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하나님은 야곱이 라반의 집으로 갈 때 벧엘에서 나타나 말씀하셨다.
그와 함께 있어 그가 어디로 가든지 그를 지키며 그를 이끌어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28:15).
그리고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것을 다 이루기까지 그와 함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야곱이 처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약속은 신실하게 성취되나 약속의 담지자인 야곱은 상황 앞에서 바람에 나는 겨처럼 흔들린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항상 함께 하신다.
야곱이 라반과 헤어진 후 길을 가는데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를 만난다(1절).
야곱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의 진지'(the camp of God)라고 하고 그 땅 이름을 마하나임으로 명명한다(2절).
마하나임은 '두 개의 진지'(two camps)라는 뜻으로, 모든 종족과 유목집단이 자기 진지(camp)를 가지고 있듯이, 하나님의 사자들도 자기 진지를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
여기서 마하나임은 야곱이 약속의 땅에 가까이 옴으로써 하나님의 진지, 곧 하나님의 영역에 가까이 나아감을 보여주고 있다.
야곱은 마침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세일 땅 에돔에 이르렀다(3절).
그곳에는 20년 전 자기가 속인 형 에서가 거주하고 있었다.
야곱은 형 에서를 속인 일로 인해 그로부터 살해의 위협을 당했고 그것을 피하고자 집을 떠난 것이다.
여기서 야곱은 에서와의 일이 20년이 지났어도 해결되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다.
그는 에서와 맺힌 20년의 한(限)을 해결하기 위해 주도권을 가지고 대처한다.
먼저 야곱은 형 에서와 자기의 관계를 주(아도나이) 종(에베드: 노예)의 관계로 규정한다.
그리고 사자들을 에서에게 보내 종이 주께 은혜입기를 원한다고 전갈한다(4-5절).
"내 주께 은혜받기를 원하나이다"(5절)
그런데 사자의 회보에 따르면 에서가 400명의 부하를 데리고 야곱에게 오고 있다고 한다(6절).
에서의 의도는 직접적으로 언표되고 있지 않으나 그로 인해 심히 두려워하는 야곱의 태도로 보아 야곱을 치기 위해 오고 있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전쟁을 치르는 군대단위를 400명으로 정하고 있는 것도 그러하다(삼상 22:2; 25:13; 30:10).
그런데 야곱은 확실히 야곱이다.
위급한 상황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자기 할 바가 무엇인지 그것을 행한다.
일단 자기와 함께 한 동행자와 짐승들을 두 떼로 나누고 절반을 잃더라도 절반은 건지겠다는 생각으로 대비책을 세운다(7-8절).
이어서 조상의 하나님께 '언약'을 근거로 에서로부터 건져줄 것을 간구한다(9-12절).
야곱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어떤 주석가들은 13-20절이 이전 절과 별개의 기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밤을 지새운 야곱은 자기 소유 중에서 예물을 택하여 여러 떼로 나누어 에서에게 보낸다(13-16절).
야곱은 예물을 단계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에서의 분노를 단계적으로 누그러뜨리고자 시도한다.
여러 단계의 예물을 보낸 끝에 최후로 야곱 자신이 나아갈 것이다.
그런데 야곱은 에서와의 근본적인 화해보다 자기 얼굴(히, 파님)을 잘 대해 주기를 원한다.
즉 자기 얼굴 앞에 예물을 보내고 그것으로 에서의 얼굴을 가린 후에 에서의 얼굴을 보기 원한다.
이로써 에서가 예물로 가린 자기 얼굴을 가리어줄 것이다.
"내가 내 얼굴(파님) 앞에 예물을 보내어 그(에서)의 얼굴(파님)을 가릴 것이다(히-카파, 영-cover). 그리고 그 후에 그(에서)의 얼굴(파님)을 볼 것이다. 그리하면 그(에서)가 내 얼굴(파님)을 받아줄 것이다"(20절, 원문번역).
20절과 21절에 '얼굴'(파님)이라는 단어가 5번씩(20절-4번, 21절-1번)이나 언급된다.
이는 야곱의 의도가 다른 것이 아닌 '예물'로 '얼굴'을 가리고자 하는 것을 강조한 셈이다.
물론 후에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브니엘'(파님+엘)을 예시해주고 있다.
