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남자 고등학생이 담임선생님에게 카카오톡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죽어버리겠다. 남산타워로 올라가고 있다.'
선생님은 부랴부랴 학생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취했다. 깜짝 놀란 어머니는 정신없이 경찰 112 종합상황실로 신고했다. 연락을 받은 경찰은 휴대전화 위치 추적에 성공했다. 학생은 실제로 남산타워를 향해 가고 있었다. 112 상황실은 파출소 순찰차와 경찰서 실종팀에 학생을 찾도록 지령을 내렸다.
급작스레 남산타워 주변에서 학생을 찾기 위한 수색작전이 벌어졌다. 경찰관 10여명이 남산타워 주변의 투신 가능 지점에 흩어졌다. 실종팀에서는 학생과 계속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나 중부서 실종팀 경찰관 누나야! 지금 마음이 심란하겠지만 일단 전화라도 받아줘."
경찰관은 학생에게 끈질기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마침내 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알아서 하겠다" 학생은 간단한 메시지만 전한 후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수화기를 놓지 않고 학생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래도 누나가 도와줄 게 있나 찾아 보자", "경찰 누나인데 커피라도 한 잔 하자"
경찰관은 만나서 대화를 나누자고 부탁했다. '누나'라는 호칭을 사용해서 친근감을 주기 위해 노력했다. 다행히 14년차 베테랑 형사의 시도는 적중했다. 이윽고 학생은 남산타워 버스 정류장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관은 학생을 반갑게 맞으며 "얼굴도 잘 생겼는데 왜 그러느냐"고 웃음을 유도했다. 그러나 학생은 "혼자 가겠다"고 버텼다. 그때 경찰관은 농담 한 마디를 던졌다. "누나라고 속여서 미안해. 근데 이모는 되겠다."
그 말에 학생은 피식 웃으며 경찰관을 따라나섰다. 자살을 고집하던 학생의 마음을 풀어준 건 감동적인 설득이 아니었다. 교훈적인 상담도 아니었다. 다만 썰렁한 농담 한 마디였다. 끈질긴 경찰관의 설득에 꼬리를 내린 학생은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여자 친구에게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받고 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어요. 혼자라는 생각만 들었어요. 남산타워로 가면 죽을 수 있겠다 싶었어요."
이 정도 되고 나니 이제 무장해제가 된 셈이다. 그래서 경찰관은 학생을 경찰서 앞 샌드위치 가게로 데려갔다. 학생은 달려온 부모와 경찰관들에 미안한 듯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생각은 하지 않겠다."
얼마나 다행인가?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죽으려는 결심을 포기했으니. 어리석은 길을 선택했음을 알게 되었으니. 구만 리 같은 인생을 다시 꿈 꿀 수 있게 되었으니.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자살의 위기를 통해 인생을 한 수 배울 수 있었으니까.
아직까지는 더 알아가야 할 세상이다. 이 만한 일로 포기하기에는 아까운 인생이다. 이 정도로 포기할 인생이라면 그 누가 포기하지 않겠는가? 여자 친구를 잃은 상실감으로 포기할 정도로 하찮은 인생인가? 이까짓 일로 자살해야 할 정도로 보잘 것 없는 인생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 아직까지 끝난 게임도 아니다. 게임은 계속되고 있다. 게임의 판도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다시 시작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 사람이 아니면 어떤가? 또 다른 사람을 만날 기회도 얼마든지 다가올 수 있는데.
아는가? 내 인생은 내가 마음대로 포기할 정도로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걸. 내 생명일지라도 내가 마음대로 이렇게 저렇게 할 권한이 부여된 게 아니라는 걸. 우리의 생명은 주님의 것이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이다. 내 생명 때문에 행복과 불행의 판도가 달라질 사람이 많지 않은가? 그러니 자기 혼자 마음대로 결정할 생명이 아니다.
세상에는 다른 사람을 죽이려고 혈안이 된 사람이 많다.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눈이 벌겋다. 권력에 대한 집착 때문에.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의 인기가 다윗에게로 쏠리자 사울은 속상했다. 끓어오르는 질투심과 시기심. 불타는 분노. 다윗을 죽이기 위해 창을 던졌다. 그것도 두 번씩이나. 그러나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사람인 걸 어찌하랴. 하나님께서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는 걸 어떻게 하랴. 자식인 요나단까지 다윗 편을 들고 있으니 어떻게 하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으니 무슨 희망이 있으랴. 성령이 떠나고 악신에 들렸으니 그에게서 희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사울은 포기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손이 다윗에게 쏠렸음을 알았지만, 잘못된 길을 돌이키지 않았다. 자신의 딸 메랍과 미갈을 미끼로 사용해 가면서 다윗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민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블레셋 사람들의 손으로 죽이려 했다. 그것도 실패했다. 결국 다윗은 사울의 눈을 피해 외로운 망명길에 올랐다. 거칠고 무더운 광야를 헤맸다. 외국으로 망명을 떠나기도 했다. 심지어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면서까지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쓰실 사람 다윗을 광기 어린 사울에게 내팽개치지 않으셨다. 사울이 아무리 혈안이 될지라도 하나님의 손에서 뺏어갈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죽이려는 사람의 손에 다윗을 내주지 않았다.
세상에는 죽이려는 사람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자살하려는 학생을 살리려 몸부림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그들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멋진 연합 전술을 펼쳤다. 그리고 결국 성공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놓으셨다.
십자가의 은혜를 맛본 자들은 이제 살리는 일에 몰두해야 한다. 복음이 해법임을 알기에 복음을 전해야 한다. 복음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린다. 절망을 뚫고 일어나게 만든다. 그러기에 복음을 들고 나간다. 복음이 필요한 자들을 찾아서. 봄을 맞이하는 우리 손에 복음을 들고 죽어가는 사람들에게로 나가야 한다.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