여... 저들을 이 땅에서 심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