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아버지! 덧없고 허무한 인생이 아침을 맞이합니다. 마음의 짐을 끌어안고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제게 빛을 비추어주소서. 하나님의 얼굴을 비추소서. 아멘"
성경은 인생을 진지하게 다룬다.
인생은 천박한 낙관주의도, 암울한 염세주의도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만 밝혀지는 진지한 상황이다.
시편 90편은 인간의 상황, 그 유한성, 그리고 죄책에 관한 진실을 가르친다.
인생의 무상함과 불행,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소망을 드러내는 지혜시이다.
모세라 이름하는 시인은 하나님을 송축함으로 시를 시작한다.
"주여, 주는 대대로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1-2절).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전, "영원"에 계셨으며, 영원까지 그리하신다.
영원은 과거, 현재, 미래로 규정되는 인간의 시간(역사)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영원을 알 때에 비로소 인간의 유한을 바르게 이해한다.
영원에 무지한 인간은 유한의 인생, 허무한 인생을 바르게 용납하지 못한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고자하는 이상주의에 사로잡히거나, 공허한 염세주의에 빠지게 된다
인간이 당하는 모든 상황, 행복과 불행, 희극과 비극을 헤아리는 잣대는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있다.
영원의 하나님은 모든 시대와 모든 세대의 변화 속에도 불구하고 영원히 변하지 않으신다.
세상에서 변할 수 없는 것 중의 대표격인 산들조차 태어나서 죽는다(2절).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히 존재하신다.
영원에서 보는 인간의 세계는 티끌이다.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모든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3절).
하나님은 모든 인간에게 죽음을 명하신다. "사람아 흙으로 돌아가거라"(3절, 쉬운성경).
흙으로 지어진 인간은 흙에서 나는 것을 먹고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의 출생과 죽음, 그 사이는 매우 짧다.
인간이 천년을 산다 하여도 하나님께는 밤의 한 순간(경점, a watch)같을 뿐이다.
유대인들은 밤을 세 "경점"으로 나누었다.
인간은 비록 천년의 인생이라도 밤의 1/3만 깨어있을뿐, 다시 죽음의 잠으로 내던져지는 것이다.
"주께서 죽음의 잠으로 휩쓸어 가시면 사람은 아침에 돋는 풀과 같습니다"(5절, 쉬운성경).
풀과 같은 인생, 아침 햇살로 생명을 가져오나 그 햇살은 풀을 말리고, 저녁에는 완전히 말려버린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짧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어 보인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리이다"(10절).
젊은이들은 한참 후에 도달해야 할 나이, 그러나 이미 그 나이에 이른 사람들은 새처럼 날아가 버린 한순간이다.
혹시 많은 것을 얻어 성공했다 하여도 그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다(10절).
누구나 죽음 앞에서 절망이 따르고, 회의가 임하고, 확신했던 판단들을 의심한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에 저항한다. 죽음을 두려워한다. 거부한다. 그러다가 체념한다.
다른 사람의 죽음도 불편하다. 시신 앞에서 오싹한다.
더구나 어린아이, 젊은이의 죽음, 한창때의 갑작스런 죽음에 몸서리친다.
왜 우리는 죽음을 낙엽이 지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가!
인간의 죽음은 자연의 죽음과 달리, 자연법외에 도덕법이 실재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인 "흙에서 흙으로"라는 자연법뿐 아니라 죄책 때문에 죽어야 하는 도덕법에 따르기 때문이다.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와 관계된 일이다.
"주의 분노가 우리를 다 태워버립니다. 주가 화내시면 우리는 두려워 떱니다"(7절).
인생에 개입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생명의 법칙을 어기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존재이다(마 4:4).
이것이 생명의 법칙이다. 영원한 생명만이 말씀이 양식이며, 기도가 호흡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의 실존은 말씀으로 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여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의 앞에 놓으시고, 우리의 은밀한 죄를 그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다(8절).
이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심원한 이해이다.
즉,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의 도덕적 결함이나 행위(목록)의 불순종으로 인함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은밀한, 인격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바울의 고백대로 우리 안에 역사하는 세력으로서의 죄이다(롬 7:20, 23).
사실 눈에 보여지는 행위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인 불행과 비극을 당할만하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특히 바리새인으로서 행위에서 완전했던 바울은 더욱 그러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안의 은밀한 죄의 세력을 발견하자, 경악한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롬 7:24).
하나님은 그의 얼굴빛으로 은밀한 죄의 세력을 꿰뚫어보신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빛 가운데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우리는 매일 우리를 부정한 힘, 즉 우리를 쇠약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힘 아래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단지 어떤 특별한 실패와 특별한 고통을 견뎌내야 하는 날뿐 아니라 우리가 사는 모든 날 동안 그 밑을 통과해야 할 '진노'입니다"(폴 틸리히).
우리의 모든 날은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 중에 지나간다!
이는 예외 없이 모든 사람이 처한 상황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아는 것이 아니다.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11절).
고대의 비극에서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그 비극들은 인간의 진실한 상황이 신(하나님)의 진노아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에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극장의 무대에만 올려졌지 삶에서 외면당했다.
인간은 갈수록 위대해지고 교만해졌다. 그러다가 절망과 파멸에 던져진다.
하나님의 진노의 증상이 임하면 잠시 요동하나 이내 진노 아래 있다는 운명을 망각한다.
영원히 살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 중에 살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를 망각하는 세대..
하나님의 진노 중에 지나가는 모든 날을 세어보는 자가 진실로 지혜자이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2절).
하루하루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세어보는 자, 그는 자신 안의 끝없는 불안과 절망을 가져다주는 부정의 힘, 죄의 세력을 대면하는 자이다.
그에게 희망이 찾아든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13절).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신다.
그는 아침마다 주의 사랑으로 배부르게 되며, 하나님으로 인해 기쁘고 즐겁게 된다(14절).
죄의 세력을 직시하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깨닫는 그 괴로움을 대면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가득ㅎ한 만족과 기쁨, 즐거움을 얻게 된다(15절).
더 이상 진노가 아닌 은총 아래에서 사는 자가 된다.
괴로움이 기쁨으로 바뀌는 그 사이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는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진노 받고 죽으셨다(고후 5:14).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주의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므로 모세의 이 기도는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이 드리는 기도이다.
모든 사람의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는 기도이다.
♦묵상 기도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 중에 사는 인생임을 몰랐습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는 죄의 세력도 감지하지 못했습니다.
영적 소경이었으며, 오직 나 자신을 위한 인생에 급급했습니다.
나는 절망과 파멸로 떨어졌습니다.
오, 아버지...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아버지..
아버지는 저를 심판을 지나 영원으로 이끄셨습니다.
거기서 인생의 무상함을 보았습니다.
진노 중에 지나가는 인생의 실체를 보았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나의 하루하루는 진노 중에 시작됨을 압니다.
그래서 그랬군요! 진리를 아니 시원합니다. 자유케 됩니다.
오, 주님 진노중의 인생을 계수하게 하소서.
아버지..
오늘도 진노 중에 있는 인생으로 인해 탄식합니다.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주의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대신 진노 당하신 아들의 공로로 탄식이 기쁨이 됩니다.
아침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배부릅니다.
더 구할 것은 없습니다. 오직 아버지로 충분합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