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모든 종교는 저마다 궁극적 진리가 있다. 이들 종교에서 진리의 범주는 지식, 깨달음, 수행(실천)이다. 그런데 기독교 진리는 이들 종교와 근본을 달리 한다. 기독교 진리는 지식, 깨달음, 수행이 아닌 '존재'에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진리의 핵심인 복음은 배우고 실천하는 영역을 넘어 '하나님의 아들이 믿는 자 속에 나타나는 것'(갈 1:16), 곧 존재에 있는 것이다.
기독교 진리는 아들이며 존재이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아들(존재)가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요 8:31,32,36).
그래서 계시된 복음은 지식이 아닌, 아들의 현존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이렇게 아들의 존재가 믿는 자안에 드러나는 '계시된 복음'을 전했다(1:11-12). 그런데 그 이후 할례를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을 전한 율법주의자들이 이들에게 들어왔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
율법주의는 '존재'가 아닌 '행위'에 진리의 기반을 둔다.
즉,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는 신념이며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의 존재만이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있다는 진리에 역행하는 것이며, 스스로 속는 것이고, 많은 괴로움을 부르는 종교행위이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율법주의자의 실상은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들을 위함이 그 목적이었다. 바울은 진리 안에서 그들 안에 있는 인간의 원초적 야망을 꿰뚫어보고 있다.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17절).
그렇다.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는 율법주의는 궁극적으로 "자기"를 지향한다.
율법주의 신앙의 성과는 그로 인해 자기가 드러나고, 자기가 주목받고, 자기가 영광받게 한다.
반대로 율법주의 신앙의 좌절은 그로 인해 괴로움과 절망, 자기 연민과 침체에 빠지게 한다.
율법주의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도 자기를 위함이다. 이들은 하나님을 위한 선한 뜻이 아닌, 갈라디아 성도들이 '자기들을 위해' 열심을 내도록 먼저 열심을 내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나 사역에 있어 열심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아닌, 그 중심을 통해 진위(참과 거짓)이 가리어 진다.
나는 없고 하나님만을 위한 목적은 선한 뜻이다. 이는 참된 열심이다.
그러나 외적으로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지만 궁극적으로 '자기'를 겨냥하는 것은 악한 뜻이다. 이는 거짓된 열심이다.
우리중 누구라도 십자가 복음에 착념하지 않으면 율법주의 신앙과 거기서 나오는 거짓 열심에 사로잡힌다.
결국 십자가 없는 신앙과 사역은 자기 중심의 신앙과 사역으로 귀결된다.
십자가 중심의 신앙과 사역은 자기가 드러나고, 자기가 주목받고, 자기를 위한 동기를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한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기'가 다시 들춰지는 것은 마치 무덤속의 시체를 꺼내는 것처럼 추악하고 패괴한 일이다. 자기 의는 다 더러운 옷과 같은 것 아닌가!(사 64:6).
율법주의자들, 그리고 갈라디아 교인들, 그들은 다름 아닌 오늘 우리들이며, 나의 모습이기도 한다.
이 시대 많은 신자들이 십자가를 알고 있다. 십자가를 자랑하고, 십자가를 노래하고, 십자가를 증거하고, 더 나아가 자기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시 나를 의식하고, 나를 주목하고, 나를 중심에 놓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지금 이 시대 교회와 성도들 안에는 자기를 주목하는 신율법주의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 이는 복음에 도전한 견고한 진이 아닐 수 없다. 상당수 신자들이 십자가 복음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정작 신앙 생활은 자기를 고양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데 몰입되어 있지 않은가!
십자가 복음을 계시로 깨닫고, 오직 십자가 중심으로 살며 사역한 바울 사도는 출산하는 어미의 고통으로 이들이 복음의 진리로 돌아오기를 호소하고 있다.
바울이 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바울은 이들이 시험에 들만큼 육체에 문제를 안고 있었다.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닌, 사람들도 감당하지 못할만큼 장애가 있었다. 이는 시력장애로 추측된다(15절; 할수만 있다면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니라).
우리도 소경이 나의 목사라고 생각해보라! 얼마든지 시험들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고 바울을 극진히 섬겼다. 하나님의 천사처럼, 예수 그리스도처럼 대했던 것이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이들의 아름답고 친밀한 교제가 있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인들은 자기 중심의 율법주의를 추종하면서, 바울에게 등을 돌리고, 사람을 높이고, 사람을 따르는 길에 서게 된다.
바울은 아픔속에서 호소한다.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여러분과 원수가 되었습니까"(16절, 쉬운성경).
한 때 눈이라도 빼어줄 만큼 바울을 극진히 섬겼던 이들, 그러나 진리로 인해 원수가 되고 만다. 이 또한 복음 전도자들 겪는 현실이다. 이는 세대를 넘어 오늘도 진리를 전하는 자들이 겪는 실제 상황이다.
이 아침, 진리 안에서 복음 전도자들이 처하는 실존은 내게 큰 위로를 준다.
지금 이 시간, 내가 진리에 착념함으로 나와 등을 진 이들이 떠오른다.
이들은 한 때 나를 통해 진리의 복음을 깨닫고 내게 눈이라도 빼어줄만큼 나를 극전히 대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드러나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다한 바울의 참된 열심이 나를 감화시킨다. 불만이나 섭섭함이 아닌, 복음 안에 있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기를 기도드린다.
"세상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믿음을 간직한 자는 언제나 실패자로 남는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성공한 자들이다"(스탠리 죤스).
진리 안에서 참된 열심으로 참된 성공을 꿈꾼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과 그들을 부추킨 율법주의자들.
그들의 모습은 나의 숨은 실상임을 정직히 고백한다.
자기를 주목하고, 자기를 위하게 하는 나의 옛 사람은 매 순간 나를 청구한다.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음을 알고, 전하면서도, 나의 옛 사람은 열심내는 목적이 나를 향하게 만든다.
사역의 열매를 내가 향유하며, 그 열매가 연구소를 위한 것이 되기를 은근히 바라지 않았는가!
만일 그렇다면 열심내는 목적이 자신을 위한 율법주의자들과 내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아.. 주님, 종이 그러했나이다. 불쌍히 여기소서!"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시다.
나의 숨은 마음, 가능성 있는 죄악까지 들추어내신다.
내 안에 나를 위하고, 연구소를 위해 사람들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음을 다시 보게 하신다.
자복하고 통회하게 하신다.
내 영혼, 찔림을 당하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이 굿뉴스사역연구소를 향한 순결한 기대를 알게 하셔 감사가 넘친다.
하나님의 순결함에 부응하여 나의 모든 욕망을 기꺼이 십자가에 못박는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영혼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나기까지 해산의 수고를 다하며,
나는 철저히 실패자로 남고 그리스도만 드러나는 사역이 되기를 간구한다.
굿뉴스사역연구소는 철저히 쇠하고, 하나님의 나라만 승하기를 간절히 구한다.
♦묵상 기도
아버지..
불충하고 탐심에 가득찬 종을 불쌍히 보소서.
심판을 통해 세워진 연구소.. 여기에 저의 탐심이 가득했나이다.
얼마든지 저의 열심이 또다시 저를 위한 열심이 될 수 있음을 깨닫고 통회합니다.
묵상캠프 통해 하나님이 주신 은혜들을 우리 연구소가 취하지 않게 하소서.
연구소 사역을 위해 이전에 몸담았던 기관들을 기대하는 마음,
티끌만큼이라도 있었다면 꺼내서 십자가에 진멸하소서.
해산의 수고를 다하되,
나의 열심이 나를 위한 것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와 연구소는 쇠하고, 오직 주님과 하나님 나라만이 승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