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복음주의 신앙은 19세기 중반부터 자유주의 신앙에 의해 매몰되었다.
그러다 20세기 초, 스위스의 칼 바르트(K.barth)의 로마서 주석을 시발로 복음주의는 회생되었다. 칼 바르트는 인간의 모든 문제, 세상의 고통과 탄식은 오직 하나의 답으로 귀결된다고 하였다.
"God sent Him" 하나님은 단 하나의 해답으로 '그 아들'을 보내셨다!
그런데 그는 '그 아들'을 믿어 궁극적 해답을 얻은 자의 실존은 '치열한 고뇌"라고 말하였다.
무엇으로 인한 고뇌인가!
궁극적 해답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면 모든 문제와 고민은 사라지고 평탄한 대로가 열려야 마땅하지 않은가!
그런데 무엇때문에 다시 고뇌하고, 치열하게 갈등해야 하고, 고통을 치러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믿는 자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는 두 세력으로 인함이다.
여전히 남아있는 본성(육체)의 열정과 욕망이 하나님의 영을 거스리고, 하나님의 영 또한 본성을 대적하기 때문이다.
이는 영적 전쟁이며 내적인 전쟁이다.
자아와 영의 전쟁이고, 혼과 영의 대적이며, 죄악된 본성과 거룩한 영 사이의 대치이다.
그가 진실로 거듭난 자라면 이 전쟁이 실재하고, 전쟁의 실체를 알고, 전쟁을 치르는 자이다.
대적자 없이 전쟁이 없듯이 거듭나지 않고,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데 어찌 본성과 성령이 서로 대적하는 전쟁이 있다는 말인가!
이 전쟁은 이 땅에서 사는동안 육체의 본성, 즉 옛 사람을 끌어안고 살아가기에 평생 치러야 할 전쟁이며, 신실하게 주를 따르는 성도라면 마땅히 치러야 하는 선한 싸움이다.
평생 본성(육체)와 성령 사이의 전쟁을 치르며 그리스도께 충성했던 바울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남긴 고백을 보라!
"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이 땅에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우면서 끝까지 복음을 위해 헌신했던 그에게 의로우신 재판장,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셨으리라!
그렇다.
의의 면류관은 선한 싸움을 다 마치는 날, 이 세상에서의 생을 마감하고 모든 수고를 그치는 날, 주님 품에 안기어 받는다.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선한 싸움을 다 싸우며 달려갈 길(소명)을 다 마치며, 믿음을 지켰는가!
오늘 묵상한 말씀에서 바울은 그 전쟁의 실체와 싸움의 비밀을 밝히 드러낸다.
바울은 자신에게 복음을 듣고 다른 복음을 좇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마침내 선한 싸움의 실상을 알리며, 이를 위해 십자가 복음에 착념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육체와 성령, 그리고 율법.
이것은 선한 싸움을 이해하는 핵심 요소이다.
이에 대한 성령의 통찰은 오늘도 진실히 믿고자 하는 모든 이들 ..
선한 싸움을 싸우며, 달려갈 길을 달리며, 믿음을 지키고 있는 이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거룩한 용기, 하늘의 능력을 덧입혀주고 있다.
육체는 죄악된 본성이다(sinful nature).
육체는 열정과 욕망을 동시에 갖고 있으며, 옛 사람의 실존이다.
육체(본성)의 열정은 주로 긍정적인 면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거나, 선한 일을 하는데 드려지는 에너지이다. 예컨대 하나님의 일을 "나의 힘"으로 하려는 열정이다.
육체(본성)의 욕망은 부정적인 면을 담고 있는데, 거기서 나오는 행동들은 19-21절에 언급되는 것처럼 악한 일들이다.
성령은 거듭난 자를 인도하고, 살아하게 하는 힘으로, 이는 하나님의 실존이다.
거듭나기 이전에 '우리 영'은 죽어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이 '죽은 우리 영'을 살리셨다(엡 2:1). 성령은 살아난 우리 영과 구별되는 것으로, 거듭나서 살아난 우리 영을 인도하고, 주도하고, 힘을 가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한다.
성령으로 사는 것은(16절)이나 성령의 인도하심(18절)은 하나님의 영(성령)이 거듭난 나의 영을 인도하고 이끄는 것으로 그 본질은 '하나님과 사귐'에 있다.
거듭 난 자의 싸움은 이 둘이 서로 대적하는 것이다(17절).
본성(육체)에서 나오는 열정과 욕망이 거듭난 영을 인도하는 성령의 능력을 대적한다(17절).
그러나 본성과 성령의 대적과 싸움은 쉽게 감지되지 않는다.
영적으로 깨어있을 때만 감지된다.
이 둘이 실재하는 것과 이 둘의 싸움을 감지하지 못하면 철저히 패배자로, 체념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된다.
이들은 단순히 '신앙 생활이 만만치 않구나, 힘들구나'라는 정도로 가볍게 받아들이거나,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타협하거나 체념하게 된다.
그들의 신앙은 아주 희미하고 모호하며, 복종도 열심도 없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진행하게 된다.
본성과 성령의 싸움은 신실한 신자라면 밝히 알아야 하고, 전심전력을 다하여 싸워야 할 실재하는 전쟁이다.
육체, 죄악된 본성에서 나오는 일들은 아주 분명하다(19-21절).
음행, 더러움, 음란,우상 섬김, 마술, 미움, 다툼, 질투, 화내기, 이기심, 편가르기, 분열, 시기, 술취하기, 흥청거리는 잔치들이다(쉬운성경).
육체의 행위들은 사람에 따라 그 정도와 양상을 달리하지만 누구에게라도 예외는 없다.
