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주해 묵상] 영원에 무지하여 땅에 속하여 '부끄러운 짓'을 하던 자여!

본문: 창 34:1-17

♦오늘의 말씀

야곱이 가나안을 떠날 때 하나님은 벧엘에서 그를 만났다.
그를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며 그 때까지 함께 하시며 보호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이에 대해 야곱은 하나님이 그를 돌아오게 하시면 '벧엘'에서 세운 기둥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라고 서원하였다(28:20-22).
더불어 그가 다시 돌아올 때 벧엘에서 하나님이 주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하였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신대로 이루셨다.
지팡이 하나로 요단을 건넌 야곱은 20년 만에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벧엘이 아니라 세겜에 장막을 짓고 밭을 사고 정착한다.
무엇보다 그곳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명명한다.

야곱이 레아에게서 낳은 외동 딸, 디나가 그 땅의 딸들을 보러 나갔다(1절).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는 유목민 여성에게 안정된 정착민의 생활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도시의 정착생활은 가축 떼를 치는 모든 유목민에게 분명 매력이었다.

그런데 디나는 그곳 세겜의 통치자인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강간을 당한다(2절).
뿐만 아니라 세겜은 그녀를 깊이 사랑하여 그녀를 말로 위로하고 그의 아버지 하몰에게 아내로 받아줄 것을 요청한다(3-4절).
야곱은 그 소식을 들었으나 자기의 아들들이 목축하여 돌아오기까지 잠잠한다(5절).

세겜의 아버지 하몰이 야곱에게 나아와 세겜과 디나의 결혼을 요청한다(8절).
그 대신 이후로 야곱의 사람들과 세겜 사람들 사이에 일반적인 혼인관계가 시작되도록 하자고 제안한다(9절).
더불어 야곱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의 영토에 정착할 것을 제안한다(10절).
정착한다는 것은 가나안 유목민이 언제나 고대하던 크나큰 특권이다.

여기에 세겜이 가세한다.
그는 상당히 격정적으로 신부의 몸값을 개의치 않고 원하는 대로 주겠노라고 한다(11절).
디나만 아내로 주면 아무리 큰 혼수나 예물을 청할지라도 다 주겠다는 것이다(12절).

한편 이 일에 야곱은 나서지 않고 목축에서 돌아온 그의 아들들이 주도적으로 협상에 개입한다.
야곱의 아들들은 디나의 소식을 듣고 매우 근심하고 분노하였다.
그것은 세겜이 야곱의 딸을 강간하여 이스라엘에게 부끄러운 일, 곧 행하지 못할 일을 행하였기 때문이다(7절).

야곱의 아들들이 격분하여 말한 '부끄러운 짓'(히, 너발라)은 종교제의적 배경을 가진 말이다.
이것은 심각한 성적 부패를 표현한 어투로, 하나님 앞에서 제의 공동체 전체를 범죄하게 하는 신성모독과 관련한 죄악이다(삿 19:23-24, 20:6).

그들은 하몰과 세겜의 제안에 대해 '속여' 대답한다(13절).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들과의 결혼을 승낙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할례를 요구한다(14-15절).
만일 세겜 사람들이 할례를 행하면 서로 통혼하며 디나 또한 세겜의 아내로 주겠다는 것이다(16절).
그렇지 아니하면 디나를 데리고 가겠다고 말한다(17절>.

야곱의 아들들이 속여 대답한 저의는 분명하다.
그들이 할례를 행하는 동안 모두 살육하고자 함이다(25-26절).
이들은 미리 복수할 것을 생각하고 만일 할례를 행하지 아니하면 디나를 데려오겠다고 말함으로써 제시된 조건인 할례를 받아들이도록 겁박하고 있는 것이다.

심히 '부끄러운 짓'의 발단은 야곱 자신에게 있다.
그는 목축하는 유목민으로서 처음 정착지인 세겜에 매료되었다.
그는 분명 벧엘로 돌아갔어야 하나, 세겜에 정착함으로써 '부끄러운 짓'을 자초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집' 벧엘로 돌아갔어야 하나, '세상의 집' 세겜에 거하였던 것이다.

야곱으로 인한 부끄러운 짓은 모든 시대에 재발되는 사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집에 거해야 할 자가 세상의 집에 거함으로써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시어 믿는 자를 '아버지 집'으로 데려가신다.
아버지 집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써 실현되는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요 14:20).

아버지 집은 창세전 영원의 세계요, 하나님의 나라이다.
창세전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은 하나님이시다(요 1: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는데(요 1:14), 이는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신 것이다(요 1:18).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계신 성자는 하나님 '품속에' 거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것은 바로 그 아버지 집, 창세전 그가 아버지와 함께 하셨던 영광을 우리로 하여금 보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요 17:24).

영생의 본질은 창세전부터 함께 해 오신 아버지와 아들과의 사귐이다(요 17:3).
영생을 가진 자의 사귐은 아버지와 아들과 더불어 사귐이며, 이로써 하늘의 기쁨이 완성된다(요일 1:3-4).
이것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실제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다.

만일 성도의 삶에서 아버지 집을 망실하면 그는 결국 세상의 거주지를 연모한다.
야곱이 하나님의 집 벧엘을 망실하고 세상의 도시요 정착지인 세겜을 연모하듯 말이다.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요,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 부끄러운 것에 있다(빌 3:19).

그러나 아버지 집에서 영원을 현재로 사는 자는 하늘의 시민권을 자랑하는 자이다.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빌 3:20).
주 그리스도가 오실 때 그와 같이 되는 것을 산 소망으로 여긴다(요일 3:2-3).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롬 5:2-3).
그의 인내는 그리스도를 닮는 성품을 낳고, 이로써 결코 부끄럽지 않는 소망을 바라본다(롬 5:4-5).

♦묵상 기도

아버지...
복음을 안다고 했으나 영생에 무지하고 영원에 무지했습니다.
창세전부터 존재해온 아버지 집에 무지하였습니다.
아버지 집을 죽어서 가는 천국정도로 알았습니다.
심히 부끄러운 짓을 서슴없이 행하는 자였습니다.
그것은 땅의 일에 치심하고 땅의 일을 설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
땅의 일을 심판하심은 은혜중의 은혜였습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의 복음에 연합되고 생명을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영은 삼위 하나님과의 연합과 사귐으로 이끄셨습니다.
창세전 아들이 아버지 품속에서 누렸던 영광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니 모든 환난 중에도 즐거워합니다.
그로 인해 인내할 수 있으며 인내는 아들의 성품으로 빚어줍니다.
이것은 영원히 살아있는 소망, 부끄럽지 않는 소망입니다.
장차 아들이 오실 때 내가 그와 같을 줄 믿기 때문입니다.

오, 아버지...
아버지 집의 부요함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긍휼을 구합니다.
그것은 내 육체의 소욕이 땅의 것을 연모하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때로 족한 이방인의 삶을 기웃거립니다.
오, 주여! 나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죄와 세상과 육신에 대하여 온전히 죽은 자이옵니다.
십자가에 달리오니 당신의 나라가 내게 임하게 하소서.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묵상선교회 #서형섭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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