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주해 묵상] 영원히 반목된 자를 위해 십자가 구원을 이루시다

본문: 창 33:1-20

♦오늘의 말씀

야곱은 에서를 떠난 지 20년 만에 그와 대면한다.
에서로부터 위협을 느낀 야곱은 홀로 앉아 얍복 나루에서 밤을 맞이한다.
그 밤에 어떤 사람과 씨름하였다가 환도뼈가 위골된다.
그로 인해 절뚝발이가 되었으나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을 보고 살아남은 자가 되었다.
하여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희망의 아침을 맞이한다.

야곱이 눈을 들어보니 에서가 400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다(1절).
이에 야곱은 열한 자식들을 각기 그들을 낳은 어머니와 함께 배치한다(2-3절).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을 맨 앞에, 레아와 그의 자식들을 중간에, 라헬과 요셉을 맨 뒤에 둔다.
이는 극한의 상황에서 라헬과 요셉만큼은 도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 후에 야곱은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에서에게 나아간다.
야곱의 태도는 BC 14세기 아마르나 서신에서 볼 수 있듯이, 봉건군주 앞에서 책잡힌 봉신이 취하는 저자세이다.
이는 일곱 번 발 앞에 엎드리는 태도를 통해 최선의 존경으로 예를 갖추는 태도인 것이다.

에서의 반응은 의외로 관용적이었다.
그는 과거의 앙금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을 하지 않고 야곱을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춘다(4절).
그리고 그들은 함께 울었다!
감격적인 상봉후 야곱에 의한 가족소개가 이어지고 야곱은 그들이 다 에서의 소유라고 말한다(5절).
그들이 에서에게 예를 갖추자, 야곱은 모든 짐승의 떼까지 에서의 소유로 하겠다고 말한다(6-8절).

에서는 만류하나 야곱은 강권하여 예물을 그에게 준다(10-11절).
이로써 두 사람간의 20년의 반목이 해소된다.
이들의 결정적인 화해는 야곱이 그의 형 에서의 얼굴을 하나님의 얼굴로 보듯이 봄으로써 이루어진다(10절).
물론 이 말은 에서의 얼굴 자체가 곧 하나님의 얼굴 자체라는 말은 아니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에 대한 영적 체험이라고 할 수 있다.
도저히 용납 받을 수 없는 자에 대해 용서하는 얼굴과 하나님의 용납하시는 얼굴은 긴밀한 인척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또는 에서로부터 오는 수직적인 용서보다 이 수직성이 수평적 화해를 요구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한편 반목하는 형제의 얼굴을 통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구원의 최선의 조건이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마 25:4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죄인인 우리들과 의인 그리스도는 영원히 반목하는 형제이다.
거룩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와 거룩함을 입은 우리는 다 한 근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히 2:11).
그러나 의인 그리스도는 죄인인 우리를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용납하셨다.

하나님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죄인인 우리를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용납하셨다.
이로써 하나님 자신을 의롭게 하시고 아들을 믿는 자를 의롭게 하셨다(롬 3:25-26).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이다(롬 5:8).

평화로운 상봉이 끝나고 에서는 야곱에게 세일로 함께 가기를 청한다(12절).
하지만 야곱은 에서가 먼저 갈 것을 요청하고 자신은 숙곳을 지나 가나안 땅 세겜에 이른다(13-18절).
그는 장막을 친 곳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은 백냥(크시타)에 사들인다(19절).
거기에 제단(돌)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 이스라엘'(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라고 부른다(20절).

이로써 가나안의 만신전(판테온)의 최고의 신이며 창조의 신 '엘'은 이스라엘의 신이 된다.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이 가나안에 토착화되어 그곳을 다스리는 것을 상징한다.
여기서 한 가지 제기되는 문제는 왜 벧엘이 아닌 세겜이냐는 것이다.
야곱은 벧엘에서 제단(돌)을 쌓고 그곳으로 돌아올 것을 서원하였다(28:20).
그런데 세겜에서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은 세겜에서 그가 당할 끔찍한 재앙을 예고하고 있는 사건이다.

하나님의 언약과 상관없이 자기가 원하는 곳에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 것은 실로 불신앙의 행위요, 망령된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운명이 감지되고 있다.
그 후에 그는 결국 벧엘로 올라간다(35:1-3).

♦묵상 기도

아버지...
심히 죄악된 인생이옵니다.
나의 죄악으로 인해 많은 사람과 등을 돌린 채 반목하고 있습니다.
나를 정당화시키고자 저들을 악하다 하였사오니 죄에 죄를 더했나이다.
이는 나를 지키고자 한, 나의 상처를 두려워한 나의 기만이옵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내 속의 어두움을 드러내나이다.

아버지여...
육신의 소욕은 죽을 몸을 지배하려는 죄의 세력에 반응합니다.
하여 한 때 선물로 허락한 이들을 미워하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에 따라 오고 가는 이들을 내 뜻대로 판단하며 멸시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요! 그 누구에게도 용납 받을 수 없는 자입니다.
그런데 어찌 거룩하고 의로우신 당신께 용납 받을 수 있사오리이까!

아버지...
극심한 이기주의자인 나 조차도 용납할 수 없는 자입니다.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갈수록 죄의 세력을 감당하기 버겁습니다.
주여! 나를 죽이소서. 아들의 십자가에 못박아 주소서.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 자로 살게 하소서.
나를 드러내고 심지어 나를 지나치게 보도록 부추기는 죄의 세력을 멸하소서.
십자가에 죽은 자, 멸시와 천대만을 자랑합니다. 나를 당신의 품에 감추어주소서.
이 날, 당신의 얼굴 빛을 내게 비추어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묵상선교회 #서형섭목사

지금 인기 많은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