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가나안으로 귀향한 야곱은 세겜에 정착한다.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러나 이곳은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그가 서원한 곳 벧엘이 아니다.
그는 세겜이 아니라 벧엘로 가야만 했다. 자의적 신앙의 결말은 참혹하였다.
외동딸 디나가 세겜의 영주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당했다.
디나의 오라비들은 복수를 감행한다.
시므이와 레위가 주동하여 하나님의 언약 표징인 할례를 이용하여 세겜의 남자들을 무참히 도륙한다.
야곱은 두 아들 시므이와 레위를 질책하나 그들은 누이를 강간한 그들에게 응징한 것이라고 맞선다.
피는 피를 부르고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 복수자들이 야곱일행을 추적해온다.
야곱은 위경에 빠지고 절망한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시고 말씀하신다.
벧엘로 올라가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한 때 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으라는 것이다(1절).
곤경에 처한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야곱을 찾으시고 말씀하신다.
먼저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 오직 은혜이다!
새로운 제의를 향한 출발은 항상 과거의 불경스러운 것을 '버리는 행위', 곧 자정(自淨)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야곱은 집안사람들과 및 자기와 함께 한 사람들에게 자정 의식을 요구한다.
그들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스스로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는 것이다(2절).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 환난 날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제단을 쌓자고 말한다(3절).
이에 야곱과 함께 한 사람들은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가져온다(4절).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부터 훔쳐온 '드라빔'(31:19)도 여기에 포함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야곱은 그들이 가져온 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떠난다.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을 크게 두렵게 하셨다(5절).
이에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물러가고 야곱 일행은 벧엘에 도착하였다(6절).
야곱이 벧엘에서 제단을 쌓고 그 곳 이름을 '엘벧엘'(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고 칭하였다(7절).
이는 그가 형 에서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야곱은 다시 벧엘로 돌아왔고 그곳에서 세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리브가의 유모 드보라가 죽는다(8절).
성경은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의 죽음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여기에서 지극히 나이 많은 리브가의 유모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생뚱맞게 들리나, 야곱의 긴 여행의 마무리 부분임을 증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벧엘은 리브가의 유모와 이삭의 죽음을 슬퍼했던 전승이 보존된 지역으로 보인다.
리브가의 유모가 묻힌 곳의 나무 이름은 '알론바굿'으로 눈물의 상수리나무를 의미한다(8절).
둘째 하나님이 후손의 약속과 땅의 을 갱신하신다(9-13절).
약속의 갱신은 야곱으로부터 '이스라엘'로의 개명(改名)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10절).
그의 후손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에 의해 야곱의 깨어진 허리로부터 나오게 된다.
깨어진 허리, 생식능력이 있는 자리가 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허리에서 왕들을 비롯한 많은 후손들이 나온 것이다(11절).
그리고 아브라함과 이삭을 통해서 주신 땅을 약속받는다(12절).
하나님이 그와 말씀하시던 곳에서 그를 떠나 올라가신다(13절).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과 기름을 붓는다(14절).
그리고 그 곳 이름을 벧엘이라고 부른다(15절).
벧엘, '하나님의 집'은 창세전 영원의 모상(模像)이다
창세전 영원의 세계에서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은 과연 영원의 하나님,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시다.
창세전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다(요 1:14).
그는 창세전 아버지 품속에 있던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요 1:18).
그가 나타나시기까지 하나님의 집은 공간적 의미로 나타났는데 이는 그림자, 곧 모형이다.
영원에서 오신 그리스도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셔서 그를 믿는 자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신다.
이제 '하나님의 집'은 '아버지 집'으로 완성되었으며 이는 영원으로써 더 이상 공간적 의미가 아니라 시간적 의미를 가진다,
이는 하나님의 시간, 곧 카이로스가 인간의 시간, 크로노스에 틈입하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영원한 현재'(the Eternal Now)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 안에 실재하는 영원한 현재가 곧 아버지 집인 것이다.
수가성 여인은 선지자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배의 처소를 물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 4:20).
여인은 예배의 처소와 관련하여 '특정한 공간'에 대해 물었다.
이는 신앙의 전통과 유산으로 파악된 '하나님의 집' 또는 '아버지 집'에 대한 물음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특정한 공간이 아닌 '때'로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 4:21).
하늘에서 오신 인자는 믿는 자를 하늘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하늘에서 살게 하신다.
예배할 '때'는 카이로스가 크로노스에 현재하는 영원의 실재이다.
영과 진리의 예배는 카이로스(영원)가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실재인 것이다.
'영원이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 삶 전체를 믿음과 행동의 기적으로 변화시키는 경험이 있다.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심오하고 영광으로 가득한 내적인 경험으로서 모든 창조 세계를 위한 관심의 뿌리요, 사회적 노력의 참된 기초이다. 이 내적인 삶과 외적 관심은 완전히 하나이며 가능하다면 동시에 묘사되어야 한다'(토마스 켈리, 영원한 현재).
'포기된 과거와 미지의 미래 사이에 이 거룩한 현재가 위치한다. 이 현재 안에 <하나님의 거처>(하나님의 집)가 있으므로 현재의 부피는 우주적인 크기로 확대된다. 결국 우리는 현재 안에서 평안을 느낀다... 유한한 시간 속의 현재는 영원한 현재의 흐름 속에 있으며, 영원한 현재 안에서 그 가치가 새롭게 평가된다'(영원한 현재, 85p).
모든 시대 언약 백성은 야곱처럼 아버지 집을 향해 가야 한다.
그것은 야곱의 언명대로 자정의식을 치러야 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자정(自淨) 의식이다.
모든 우상을 버리고 그의 보혈을 힘입어 영혼을 정결하게 한다.
그의 죽음과 무덤에 연합되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다(갈 3:27).
옛 사람에 속한 모든 것들을 주의 무덤에 묻어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앙모한다.
아버지 집의 아버지... 그는 한 분 하나님이시며 만유 위에 계시다.
만물에 속한 것을 주시기도 하시며 가져가기도 하신다.
그러나 아버지 집의 아버지 안에 거할 때 영원이 현재가 되며 그가 누리는 안식과 평안은 완전하다.
그는 아버지 품 속에 있으며 안식과 평안은 아버지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묵상 기도
아버지여...
지치고 곤한 영혼, 병들고 약한 몸, 이대로 당신께 나아갑니다.
종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지켜 주소서.
내게 생명의 길을 보이셨으니 죽을지언정 그리로 달려가나이다.
이는 주의 인자가 내 생명보다 귀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나는 곤고하나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나이다.
오직 당신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먼저 말씀하시고 먼저 손을 내미십니다.
자격 없는 종이오나, 아들의 공로 의지하여 자정(自淨)하고 나아갑니다.
내 영혼을 정결하게 하시고, 영원한 언약을 갱신하여 주소서.
오늘 주께서 오시는 날로 믿고 주의 신부로 단장하게 하소서.
아버지여...
영원을 현재로 사는 부요함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당신의 시간이 유한한 시간, 물리적인 시간에 들어오니 이곳에 천국입니다.
당신이 오시는 때가 당신의 집이요, 당신 자신이옵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지 당신의 집에서 당신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이는 만물 가운데에서 행동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음입니다.
주여 나를 당신의 품에 두소서. 나를 감추시고 당신의 얼굴빛을 비추소서.
거기에 참 안식과 평안이 있나이다.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나이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