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보내고 귀향한다.
그는 가나안 땅에 입성했으나 그가 서원한 벧엘로 가지 않고 세겜에 정착한다.
세겜의 정착된 도시생활은 고단한 유목민이 볼 때 분명 매력적이다.
야곱은 그곳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예배한다(엘엘로헤 이스라엘).
하지만 자의적 신앙은 징계와 심판을 면치 못한다.
세겜에서 외동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아들들이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감행한다.
야곱 일행은 급기야 세겜을 떠나고 대적자들이 그들을 추적한다.
심판의 상황은 이처럼 참담하나 실상은 그의 영혼을 깨우시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
야곱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한 야곱에게 먼저 찾아오시고 말씀하신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정(自淨) 의식을 행한다.
이에 추적자들이 물러가고 야곱은 벧엘로 올라가 제단을 쌓는다.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하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주신다.
그리고 그의 후손이 번성할 것을 말씀하시고, 야곱은 돌기둥을 세워 이를 기념한다.
야곱은 길을 떠나 아버지 이삭이 있는 고향 헤브론을 향하여 간다.
벧엘에서 남쪽 방향으로 이동하여 에브랏에 이르기 전에 라헬이 해산한다.
그녀가 난산 중에 죽어 가는데 산파가 그녀에게 힘을 불어 넣어준다.
"두려워하지 말아요. 또 득남합니다"(17절).
하지만 라헬은 죽음에 이르고 "또 득남"한 아들의 이름을 '벤-오니'(베노니)라고 부른다.
베노니는 '내 고통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한편 야곱은 평생 사랑해온 아내의 죽음 앞에서 "또 득남"한 아들의 이름을 '벤-자민'(베냐민)으로 바꾼다.
베냐민은 '내 오른쪽(행운의) 향방을 여는 아들'이라는 뜻이다.
야곱은 라헬을 베들레헴 길에 장사하고 그곳에 묘비를 세운다(19-20절).
이스라엘로 불리는 야곱은 슬픔을 추스르고 다시 길을 가다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친다.
그 곳에서 레아가 낳은 장자 르우벤이 그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일이 생긴다(22절).
이스라엘은 임종의 자리에서 이 사실을 기억하고 르우벤을 폄하한다(49:4).
야곱의 아들들은 르우벤 외에 열한아들, 모두 열두 명이다(23-26절).
야곱은 마침내 헤브론에 도착하였다.
그 즈음 이삭은 나이가 180세가 되어 기운이 다하여 죽고 자기 열조에게 돌아간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다(29절).
라헬의 비극적인 출산으로 베노니가 태어났다.
그는 어미의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야 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은 그의 이름을 베냐민으로 개명한다.
이로써 야곱 생애의 한 전환에 관한 신학적 해석의 길을 열어준다.
'야곱-라헬'의 후손이 주축을 이룬 이스라엘의 역사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라헬의 죽음이 베노니를 탄생시켰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이다.
라헬은 '또 득남'의 꿈을 이룬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또 득남'은 라헬이 첫아들을 낳고 지은 이름(요셉 - 또 득남)이다.
그녀는 한 아들로 족하지 않았다. '또 득남'(요셉)이 평생소원이자, 행복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것만 이루어지면 여한이 없는 인생의 조건이었다.
그런데 그 결말은 고통, 베노니였다.
한편 야곱 역시 세겜의 고비를 넘겼고 벧엘에서 축복은 갱신되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더불어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살 것으로 믿었다.
인간의 관점으로 보면 하나님이 축복하셨기 때문에 평탄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 첫 사건이 사랑하는 라헬이 죽은 것, 곧 인생의 조건, 행복의 조건이 제거된 것이다.
어쩌면 라헬에게 베노니는 야곱에게도 베노니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이스라엘로 개명된 야곱은 음울한 죽음을 희망의 서막으로 반전시킨다.
이제 아이의 이름은 베노니가 아니라 베냐민이다! 고통의 아들이 희망을 여는 아들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야곱은 라헬의 무덤 앞에 기념비적 비석을 세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라헬의 통곡소리는 음울한 그림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새로운 소망으로 바꾸신다.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에 라헬의 후손인 에브라임 산지에 속한 라마 사람들이 앗수르에 포로로 끌려갔다(BC 720년경).
어머니들은 자기의 아들과 딸들이 사로잡혀 감으로써 통곡하였다.
그들의 통곡소리는 라헬이 그녀의 무덤에서 일어나 그들과 함께 통곡하는 것이라고 시적으로 묘사된다.
그로부터 150년후 예레미야 선지자는 유다 사람들과 함께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갔다(렘 40:1).
라마는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는 길목에 위치한다.
포로로 끌려가는 유다 백성들(에브라임)을 보고 라헬이 무덤에서 일어나 통곡하듯 슬퍼한다(렘 31:15이하).
그런데 최대의 슬픔 뒤에 최후의 소망이 선포된다. 베노니가 베냐민으로 바뀌는 반전이다!
울지 말라, 눈물을 흘리지 말라, 최후의 소망이 있다, 너의 자녀가 돌아올 것이다!(렘 31:17).
지금 죽은 자식, 지금 잃어버린 자식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에브라임은 지금 잃어버리고, 지금 버림받은 하나님의 자식들이다.
그런데 에브라임이 탄식하며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원하자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신다.
역시 라헬의 통곡소리는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인해 그쳐질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런데 그가 세상에 오실 때에도 라헬의 통곡소리가 들렸다(마 2:18).
예레미야를 통해 예언된 라헬의 통곡소리가 성취된 것이다.
이는 아기 예수의 탄생으로 인해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중 두 살 아래의 아이들이 살해당함으로 인한 어머니들의 통곡소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심판주로 오셨다. 그로 인해 라헬의 통곡소리가 들린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다. 심판을 통해 의를 세우는 구원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심판을 합당하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탄식하는 자에게 애끓는 사랑으로 구원하신다.
그를 아들의 죽음과 무덤을 지나 생명에 이르게 하신다. 아버지 집으로 인도하신다.
옛 사람이 죽고 무덤에 들어가는 통곡소리 끝에 새 생명의 삶이 시작된다.
♦묵상 기도
아버지여...
내 인생이 무엇입니까!
'또 득남'을 구하며 산 라헬의 인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하나를 이루면 둘을 원하고 둘을 이루면 셋을 집착한 인생이었습니다.
다오 다오 하는 거머리 같은 인생을 살았습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러하였습니다.
오, 아버지...
저를 심판하심이 마땅합니다.
라헬의 통곡소리가 임하고 스스로 탄식하며 회개하였습니다.
그마저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였습니다.
심판은 의를 세우는 구원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제가 당한 수치와 고통은 아들의 죽음과 무덤에 들어가는 은혜였습니다.
라헬의 인생이 죽고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새 생명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의 세력 앞에 무력한 자입니다.
어찌 하루라도 감당할 수 있으리요!
선한 일을 할 때마다 기회를 타서 나를 속이는 죄의 세력을 보나이다.
다시 나를 드러내고 내 힘을 과시하려는 욕망을 보나이다.
오, 주여! 이 종을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주소서.
영원히 멸시와 천대의 자리, 티끌과 재 가운데 있어야 하겠나이다.
나는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으니 주께서 행하옵소서.
당신께서 소원을 두고 행하소서. 그것만이 참이옵니다. 영원한 것이옵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