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性)의 기준이 옮겨지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과거에는 출생시에 부여되는 생물학적 고유의 성(sex)을 기준으로 남자와 여자의 성별이 뚜렷했으나, 지금은 사회적인 성(gender)을 기준으로 하여 성의 선택이 가능한 엄청난 혁명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성애자들이 커밍아웃하여 거리로 나오고 있고, 성형의학의 발달로 인해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이 성별을 고치고 있다. 해외에서는 이들이 마음껏 결혼을 해도 법적으로 보호를 받고 있으며, 미국의 한 학교에서는 자신이 여자라고 인식하는 남학생이 여자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이다.
이 시대는 성의 생물학적 기준은 부정되고 있고, 개개인마다 다양하게 느껴지고 끌리는 감정이 바로 자신의 존재감이라고 정의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 존재감을 근거로 자기에게 부여된 생물학적 성만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존재감은 상대적인 것이지만, 자신만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타인으로부터 침해받을 수 없는 절대적인 자유와 인권으로서 보호를 받기를 원하고 있다. 법적인 투쟁을 불사하면서까지 성의 주관성에 절대성의 옷을 입히려 하고 있다. 누가 봐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고유한 성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 전면 부인되고,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 자체를 붕괴시키고 있다. 오로지 집중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채우는 일이며, 사회 공동체 안에서 개개인이 가지는 책임은 무시한 채,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고, 오직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그른 것이 되어 가고 있다.
2007년 3월, 국제인권법 적용을 위해 '성적지향'에 관한 요그야카르타 원칙(Yogyakarta Principles)이 채택되었는데,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성적지향은 감정, 애정 및 성적매력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이다. 감정, 애정, 성적 매력이 오는 것이 나의 존재감을 말해주고, 이 존재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성(sex)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것이며, 인권으로서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적지향을 보통 이성애, 동성애, 양성애 정도의 '관계'로서 간단히 정의하고 있지만, 생물학적인 성이 부정되고 감정에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에, 사실 이보다 훨씬 더 다양한 관계가 발생된다. 다양한 종류의 감정, 애정, 성적 매력에 따라서 관계가 다양하게 정의되는데, 예를 들어, 성적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무성애, 즉 중성적인 섹슈얼리티도 포함하고 있다. 이렇게 되다보니 '이성애'라는 표현도 성적지향 중의 하나로서 간주되어지고, 결국 이성애나 동성애나 양성애나 동등한 성적지향이라고 정의를 하게 되는 함정에 빠져들게 된다.
그러나 이성애와 동성애는 절대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성애는 남자와 여자의 생물학적인 성이 기준이고, 이성애가 아닌 다른 많은 성적지향들은 생물학적인 성을 부정하고 감정적, 애정적, 성적 매력을 기준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성애와 그 밖의 성적지향과는 대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에서 이것을 같은 성적지향의 개념으로 인정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이다. 만약 이것을 동등한 개념으로 인정하게 되면, 법의 대상은 당연히 이성애자인 대다수의 국민이 된다.
성(sex)을 부정한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이는 생명윤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부여 받은 성(性)은 선택할 수 없으며 부정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가면서도 성을 선택할 수 없으며, 부정한다 해도 부정 자체가 안 되는 독립적인 부분이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런 개념에 동의한다면 이것은 자기 자신의 성을 스스로 창조하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불가능한 일을 개인의 자유로 인정해 주고, 법적으로 보호를 해준다면 그야말로 법이 성을 창조해 주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성적지향'의 개념은 법적으로 절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며 사회적으로도 일반화되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글ㅣ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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