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동근 목사의 사사기 10] 기드온이 선택받은 조건

칼럼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1. 훌륭한 여사사 드보라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은 다시 범죄하였고 하나님은 그들을 미디안의 손에 붙이사 7년 간 압제를 받게 하셨다.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후처 그두라의 소생이므로(창 25:1-4) 이스라엘과는 혈연관계가 있지만 점점 멀어져 적대 관계에 있게 되었다. 그들은 이스마엘 자손들과 의논하여 요셉을 애굽에 판 자들이다(창 38:28, 29, 36).

민수기 22장에서 이스라엘이 모압 평지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모압과 미디안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함으로 결탁해서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했던 약한 나라였다(민 22:1-8). 그러다 민수기 31장 7절에서 이스라엘에 의해 철저히 진멸당한 바 있다. 그때 하나님은 모세에게 미디안을 쳐서 원수를 갚으라 하셨고 모세는 비느하스를 보내서 미디안의 모든 남자를 죽이라고 했다. 그 전쟁에서 미디안의 다섯 왕이 죽임당했고 발람도 그때 죽었다(민 31:1-10). 그러한 미디안이 약 200년이 지난 지금 남은 무리들이 힘을 증강시켜 이스라엘을 압박하는 정도가 되었다.

2절은 “미디안의 손이 이스라엘을 이긴지라”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미디안에게 압박받는 정도가 심해 산에다 구멍을 뚫고 굴을 팠으며 요새들을 만들었다. 지금 말로 하면 산 이곳저곳에 그들이 쳐들어오면 숨을 벙커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짓고 약해지면 이러한 비참한 상태에 떨어지게 되어 작은 대적에게도 당할 수 없을 만큼 되어버린다.

2. 당시 미디안 사람들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짐승을 데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곳에 들어와 이스라엘이 파종한 토지 소산들을 멸절하였고 또 양이나 소나 나귀도 다 없애버렸는데, 이때 미디안은 자신들만 들어온 것이 아니라 아말렉과 동방 사람과 함께 이스라엘에 들어왔다. 아말렉은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에게 한 번 패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나자 약체였던 자들이 다 강성하게 되어 쳐들어왔던 것이다.

이들이 첫째로 메뚜기처럼 들어왔다고 했는데, 이는 정규 군대편성으로 인한 전면적인 공격이 아니라 그저 사람들이 물밀듯 들어와 마구 공격하고 필요한 대로 빼앗고 했다는 뜻이다. 우리는 농촌에서 메뚜기들이 논밭을 한 번 휩쓸고 갔을 때를 연상해볼 수 있다. 메뚜기들은 전체가 명령 체계에 따라 움직이기보다는 자신들의 먹이를 따라 임의로 움직인다. 원래 메뚜기는 왕이 없는 곤충이다(잠 30:27). 그러므로 그들은 조직적인 규율에 따라 공격한 것은 아니고 그저 산발적으로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그들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 이것에 대해 성경은 “이스라엘의 미약함이 심한지라”고 했다(6절). ‘미약하다’는 것은 ‘쇠하게 되다’, ‘가난하게 되다’, ‘황폐하게 되다’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미디안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으므로 쇠하게 되고 가난하게 되고 황폐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약해지는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첫째는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는 데도 있고, 상습적인 죄에 빠지는 데도 원인이 있으며, 마음 속에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두고 있는 경우도 그러하다.

가장 힘을 잃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성도가 하나님이 정하신 길 위에 있지 않은 것이다. 이것은 어쩌다 죄를 짓는 죄보다 더 심각한 경우다. 이는 성도가 주님을 순종하지 않는 길 위에 있는 것이고 하나님을 떠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는 돌이켜야 한다. 돌이키되 그 길을 돌이켜야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나 에스겔 선지자는 이스라엘에게 그 죄악의 길에서 돌이키라고 촉구했던 것이다(렘 18:23, 겔 33:8).

길을 돌이키는 것은 한 가지 죄악을 처리하는 것보다 더욱 심각하고 중대하다. 성도는 잘못 들어선 길을 돌이킨 후에야 자신이 왜 그렇게 약했었던지를 깨닫게 된다. 이를테면 예레미야 당시 유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은 가증하게 거짓 예언을 하였으며 자신들의 육신적 삶과 쾌락을 추구하였다. 이는 그들의 길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한다. 당시 잘못된 길 위에 있었던 자들은 더 있다. 이는 바벨론 침략을 피해 애굽을 의탁하려 했거나 예루살렘에 남아있으려 한 자들이다. 이들은 다 하나님의 뜻과 그 길 위에 있지 않고 자신들의 길을 정하고 간 사람들이었다. 결과로 저들은 나쁜 무화과로 판명이 되고 치욕과 저주와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다(렘 23-24장).

