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기독교 진리가 여타 종교와 가는 독특성은 '복음'에 있다.
모든 종교는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는 자력구원에 근거한다.
다만 불교에서는 자기가 없는 '무아'(無我)를 '견성'(見性)하는 것(깨닫는 것)이지만, 이 또한 자기 힘으로 깨닫는다는 점에서 '자기 힘'에 근거한 종교이다.
만일 기독교에서 '복음'을 배제시키면 기독교 역시 다른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종교의 영역'에 속하고 만다.
그렇다면 기독교 진리에서 '자기 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하나님과 분리된 인간에게서 나오는 힘으로, 하나님과 무관한 영역에서 나오는 힘이다.
하나님과 분리된 것이 죄인의 실상이고, 죄인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죄를 짓는 일외에 없다. 사람이 볼때에 선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떄에는 악한 것이다.
나무에서 열매가 저절로 맺히듯이 죄인은 저절로 죄를 짓는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이며,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다. 즉, 존재적인 죄인은 행위적인 죄를 저지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과 분리된 죄인이요, 그래서 궁극적 존재, 하나님을 상실한 자요, 전적으로 부패된 자임을 깨달은 자는 '자기 힘'으로 사는 것을 그친다.
그러나 자기 존재가 철저히 죄인인 것을 자각하지 못하면 여전히 '자기 힘'으로 선한 행위를 하려고 시도한다.
이같은 시도 역시 어디까지나 자기 기준의 선함이지, 하나님 기준의 선함에는 결코 이르지 못한다.
유대인들은 존재의 전적 부패를 깨닫지 못해,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울도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그리스도 앞에 서보니, 자신이 존재가 뿌리채 죄인인 것을 발견한 것이다(갈 2:17).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죄인인 것을 깨닫기 위해 주신 것임을 알게 되었다(롬 3:20, 롬 7:7).
지금껏 율법을 지키려 했던 '나'는 도리어 율법에 의해 죽임당하기에만 합당한 죄인이었던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발견된 나는 누구인가! 율법의 의해 재판을 받고, 율법에 의해 죽음으로 규정된 자이다. 이것은 바울뿐 아니라, 아담이후 모든 사람의 실존이며, 운명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 없으신 자기 아들에게 우리가 당해야 하는 죽음을 대신 당하게 하셨다. 이것이 복음이다. 내가 바로 율법에 의해 죽어야 하는데, 아들이 대신 죽으심으로써 나의 죽음이 집행되었고, 그래서 나도 율법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율법에 의해 죽음이 선고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고후 5:14).
그리스도안에 모든 사람이 있고, 모든 사람 안에 내가 있다.
그리하여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갈 2:20).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지금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미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죽은 자이다.
자아가 죽은 것이며, 하나님을 믿어온 '나'라는 주체가 죽은 것이다.
자아, 자기가 죽었음을 알고 믿었기에 더이상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신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은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자기'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이것은 다른 복음이다.
이들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을 믿어, 어리석을뿐 아니라, 신앙의 괴로움만 더했던 것이다(갈 3:3-4).
"성령 안에서 살기 시작하다가 이제 와서 다시 자기 힘으로 살려고 하다니, 여러분은 참으로 어리석습니다"(3절)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자아, 그런데 죽은 자아가 다시 산다면, 그리스도께서 왜 죽으셨겠는가! 그의 죽음은 헛되고 무익할 죽음이 되지 않는가!(갈 2:21).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은혜를 잊고 스스로 힘으로 하나님을 신앙하는 가르침을 따르고 있다(1절).
이에 바울은 '너희가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을 받았는데, 이제 육체로 마칠 것이냐'라고 하면서 이들을 각성시킨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 복음의 효력은 믿고난 이후에도 삶의 전 영역을 지배하는 영적 원리이다.
그리스도로 살지 않고 나로 살며, 나의 힘으로 믿는 것은 '많은 괴로움'만 부른다,
이는 아무런 유익도 없는 부질없고 헛된 고통이다.
'나'로부터 나오는 힘으로 '하나님'을 믿으려는 것.
이것은 하나님 영역의 침범이며, 이치의 반역이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의 영역안에 거한다는 말인가!
믿게 하고 능력을 행하는 것은 오직 자기가 죽은 십자가 복음으로 말미암는다.
자아는 십자가에 죽어야 하고, 인간의 힘은 완전히 무력해져야 한다.
복음을 듣고 믿는 것, 이는 신앙의 시작일뿐 아니라, 신앙의 전 과정을 맥락하는 영적 원리이다.
유대인들이 자랑하고 자부하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율법의 행위가 아닌 복음을 듣고 믿었다(6절). 그의 믿음은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믿는자의 표상이다.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라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8절).
복음은 세대와 종족을 초월하여 하나의 진리이다.
아브라함이 복음을 듣고 믿어 의롭게 되었고, 아브라함으로 인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는다(9절).
이 복은 자기 힘이 아닌, 하나님으로 사는 복이며, 영적이고 영원하고, 창조 때부터 하나님이 주시고자 한 복이다.
오늘도 나는 이 복을 전하는 자리에 서 있다(제주 아라교회 복음집회 2일째).
나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었고, 그리스도로 산다고 고백함에도 불구하고,
오늘 갈라디아 교인들처럼 내 힘으로, 내 생각으로, 내 경험으로 사역하는 현실속에 갇혀 있다.
내게서 나오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괴로움을 더하고 무익한 수고만 가져온다.
이 시간 내가 먼저 복음을 듣고 믿는 자리에 선다.
나의 실체는 율법의 저주에만 합당하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내 안에 사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의 존재만 드러내는 것,
이것이 바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행하는 사역이다.
복음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복음으로 인해 하나님 존재를 드러내는 오늘의 사역이 되기를 구한다.
♦묵상 기도
아버지.
복음을 듣고 믿는 것만이 진리임을 고백합니다.
매 순간, 나의 힘으로, 나의 방법으로, 나의 경험으로 하고자하는 마음이 나올 때마다
내 앞에 밝히 보이는 십자가, 내가 죽은 십자가를 보게 하소서.
저주와 죽음만 부르는 '나'를 멸시하고, 옛 사람의 나를 수시로 십자가에 못박으며,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로 영혼들을 섬기게 하소서.
'내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게 되면 심한 괴로움, 무익한 고통만이 남습니다.
이 종을 세우셨사오니, 성령으로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영혼들이 듣고 믿어,
아브라함의 복, 하나님을 존재로 만나는 일상이 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