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요셉이 해석한 바로의 꿈은 하나님이 행하실 일로 애굽의 운명을 예시한다.
칠년 풍년 후 칠년 흉년이 되어 이전의 풍년을 다 삼켜버릴 것이다.
요셉은 꿈 해석뿐 아니라 명철하고 지혜로운 사람을 택하여 애굽땅을 다스리게 하여 곡물비축계획을 실시하라고 조언한다(32-36절).
곧 풍년 때에 곡물을 비축하여 흉년 때를 대비하라는 계획이다.
요셉의 해석과 조언은 설득력이 있었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은 이 제안을 좋게 여기고 수용한다(37절).
이 때 바로는 이 일의 적임자로 요셉을 지명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찾을 수 있으리요"(38절)
요셉이 천거한 총명하고 지혜로운 지도자가 그 자신이 된 것이다(39절).
바로는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의 뒤를 이은 이인자로 명한다(40절).
바로는 요셉이 애굽의 왕궁 총리가 되는 의식과 관습, 그리고 법도를 명한다(41절).
그는 요셉에게 왕의 인장을 넘겨주고 요셉은 왕명(王命)의 공적 집행자가 된다(42절).
명예로운 표징으로 세마포 옷과 금사슬로 된 목걸이를 걸어준다.
바로는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요셉을 태우게 하고 무리로 하여금 그의 앞에서 '엎드리라'고 소리치게 한다(43절).
바로는 요셉에게 자신의 전권을 위임했음을 선언한다(44절).
그리고 그의 이름을 사브낫바네아로 바꾸고 온의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낫을 그에게 아내로 삼게 한다(45절).
애굽의 왕궁 관리자에게 부여하는 궁중의식에서 개명(改名)은 매우 중요하다.
이 행위를 통하여 요셉은 완전히 애굽의 궁정생활로 접어들어 간다.
그리고 그의 궁정생활은 애굽신의 보호영역에 예속되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래서 바로는 히브리 이름 요셉을 애굽 이름인 '사브낫바네아'로 바꾸어준다.
사브낫바네아는 '은밀한 것을 열어 보이는 자' 또는 '영광스런 안식의 보화'로 해석된다.
그런데 이 말의 본 뜻은 '신께서 말씀하시고 사신다'이다(God speaks and he lives).
여기서 말하는 '신'은 물론 애굽 신이다.
뿐만 아니라 '신에 속한 자'라는 뜻의 '아스낫'을 아내로 맞이한다.
아스낫은 애굽 카이로 동북쪽에 있는 헬라오폴리스 제사장 '온'의 딸이다.
요셉의 장인 보디베라는 철자상의 차이를 도외시하면, 요셉의 이전 주인의 이름 보디발과 같다.
한편 이 모든 일의 배후에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성취해 가시는 하나님이 계신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며 만유 가운데 계시며 만유를 통일하신다(엡 4:6).
요셉은 물론 애굽도 바로도 풍년도 흉년도 이방의 제사장도 다 만유 위의 하나님께 속한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은 이제 완전히 애굽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을 온전히 신뢰하였다.
곧 입애굽과 출애굽의 약속을 성취하는 일에 자신의 인생을 드린 것이다.
후에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믿음을 가리켜 '출애굽을 바라보는 신앙'이라고 결론지었다(히 11:22).
요셉의 인생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예표한다.
창세전 영원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애굽과 같은(사 31:3), 세상에 오셨다(요 1:14).
요셉이 애굽의 의식과 관습과 법도에 따라 애굽왕궁에 들어갔듯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과 같이 되어서 오신 것이다(빌 2:7).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여 그의 언약을 성취하였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는 보내신 이 아버지와 함께 하셔서 그의 뜻을 행하셨다.
그 뜻은 그의 말을 듣고 보내신 이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다(요 6:40; 17:2).
영생의 실재는 창세전 성자가 성부와 함께 누렸던 영광을 보는 사귐이다(요 17:3, 24; 요일 1:1-3).
영원을 망실한 애굽과 같은 세상에 살며 죄가운데 죽을 자를 위해 아들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영광을 얻으셨다.
또한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믿는 우리를 영원의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신다.
그는 진실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셔서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한다(요 14:6).
영원에서 보냄 받은 아들은 영생 얻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신다(요 17:18).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는 세상과 사회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는다.
그들과 똑같이, 그들의 의식과 관습과 법도를 따른다.
그러나 그의 나라는 세상나라가 결코 아니다.
요셉이 언약을 신뢰하며 살았듯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살아간다.
매일 말씀을 양식으로 살며 세상에서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한다.
리처드 니버는 세상을 문화로 해석하며 문화 속에서 실존하는 그리스도인을 정의하였다.
크게 다섯 가지 범주가 있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그리스도와 문화).
문화의 우월자(above culture), 문화의 대항자(against culture), 문화의 동화자(in culture), 문화의 역설자(culture in paradox), 문화의 변혁자(the transformer of culture)이다.
영생의 삶은 세상과 무관하거나 세상을 방치하는 삶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을 그의 목적대로 회복시키는데 있다.
문화의 변혁으로서 하나님 나라는 말씀 안에서 세상을 향한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실현된다.
물론 그 완성은 아들이 오시는 세상의 종말의 때 일어난다.
♦묵상 기도
아버지...
요셉이 애굽 사람이 되었듯이 영원의 아들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아 의롭게 되셨습니다.
죄인들 안에서 죄인의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마침내 죄인들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당신은 정녕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나이다.
아버지여...
당신을 신앙했으나 생명 없는 자로 살았습니다.
스스로 세상과 구별되는 것을 최상의 믿음으로 여겼습니다.
세상 가운데 있으나 세상 사람처럼 살지 않는 것이 목적인바
아예 세상 가운데 거하는 것을 피했습니다.
아버지...
내게 세상을 긍휼히 여기시는 당신의 마음을 주소서.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세상을 향한 당신의 마음을 주소서.
당신의 나라는 세상 나라가 아니나, 세상을 구원하시나이다.
죄인인 나를 위해 기꺼이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아들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이 몸을 당신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