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사가 일제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고도 항소를 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고 당시 신문이 보도했다.
28일 뉴시스는 싱가포르 영어신문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는 1910년 3월 7일 8면에 '사형수 저격자(condemned Assassin)'라는 타이틀의 기사를 소개하면서 이같이 전했다.
뉴시스는 눈길을 끄는 것은 '어머니, 조상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라 꾸중'이라는 작은 제목이었다. 기사는 "이토 백작을 저격 살해한 안(중근)의 법정대리인 미즈노 변호사가 2월 15일 안중근을 면회, 항소를 할 것인지 물었다"는 내용으로 시작된다고 보도했다.
이에 안중근의사는 "몇 가지 점에서 판결이 불만족스럽지만 항소를 할 경우 겁쟁이로 비쳐지는 것이 우려된다"며 "충분히 숙고한 후에 결정을 내리겠다"고 밝혔다.
알려진 대로 안중근의사는 의거 당시 일본에 의해 한국군대가 해산된 상황에서 실질적인 한국군대였던 대한의군 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이라는 직분을 갖고 있었다. 안중근의사는 이토 사살 직후 한국의 국권을 찬탈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 분명히 밝혔고 이는 뉴욕타임스를 위시한 많은 서방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안중근의사는 군인의 신분이므로 국제공법에 따라 포로로 대우할 것을 요구했으나 러시아로부터 재판관할권을 넘겨받은 일제는 일방적으로 불리한 재판을 진행했다. 당시 국내외에서는 안중근의사를 돕기 위해 변호모금운동이 벌어진 가운데 법관양성소 출신 변호사 안병찬과 러시아인 콘스탄틴 미하일로프, 영국인 더글러스 등이 무료변호를 자원했으나 일제는 이를 불허했고 심지어 일본인 관선 변호사 미즈노 기타로(水野吉太郞)와 가마타 세이지(鎌田政治)의 변호조차 허가하지 않으려 한 것으로 전해졌다.
스트레이츠 타임스의 기사는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 재판을 진행하는 일제에 안중근의사가 분노했지만 항소를 하는 것이 자칫 목숨을 구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우려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날 면담에서 미즈노 변호사는 안중근의사의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의 특별한 당부를 전한다. "조상의 명예로운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는 부당한 재판일망정 항소를 하여 목숨을 연장하는 것으로 비친다면 가문을 욕되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육혈포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이토를 처단하여 민족혼을 빛낸 안중근의사의 기개는 어머니에게서도 비롯됐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황해도 해주가 고향인 안중근의사는 대대로 향리집안으로 알려졌으며 5대조(안기옥)의 네 아들이 모두 무과에 급제해 가문의 위상을 빛냈다. 안중근의사는 태어날 때 등에 검은 점이 7개가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으로 태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에는 응칠(應七)로 불렸고 현감을 지낸 조부(안인수)가 미곡상을 운영한 거부여서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피에는 문관의 영민함과 무관의 용맹함이 흐르고 있었다. 안중근의사는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헌신, 교육자의 길을 걸었으나 일제가 1907년 고종의 강제폐위와 정미7조약을 통한 군대해산으로 전국적인 의병운동이 일어나자 무장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스트레이츠 타임스는 "안중근의사가 어머니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마음을 움직였다"고 언급했다. 긴박한 죽음의 순간에서도 어머니와 아들은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있었다. 104년전 신문은 항소 포기가 결정적으로 어머니의 뜻을 따른 것이라며 남다른 효심을 알렸다.
훗날 조마리아 여사는 안중근의사의 두 동생을 통해 직접 지은 수의를 보내며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의해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니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안중근의사의 미디어 사료를 발굴하고 있는 재미언론인 문기성씨는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시다. 이토 처단이라는 민족사의 쾌거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만일 항소를 하였다면 당시 서구언론의 깊은 관심으로 미뤄 한반도를 침탈한 일제의 만행이 더욱 부각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안중근의사가 항소에 관심을 가진 또 한가지 이유는 '동양평화론'을 탈고해야 한다는 의지도 있었다. 뤼순(旅顺)감옥에서 '안응칠 역사'라는 자서전과 함께 집필 중이었던 '동양평화론'은 전략적 요충지인 뤼순을 청나라에 돌려준 뒤 한·중·일 3국이 공동으로 관리하는 군항으로 만들어 세 나라에서 대표를 파견하고 평화회의 조직, 3국 청년으로 구성된 군단 편성, 이들에게 2개국 이상의 언어를 가르치며, 은행을 설립하고 공용 화폐를 만들자는 주장이 들어 있다. 이는 오늘날의 유럽연합(EU)을 떠올리게 하는 시대를 앞서 가는 혜안으로 평가되고 있다.
안중근의사는 항소를 포기했지만 고등법원장 히라이시에게 책을 완성할 수 있도록 보름 정도 사형 집행을 늦춰줄 것을 탄원하고 집필에 들어갔다. 3월18일 서문을 지은 안중근의사는 그러나 사형을 속전속결로 집행하려는 일제에 의해 예정된 분량의 5분의 1만 완성한 채 3월26일 형장으로 끌려나갔다. 이토 처단일로부터 153일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