선물은 야곱의 얼굴(파님) 앞서 가고 그는 무리 가운데에서 밤을 지낸다(21절).
야곱은 에서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을 심히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자기가 20년 동안 획득한 선물을 통해 자기 얼굴을 가리고 에서의 얼굴도 가리고자 한다.
하지만 야곱의 두려움은 선물(존재물)을 통해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을 대면할 때 제거된다.
야곱은 지팡이 하나로 요단을 건넜으나 두 떼나 되는 존재물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20년 전 자기가 속였던 에서 앞에서 비존재의 위협에 사로잡히고 있다.
그 많은 존재물이 무의미하게 되었고(영적 비존재), 정죄감과 죄책감에 사로잡히고(도덕적 비존재), 무엇보다 스스로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운명 앞에서(존재적 비존재) 두려워하고 답답해하고 있다.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자기가 얻은 존재물로 자기 얼굴을 가리는 것이었다.
나아가 에서의 얼굴까지 가리고자 한다.
두렵고 답답하고 불안한 실존의 비참함을 존재물로 가리려는 시도!
그것은 비단 그 뿐만이 아니다. 아담 안에서 하나님과 분리된 모든 인생이 가는 길이다.
아담이 에덴에서 타락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무화과 잎으로 만든 치마로 비참한 존재를 가리는 것이었다.
아담 안에서 함께 죽은 인간은 각양의 존재물로 자기 얼굴을 가리는 존재이다.
그것은 오페라의 유령에서 나온 에릭처럼 가면으로 흉측한 얼굴을 가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 품을 떠난 인생은 존재물의 가면으로 비참한 얼굴을 가리는 실존이 된 것이다.
그의 인생은 비존재와 피조물의 위협 앞에서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더욱 더 강고한 가면을 동원하여 그것을 면하고자 한다.
그 끝은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영의 실재에게 명령하는 데 까지 이른다.
이렇듯 사람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기까지 존재물로 자기 얼굴을 가린다.
특히 자기 얼굴을 가리는 '체면'(體面)이 '문화'로 자리매김을 한 한국사회는 이 일에 극렬하다.
체면으로 인해 죽기 살기를 거듭한다. 몇 해 전 카이스트 학생이 성적을 비관하여 자살하였다.
이를 두고 서울대 모교수는 한국사회가 그를 정서적으로 살해했다고 말했다.
한국사회가 절대적으로 여기는 체면문화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어디 한국사회일뿐이랴!
그것을 초월해야 할 교회마저 체면문화에 예속되어있다.
어느 노목사님은 세상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있다며 탄식하셨다.
그 말이 새삼 가슴 아리게 들려옴은 어찌됨일까!
많은 신자들이 세속과 성속의 각양 존재물로 비참한 실존을 가린다.
야곱처럼 언약 안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얼굴'(브니엘)을 보기까지 그러하다.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지성소로 들어가, 그 얼굴을 보기까지 그러하다.
♦묵상 기도
아버지여...
참으로 허탄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눈 붙일 겨를도 없이 달려왔습니다.
쉬는 것조차 죄책감을 느끼며 살아왔습니다.
무엇을 위해 그리하였습니까!
각양의 존재물로 나의 얼굴을 가리고자 함이 아니고 무엇이었습니까!
생명보다 사람들의 체면을 중시했던 허망한 인생이었습니다.
아버지...
그대로 끝나도 당연한 인생, 어찌 찾아오셨습니까!
나를 벌거벗기심은 나를 당신의 품에 두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나를 심판하심은 아들의 죽음과 무덤에 두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어 당신의 얼굴을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비참한 상황이나 벌거벗은 자의 영혼은 순결했습니다.
귀로 들었던 당신을 눈으로 보았나이다.
아버지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은 십자가로 달려갑니다.
육신의 소욕은 생명의 사역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삼고자 합니다.
다시 내 얼굴을 의식하게 하고 내 얼굴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다시 사역의 종이 되지 않게 하소서. 나를 감추소서.
드러나는 것은 십자가의 수치와 멸시뿐이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 참여하는 것만이 저의 자랑이옵니다.
아들 안에서 비추시는 당신의 얼굴을 앙모합니다.
저의 얼굴을 멸하시고 당신의 얼굴만을 비추소서. 저는 주의 종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