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서구에 위치한 화곡동교회는 관리집사 해고 및 장로 선거 등으로 여러 해 불화와 파벌 갈등을 겪은 교회였다. 11년 전 이곳에 부임한 김의식 목사는 “그 분쟁으로 교회에 큰 시련이 왔지만 그 가운데 붙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죽으면 죽으리라”(에 4:16)는 말씀이었고, 교인들도 더 단련된 믿음으로 하나되어 끝까지 인내함으로 점차 해결되었다”고 털어놓았다.
화곡동교회에 오게 된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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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의식 목사는 교수로 재직하던 중 화곡동교회와 관계를 맺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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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미국 프린스턴신학대학원과 시카고신학대학원에서 상담치유학과 가족치료학을 전공한 뒤 국내 호남신학대 상담학 교수로 3년 정도 재직한 적이 있었다. 김 목사는 “교수를 해보니 시간도 많고, 물질도 풍요로웠다. 하지만 영적으로 곤고해졌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중 신학대 동기였던 광주 서림교회 송재식 목사와 한일장신대 정장복 총장, 유학 시절 섬겼던 시카고 연합장로교회의 한 장로에게서 화곡동교회 부임 제의를 받았다. 당시 화곡동교회는 한창 분쟁이 있던 때였다. 그는 “기도를 하니 ‘편안하고 부요함을 누리기보다 십자가를 지자’는 마음의 결단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런데 초등학교 4학년 재학 중이던 딸의 동의를 구해야 했다. 그가 “십자가 길이 괜찮겠니”라고 묻자 딸은 “아빠, 목사는 고생을 각오해야 돼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김 목사는 “딸의 의젓한 대답에 바로 이곳에 왔고, 그 뒤로 고생을 진탕 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나를 쓰시려 했구나’고 느끼게 됐다. 상담치유를 전공했던 것이 이곳의 치유받아야 할 상처·분쟁 등을 해결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고, 끝까지 참고 견디니 전부 변화되고 치유되어 정말 행복하다”며 자신을 ‘행복한 목사’라고 했다.
심근경색, 죽음의 고비
한창 교회가 분쟁에 빠져 있던 당시 그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스트레스 누적으로 인한 심근경색 때문에 죽을 뻔한 일도 있었다. 숨이 탁 막히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 혼자서 죽음 직전의 고통을 겪던 순간,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제가 죽는 것은 두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가 죽으면 이 교회는 어떻게 합니까? 교회를 위해서라도 살려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그 순간 압박이 풀리면서 숨을 쉴 수 있었다. 그 후 40일 동안 기도원에 들어가 20일을 금식하면서 간구했더니 하나님께서 치료해 주셨다고.
자기 목숨보다 교회를 더 걱정하고 사랑했던 김의식 목사에게, 이제 화곡동교회는 사랑과 행복을 가져다 주는 교회로 변화했다. “우리 교회의 장점은 순박하다는 것이다. 서울 외곽지역이라 그런지 악의적이거나 계산적인 신앙이 없다. 정감이 있어서 이번 추석에도 교인들끼리 맛있는 반찬과 과일 등 작은 것이라도 서로 나눴다. 분당지역에서 사역했던 부목사의 말이 ‘이전 교회에서는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광경이었다’고 하니, 물질이 풍족하다고 해서 마음이 넉넉하지는 않은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또한 교인들이 교회 활동에 헌신적으로 참여하고 지역 봉사도 많이 나가, 주민들에게 이미지도 좋아졌다. 커다란 시련이 오히려 밑거름이 돼 커다란 부흥이 일어난 화곡동교회는, 금년 말 새 성전이 완공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김의식 목사는 “현재까지도 다 마무리되지 않은 문제와 씨름하고 있지만, 모든 시험을 이겨내 오히려 갑절의 부흥이 일어난 것 같다”고 감사해했다.
호남 출신인 그는 부교역자 청빙에 있어 지역의 벽을 허물기 위해 수도권,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출신들을 균형 있게 배분하기도 했다.
가슴에 와닿는 상담·치유 설교
김의식 목사는 자신이 추구하는 설교에 대해 “가슴에 와닿게 하길 원한다. 내 삶의 문제와 설교가 괴리되지 않도록 어루만져주는 치유설교가 내 설교 방향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처럼 함께 웃고 즐거워하며 애통해하고, 마음에 쌓인 상처를 눈물로 씻는 설교를 하길 원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그는 “설교자 자신이 치유의 영성과 영적 충만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목사는 “설교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께서 주시는 깨우침과 영감이다. 월요일마다 주일설교를 준비하는데 성령의 감동을 받으면서 준비한다”며 “놀랍게도 말씀 증거를 마친 후 교인들이 ‘어떻게 우리 가정 형편을 아셨나요?’, ‘제 삶을 꿰뚫어 보시고 말씀하시네요’라고 한다”고 전했다.
