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어제부터 시작한 폴 스티븐스 교수의 '일상의 영성' 강의를 통해 진리가 존재로 쏟아진다.
그는 73세 노교수이시며, 20여년의 길거리 방랑자를 위한 목회, 중년의 목회 중단, 목수와 사업으로 투혼, 아프리카에서의 10년 사역, 그리고 지금은 28개국을 다니면서 일상의 영성을 증거하고 계시다.
어제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대한 일상의 영성을 배웠다.
특별히 잠에 대한 일상의 영성이 내게 계시로 경험되었다.
'잠'은 믿음의 행위이다.
솔로몬이 불면의 밤을 보낸 것은 '그 마음이 밤에도 쉬지 않았기' 때문이다(전 2:22-23).
솔로몬이 불면의 밤에서 놓임 받은 것은 "잠을 잘 때에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다(시 127:1-2).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헛되도다"(시 127: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시 127:2).
여기서 2절은 1절을 설명하며, 2절은 1절의 결과이다(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자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고 성을 지키심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잠을 잘 때에도 우리를 위해 모든 일을 하고 계시는(사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것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안식의 잠을 자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가 주체가 되어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는 일은 잠을 잘 때에도 몸은 비록 쉬지만, 마음은 쉬지 않고 일하니 불면의 밤이 될 수 밖에 없다.
어제 밤, 잠은 믿음의 행위임을 고백하며, 나의 모든 상황중에 일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기도를 드린후 잠을 청했다.
모처럼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 주시는 잠을 잔후 개운하게 새벽을 맞이했다.
하나님이 해주시는 일, 집을 세우고, 성을 지키는 일을 내가 주체가 되어 하는 것이 율법주의의 핵심이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친필로 큰 글씨를 써서 서신을 마무리한다(11절).
그리고 복음의 자유를 빼앗는 율법주의가 지향하는 결말을 드러낸다.
저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한 것은 모두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이다. 이들이 할례받게 한 저의는 다음 3가지이다.
1) 저들은 겉보기에 좋은 인상을 만드는 자들이다(make a good impression outeardly).
즉, 진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미지에 온통 관심이 있다.
2) 저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핍박을 면하려 한다.
3) 저들은 자기들이 한 일(할례받게 한 일)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자랑'하려는 자들이다.
타고난 본성, 육체을 따르는 자들은 모든 일을 통하여 육체(본성)을 기쁘게 하고, 자기를 만족시키고, 자기가 한 일을 자랑삼는다.
자기를 자랑하는 극적인 요소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영적 영향력, 그리고 신앙의 실적에 있다.
이에 대해 바울은 본성, 자아, 자기, 육체와 함께 그 열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이다(5:24).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안에 있는 바울의 정체성은 할례를 주장한 율법주의자들과 정체성을 전혀 달리 한다.
1) 바울은 겉보기에 좋은 인상이 아닌, 그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17절).
2) 바울은 십자가를 전했고, 그로 인해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극심한 핍박을 받았다.
3) 바울은 십자가 복음을 전해 영혼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였으나 그 일로 자랑한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였다(14절).
"내게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나니"(14절)
자기를 위한 신앙의 결국은 자기를 자랑하고, 복음 안의 신앙은 자기가 죽은 십자가만을 자랑한다.
기독교 신앙은 두 개의 본질을 가진다. 이는 육체를 따름과 성령을 따름이다.
그리고 신앙의 본질은 반드시 실체로 드러난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고 숨은 것은 알려진다는 예수님이 말씀은 언제나 진리이다(마 10:26).
첫 번째 신앙의 본질은 육체를 따라, 타고난 본성대로 믿는 신앙이다.
이는 자기가 주체가 되어 믿는 것으로 '사람에게 좋게 보이는 것', '핍박을 면하기 위해 십자가를 외면하는 것'. '신앙의 실적을 자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십자가를 피하고 핍박을 피하는 신앙은 십자가의 반대자(원수)이다(빌 3:18).
이들은 본성의 욕망대로 살며, 이 땅의 것에 집착한다. 세상에서 얻은 것으로 자기를 자랑한다. 그러나 이들의 자랑은 진리 앞에서 부끄러운 추대이다(빌 3:19).
