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학강좌] 선교로 보는 현대교회사(5)

오피니언·칼럼
편집부 기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 부총장 이정숙 교수

실제적으로 선교가 집중적으로 많이 된 시기는 17세기 후반 경건주의, 18세기에 가서 아주 더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경건주의를 통해서이다.

루터교가 너무 이것 저것 거치면서 딱딱해지고 예배도 옛날 가톨릭교회와 별로 다르지 않게 딱딱해졌다. 맨날 교리논쟁하고 이러니 교회에 가면 재미가 없었다. 너무 심각한 장로회 교회 가서 예배를 보면 좀 재미가 없다. 솔직히. 너무 엄숙하긴 한데 '성령님께서 여기도 살아 움직이실까' 이 느낌이 조금 적다. 그래서 순복음교회 계통에 가면 좀 신은 난다. 그런데 너무 경건치 않은 것 같아서 좀 불안하고 그래서 둘이 섞인 것이 있으면 좋겠다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평신도들은 솔직히. 경건주의가 나올 때 여기가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경건주의자들은 개인의 회심을 중요시하고 살아있는 예배를 중요시하고 교리논쟁보다는 성경공부를 중요시한다. 지금 우리 복음주의 운동과 아주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경건주의가 스페너(Philip Jakob Spener)라든가 프랑케(August Herman Francke),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시작됐는데 진짜 경건주의가 힘을 받게 한 사람은 진젠도르프 백작(Nicholas Ludwig von Zinzendorf)이다. 이 진젠도르프 백작은 경건주의의 정신을 잘 알렸을 뿐만 아니라 경건주의를 가지고 선교를 했다. 그래서 엄청난 선교사가 됐다.

마지막에 이 진젠도르프가 세상을 떠난 1760년까지 파송된 모라비안 선교사는 226명이었다. 여기서 모라비안이라는건 지금의 체코공화국인데 그 지역이 모라비안이다. 독일의 동북부쪽으로, 여기가 개혁에 관해서 전통 있는 지방이다. 그 지역에 모라비안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다. 이들 모라비안 사람들을 통해서 선교를 많이 해서 이 시기에 226명의 선교사를 냈고 1930년까지 선교사가 3000명에 이르렀다. 그때 교인수와 선교사의 수는 12대 1이었다. 이것 굉장한 것이다.

모라비안한테 영향을 받은 사람이 그 유명한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리 형제이다. 존 웨슬리(John Wesley)와 찰스 웨슬리. 특별히 존 웨슬리는 지금의 플로리다 지방으로 영국성공회의 선교사로 간다. 이 사람은 그때는 선교사로서 별로 확신이 없었다. 뻔한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다가 폭풍우를 만나서 자기는 무서워죽겠는데 어떤 그룹의 사람들의 폭풍우가 치는 배 안에서 찬송을 하면서 기뻐하면서 있는 것이다. '저 사람들 미쳤나. 어떤 신앙을 가졌기에 이런 상황에서도 찬송하면서 갈 수 있는가' 그러고 보니까 그 사람들이 모라비안들이었다. 존 웨슬레가 그 사람들한테 굉장히 충격을 받고 모라비안 신앙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런데 플로리다에서 선교를 제대로 못 하고 영국으로 돌아온다. 영국으로 돌아와서 이 사람이 올더스케이트(Aldersgate Street)라는 유명한 회심사건을 통해서 변화된다. 그리고 그 변화된 웨슬리가 감리교를 시작한다. 이 경건주의가 이렇게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엄청난 선교를 하게 된다.

진젠도르프가 늘 하던 말이 있는데 "나는 한 가지의 정열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요. 그 분뿐이다"는 이런 고백이다. 이 고백을 하면서 진젠도르프는 선교에 대부의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 진젠도르프 선교에서 또 하나 특이한 것이 뭐냐하면 평신도 선교사이다. 전문 목회자 선교가 아니라 평신도가 선교를 하고 자비량 선교를 한다. 이때 벌써 텐트메이킹 선교, 그 개념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바울이 그랬으니 어떤 의미에서는 특별하지 않을 수도 있다.

18세기가 됐을 때는 소위 '진젠도르프 경건주의의 선교학'을 통해 이미 현대선교가 잘 시작되고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현대선교의 아버지를 진젠도르프 백작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현대선교의 아버지'는 윌리엄 캐리라고 한다.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학교부총장 #이정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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