그런데 육체의 일들로 인한 가장 치명적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21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과 사귐에 있다. 곧 지성소의 경건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지고, 오직 하나님으로 사는 것, 이것이 이 땅에서 누리는 하나님 나라의 실제이다.
그런데 육체의 행위를 하는 본성을 처리하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과 사귐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육체의 일들을 버젓이 저지르면서, 본성을 그대로 두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이며, 스스로 속는 것이다.
나 역시, 오랫동안 그러지 않았는가!
육체에서 나오는 일들을 저지르면서,
또는 내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이 나와 동행한다고 믿었었다. 스스로 속은 것이었다.
그러나 매일의 묵상에서 하나님을 존재로 만나지 못햇다. 해치우기 QT로 일관했던 것이다.
지금도 육체의 일에서 완전히 자유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육체의 일, 본성, 옛 사람으로는결코 하나님과 사귐이 불가한 것을 알기에, 매일 십자가로 나아간다.
십자가에 내 본성, 옛 사람을 그 열정과 욕망과 함께 못박는다(24절).
그 때에 보혈을 힘입어 지성소로 들어가는 담대함이 생기고, 지성소에서 나를 반가이 맞아주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성령의 열매 또한 분명하다(22-23절).
사랑, 기쁨, 평화, 오래 참음, 자비, 착함, 성실, 온유, 절제이다(쉬운 성경).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는 이같은 원리를 금지할 법이 없다.
성령의 열매는 그리스도인이 애써서 추구해야 할 신앙의 목록이 아니다.
더구나 인위적으로, 또는 영적 훈련을 통해 형성되는 신앙의 덕목은 더더욱 아니다.
이는 성령의 인도하심, 즉 하나님의 영이 거듭난 내 영을 다스리고, 이끄실 때 자연스럽게 맺혀지는 성품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에게서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영적 기품이며, 존재의 성품이다. 하나님을 존재로 만나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에게 이같은 모습들은 피할 수 없게 나타나게 된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경험과 영광은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일부러 떠들어대는 것도 아니다. 여기 성령으로 인도함받는 진정한 신앙인의 고백은 참으로 귀하다.
"만약 내가 경험한 것이 진실된 것이라면 자연스럽게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올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그렇다. 아무도 금지할 법이 없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인들의 문제는 복음을 듣고 영혼이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거듭나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려는데 있었다.
육체(본성)의 열정과 욕망의 실체를 망각하고 육체로 율법을 지키려했기에 신앙의 괴로움을더했었다.
육체 안에 선한 것을 향한 열정이 가득하다.
그래서 내 힘으로 선하게 살려하고, 내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으려했던 것이다.
이는 무익한 괴로움을 자초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거듭난 우리 영'을 인도하는, 즉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고 대적하는 일이다.
이들은 무지속에 행했을지라도 비진리가 진리를 삼켜버리는 무도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거스르고 대적한 육체의 힘과 열정은 십자가에서만 처리된다. 다른 방법으로는 막을 길이 없다.
그리고 매 순간 육체의 힘과 열정,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가 그리스도로 사는 자이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본성과 함께 그 열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입니다"(24절).
선한 싸움은 육체와 함께 열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 싸움이다.
15가지 육체의 일들을 저지를 때마다, 저지르고 싶은 충동이 올라올 때마다 그런 내가 십자가에 죽었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잠잠히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의 고통을 감내한다.
또한 내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고자 하는 열정이 올라올 때 마다 십자가를 바라본다.
무익한 수고, 충동에 의한 하나님의 일, 수많은 잡생각속에서 결정한 일.. 그 일을 하게 한 내가 십자가에 매달렸음을 확정한다.
전쟁은 실재하며, 평생 계속된다.
오늘 아침에도 내 속의 본성과 성령의 대적으로 하루를 시작하지 않았는가!
선한 싸움을 다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다하고 믿음을 지키는 길은 오직 십자가를 붙드는 길이다.
거기서 내 옛 사람의 본성, 충동, 경향성, 열정, 욕망을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리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하나님 안에서 소명을 다한다.
이것이 비록 고단하지만 내가 가야할 진리의 길이다.
16 성령을 따라 살라 그러면 육체(본성)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게 될 것입니다.
18 성령께서 이끄시는대로 살면, 율법 아래 있지 않을 것입니다.
25 만일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면 또한 성령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보조를 맞추는 것이 당연합니다(NIV 영어성경).
그리할 때, 내 안에서 맺혀지는 성령의 열매, 하나님이 존재로 드러나고, 하나님의 성품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 이것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이치이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묵상 기도
아버지.
나는 거듭난 자입니다. 내 영이 산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육체, 본성에서 올라오는 생각들, 내 방법, 내 계획들이 무수합니다.
저는 본성과 성령의 대적, 이 둘의 전쟁에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이 아침, 내 안에 전쟁이 실재함을 다시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오직 십자가.
십자가만이 저의 본성을 처리하는 곳입니다.
제게서 나오는 모든 것들, 설령 선한 것이라도 이는 십자가로 가야합니다.
이것을 안고, 결코 지성소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귐도 거짓입니다.
다시 한번 십자가에서 나의 본성, 열정, 욕망은 다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내게 속한 모든 것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이제 내게 사는 이는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삶에 전심을 다하여 나 자신을 바치나이다.
하나님과 사귐안에 더욱 착념하게 하소서.
그 열매를 막을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하고, 알리고, 선전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과 사귐안에 있는 내 존재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같은 법을 금지할 수 없다니, 위로가 넘칩니다.
더욱 신실하게 하나님안에서 살게 하시고,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이 드러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