바울도 한 때 이렇게 믿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그러나 그리스도의 빛이 그에게 비추자, 그는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어온 것이 십자가의 저주를 받는 죄임을 깨달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십자가에 죽어 마땅한 자신을 대신하여 죽으신 죽음인 것을 계시로 깨달았다(고후 5:14).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갈 2:20)라고 고백한다.
두번 째 신앙의 본질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 성령에 따라 믿는 신앙이다.
이는 나는 없고 그리스도로 사는 복음에 합당한 믿음이다. 이 또한 태도와 행위로 드러난다.
자기자신에게서 나오는 열정과 욕망을 분별하고, 그 때마다 자기(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자기를 의식하고 자기를 자랑하려는 모든 시도는 십자가에 못박아야 할 성령의 대적자이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하나님과 사귐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드러내며 살아간다.
그는 더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갖지 않으며, 세상이 보는 자기 자신에게도 관심갖지 않는다.
무엇인가 했다고 자랑하지 않으며, 자랑을 두려워하며, 오직 주님이 드러나기만을 구한다.
유일한 자랑거리가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는 세상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박힌 자이다. 동시에 그도 세상을 못박은 자이다(14절).
세상의 관점, 인간적인 시각, 사람의 판단은 그를 오해하며, 정죄하며, 저주의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 때마다 그에 반응하는 세상을 향한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세상은 자신을 못박는데 스스로 자신을 못박지 않으면 참소를 견딜수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그럴듯하게 보이는 외적인 모습, 할례나 무할례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존재'이다(15절).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고후 5:17).
모든 종교는 추구하는 이상이 비슷하다. 진리, 궁극적 존재, 사랑, 영원등..
그러나 그 어떤 종교에더 실제는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복음만이 관념을 실제로 만든다.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보이는 육신으로 오셨으며(요 1:14), 볼수 없으신 하나님이 아들을 통해 실제로 나타나신 것이다(요 1:18).
바울에게 계시로 임한 복음은 모든 궁극적 가치를 실제가 되게 하였다.
이 말은 그의 인격, 삶에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오늘 아침, 나는 내 신앙의 본질, 그 진정성 앞에 머문다.
나는 오랫동안 '자기'에 근거한 신앙생활, 그리고 하나님의 사역을 해왔다.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신앙의 실적을 우상처럼 여기고, 내가 깨달은 영적 감동으로 영향력을 주고자 안달하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은 나를 자랑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나의 옛 사람은 낮은 자존감, 열등감, 수치심이 뒤엉켜있다. 비참한 실존을 하나남 앞에 가져가기 보다, 사람들에게 잘보이려, 전력을 다한 것이었다.
매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지성소로 나아가지만, 나를 드러내고 나를 자랑하려는 옛 사람이 여전히 실재한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다.
나를 자랑할 것인가, 오직 십자가를 자랑할 것인가!
진리 안의 선택은 내 몫이고, 십자가를 선택하는 것은 자명하다.
내가 사는 길을 십자가 뿐이다. 나의 정체성은 십자가에 못박힌 데에 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못박을 때마다 머뭇거리며 고통당하지 말고, 즉시로 나도 세상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존재로 사는 것이다.
새로운 피조물, 그리스도안의 존재로 사는 것은 끊임없이 나 자신과 세상 관점을 십자가에 못박는 고통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것은 무익한 고통이 아니라, 바울이 자랑한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새기는 값진 일이다.
오늘도 나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 그로 인한 인내와 고통은 예수의 흔적으로 새겨진다.
♦묵상 기도
아버지.
복음을 알고 하나님으로 살아간다고 하면서도,
무시로 옛 사람의 본성이 집요하게 나를 추적합니다.
나를 의식하게 하고, 주님이 나를 통해 하신 일을 자랑하고, 수시로 나를 드러냅니다.
십자가로 인한 핍박을 내심 두려워하며, 못박아야 할 세상의 관점을 받아들여,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기도 합니다.
아버지.
십자가 외에 살 길이 없나이다.
한 순간이라도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으면, 나를 자랑하고 맙니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부인하는 삶, 그것만이 내 안에서 주님이 사시는 길입니다.
여기에 고통이 따르지만, 그 때마다 내 몸에 새겨지는 예수의 흔적을 기뻐하며, 즐거이 따르게 하소서.
나의 자랑 십자가요, 내 몸의 흔적, 예수님이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