3. 그러자 이스라엘은 비로소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그들이 편안할 때에는 여호와를 잊어버리고 바알과 아스다롯과 여러 우상들을 섬겼다. 이것이 그들이 여호와의 목전에 악행을 한 것이다(1절). 그들이 우상을 섬기게 된 것은 아모리 신들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0절). 사람이 참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게 되는 것은 아모리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 아닌 것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 대상이 사람이든 물건이든 두려움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나님 자신이 아닌 어떤 사람을 두려워하여 빠지게 되는 이단도 많다. 그런 이단은 영이요 진리이신 하나님을 두려움으로 섬기게 하지 않고 사람을 두려워함으로 그를 좇게 만든다. 그렇게 신격화되고 우상화된 사람이나 사물을 떠나거나 버리면 큰 재앙을 당하고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그런 우상들을 두려워하며 섬겼지만 칠 년이라는 시간이 흐를 때 미디안으로부터 많은 핍박을 받으며 궁핍한 가운데 산과 굴에 숨어 지내면서 그 우상을 두려워하며 사로잡혔던 것에 대해 회의가 일어났을 것이다. 악한 자가 우상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방식은 대개 유사한데, 처음에는 사람에게 매우 편리하고 유익한 것처럼 다가와서 점점 끌어들여 깊이 빠지게 한 다음 그 단체나 어떤 주목할 만한 사람을 숭앙하고 두려워하게 만든다. 그리고서 그곳을 감히 떠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대적으로부터 많은 착취와 압박을 당하면서 괴로운 나날들을 지내다보면 그 모든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과연 그 우상이 자기에게 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실상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헛된 것에 속았음을 깨닫는다. 이렇게 속임당한 것을 알고 우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찾는다. 지난날 하나님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섬기며 교제하던 때를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돌아올 마음을 갖게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선지자를 보내어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일깨워주신다(8절). 그리고 그 선지자를 통하여 그들의 죄를 책망하신다. 하나님은 그들의 불신과 악행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이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신다. 그들의 가장 큰 죄악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치 않은 것이다.

1. 11절의 여호와의 사자는 구약 시대에도 그분의 백성들을 권념하시고 때때로 구원의 역사를 하시며 돌보신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출 3장 참조). 그 분이 그리스도이심은 14절과 16절에서 그분이 여호와로 불리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으며, 22절과 23절을 볼 때 기드온은 여호와의 사자를 본 것으로 인하여 슬퍼했는데, 이는 그에게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상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보는 자는 죽는다고 하셨지만(출 33:20) 그분이 장차 인자로 나타나실 그리스도의 전조(前兆)로서 이 땅에 사람을 접촉하기 위하여 나타나신 하나님(manifested God)으로는 보고도 죽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인자로 오신 하나님을 찬양하자.

2. 여호와의 사자이신 주님은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을 찾으셨다. 이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분 스스로 사람을 택하여 사용하신다. 그분은 이스라엘을 구출하시기 위해 합당한 사람을 찾으셨는데,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바로 하나님이 사용하시기에 적합한 그릇이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왜 그가 하나님 눈에 띄었을까? 첫째로 그가 미디안에 맹종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압제하여 곡물이든 뭐든 착취하는 것이 불법이라는 것과 그들의 그러한 행사가 옳지 않음을 알고 매우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1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을 “큰 용사여”라고 불렀다. 당시 미약한 므낫세 지파 중에서도 매우 작은 요아스 가족의 한 사람인 그를 어떤 사람도 큰 용사라고 보지 않았으며 기드온 자신도 스스로를 큰 용사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눈은 다르다. 주님은 누가 큰 일을 할 수 있는지를 아신다. 하나님께서 아시는 것이 참된 것이다.

기드온은 자신이 경작하여 얻은 곡식을 포도주틀에서 비밀리에 타작하였다. 미디안에게 알려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비록 자신이 당시 약체였던 이스라엘 사람으로 미디안에게 압제를 받고 있었지만, 불법적인 미디안의 권세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철저히 진멸되어야 할 대상이지 이스라엘이 굴복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순진하게도 미디안 사람들에게 곡물을 바쳐가며 그들이 조금 남겨주는 것을 받아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미디안의 압제를 받더라도 타협하며 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저 현실에 순응하며 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드온은 달랐다. 기드온은 발각될 때 핍박과 어려움을 당할 것을 각오하고 비밀리에 타작을 한 것이다. 기드온은 귀한 곡식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아깝게 여겼을 것이다. 기드온은 밀을 포도주틀에서 타작할 때 미디안 대적을 타작하는 심정이었으리라. 그것이 여호와의 사자가 그를 큰 용사로 본 이유였을 것이다.

또 여호와의 사자와 기드온의 대화 속에서도 그의 심중을 알 수 있다. 12절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라고 했을 때 한 기드온의 대답은 그의 심중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나타낸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기드온의 이 말이 겉으로는 원망처럼 들리지만 사실 하나님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그의 말 속에는 개인의 안녕과 평안이 아닌 이스라엘을 위한 심정이 들어 있다. 그것은 기드온이 하나님의 나라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대적 미디안에 대한 적개심이 가득하고 나라가 구출되기 위해서는 미디안을 쳐부수고 현실 상황을 근본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영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실상 그러한 기드온의 마음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된 것이기도 하다.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동족애와 적에 대한 공정한 관점이 그로 하여금 네 번째 사사가 되어 미디안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는 일을 하게 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만 무난하게 살면 된다는 식의 안일함에 빠져 미디안 사람들과 좋게 지내며 자신들의 안녕과 편안함을 추구했을 것이다. 그러한 정신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런 안일무사한 사람을 쓰실 리도 없다.

3. 14절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직무를 부여하시는 장면이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여기서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네 힘을 의지하고 미디안을 치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물론 기드온과 함께하심으로 싸우시겠지만 먼저 기드온에게 네 힘을 의지하여 싸우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힘이 약하다는 것을 아시지만 그럼에도 먼저 우리의 약한 힘을 사용하라고 하신다.

사람 편에서 먼저 사모하고 갈망하여 헌신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사용하실 수 없다. 한 어린아이가 오병이어를 드릴 때 주님은 오천명(여자와 아이 외의 숫자)을 먹이실 수 있었다. 오병이어만으로 먹이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사람 편에서의 드림을 근거로 하여

 

#유동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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