성도들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느냐는 질문에 그는 “대부분 남자 성도들은 술, 담배, 성적 타락 등의 보편적인 문제로 주님을 떠났다가, 붙들어준 아내로 인해 다시 돌아와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경우는 남편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깊어 병이 돼 버린 아내들이 말씀을 통해 치유되어, 남편을 용서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또한 사업에 실패하고 암 투병을 하던 성도가 교회로 와 기도생활을 하면서, 문제가 해결되고 병이 완쾌되는 등의 응답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신앙의 멘토들
자신을 목회의 길로 가도록 이끌어준 멘토들에 대해 그는 “아버지가 장로님, 어머니가 권사님이셔서 어릴 적부터 부모님의 신앙을 본받으며 자랐다. 현재의 인품을 만들어주셨고 삶의 기초를 되어 주셔서 내게 큰 영향을 미치신 분들”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고 문일호 목사님(예장 개혁 부총회장 역임, 전 광주신일교회 담임)의 말씀과 기도의 강한 훈련, 그리고 무엇보다 새벽제단은 내게 많은 영향을 줬다. 또 침례신학대학교에서 강교구 목사님(도화성서침례교회 원로)의 복음에 대한 열정과 눈물의 가르침도 내게는 큰 영향을 끼쳤고, 장로회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시절 목회훈련을 해주셨던 림인식 목사님(노량진 교회 원로)은 신앙의 인격과 섬김목회의 표본이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지금은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장로님들과 권사님들과 집사님들과 성도님들과 동역자들이 모두 다 나의 멘토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나의 멘토는 성령님이시다”고 힘주어 말했다.
웃음과 눈물의 목사가 된 사연
그는 자신을 “한 마디로 웃음과 눈물이 많은 목사”라고 한다. 말씀 전하면서 눈물을 잘 흘리고, 성도와 함께 웃고 울며 예수님같이 ‘섬기는 목사’가 되고 싶다고 한다. 김의식 목사의 호는 喜哀(기쁠 희, 슬플 애)다.
치유목회와 상담설교를 하고 있는 그는 교인들의 아픔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 배경에 대해 김 목사는 전도사 시절 여섯 살 배기 딸아이를 잃었던 아픔을 이야기했다. 설교 때 그 사연을 전하자 교인들이 찾아와 “목사님, 저도 큰 애를 잃었어요”, “저도 둘째를 잃었어요”, “저도 막내를 잃었어요” 하면서 위로해주러 찾아왔다. 그렇게 서로의 같은 아픔으로 눈물 흘렸던 기억이 있다.
그는 “딸아이를 보낸 지 23년이 지났다. 노량진교회 묘지에 묻었다. 하늘나라로 떠나기 사흘 전, 이상하게도 슈퍼마켓에서 파는 종합선물세트를 사달라고 보챘다. 바빠서 결국 그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다. 딸아이가 죽고 나서 얼마나 후회가 밀려왔는지 모른다”고 말하다 잠시 멈추고 눈가의 눈물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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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웃음과 눈물이 많은 목사라고 말하는 배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눈가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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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딸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해 크리스마스에 종합선물세트를 사가지고 추운 겨울날 눈 쌓인 딸아이의 묘지에 찾아가 기도했는데, 환상 중에 딸의 모습을 봤다. 내게 하는 말이 ‘아빠, 저는 괜찮아요. 주님과 함께 잘 있어요’하고 위로했다. 그 말에 그렇게 위로와 힘이 됐고, 그래서 결심했다.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맡겨진 사명에 충성을 다해야겠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처럼 오늘이 마지막 날인 듯이 살고 싶다. 그러면 욕심도 없어지고 원망과 불평도 생기지 않고 모두 사랑할 수 있다. 내가 오늘 죽는데 누굴 미워할 수 있나?”라고 말했다.
앞으로의 비전
그는 화곡동교회에 부임한 후 상담치유훈련, 부부행복동산, 아버지학교, 어머니학교, 홀로서기 세미나를 진행해 왔다. 4년간 치유훈련 프로그램들을 정착시켰고, 3년은 말씀의 양육훈련 프로그램들을 정착시켰으며, 봉사와 섬김을 실천하는 사역훈련 프로그램들을 정착시켜 목장모임을 갖게 한다. 목장에서는 목자들로 하여금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기도, 전도, 치유로 목장을 활성화시켜 현재 전체 8개 교구 약 300개의 목장이 운영되고 있다.
화곡동교회 성전 건축 후 앞으로의 변화는 세 가지로 꼽는다. 첫째, 기독교 문화의 전통을 세워 우리 삶의 미신적·유교적·세속적인 문화를 전환하는 것이다. 둘째, 사회복지·봉사를 실천해 우리가 받은 복을 주위의 고통 당하는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이다. 작년에 화곡노인복지센터와 연지노인복지센터를 인수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앞으로 종합사회복지시설을 늘릴 것이다.
셋째,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세계선교를 실현할 것이다. 김의식 목사는 “우리의 비전은 만·천·백·십의 비전이다. 만 명의 성도 출석과 천 명의 사역자 양육, 백 명의 선교사 파송, 열 개의 교회 개척이라는 설명이다. 은퇴까지 17년 남았다. 현재 출석 성도가 5000여명이다. 2000년도 부임 당시에는 2000여명이었는데 지금까지 열매 맺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앞으로의 비전도 하나님께서 맺어주실 것”이라고 밝혔다.
끝으로 어떤 교회로 만들고 싶느냐는 질문에 김의식 목사는 “행복한 교회가 되길 바란다. 주님이 행복하신 것처럼 주의 종이 먼저 행복해지면 양떼들로 모두 다 행복해진다는 심정으로 목회할 것이다. 나는 지금 사랑하는 주님과 사랑스런 양떼들로 인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목사”라고 고백했다.
화곡동교회: 서울시 강서구 화곡1동 346-46(전화 02-2601-06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