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바울은 그의 존재와 생의 의미가 복음으로 새로워졌다. 그는 30대 초반 유대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는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1:16).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구원의 시점은 물리적 시간을 초월한 창세전이며(엡 1:4), 태어나기 전이다. 구원의 시점을 물리적으로 산정할 수 없음이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 구원받았다'고 단정하는 것은 탈시간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도발적인 주장이다.
구원과 관련한 중요한 시점은(카이로스 - 의미의 시간)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 즉 "복음을 계시로 깨달을 때"이다. 바로 이 때가 태초부터 계획되고, 모태에서 부르신(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때이다. 그래서 계시된 복음을 깨달은 자는 모태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받은 자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언제 구원받았느냐?'는 질문은 무모하며, '언제 복음을 계시로 깨달았느냐? '라는 질문이 적합하다.
구원의 은혜는 하나님 안에서 이처럼 부요하다.
출생과 성장 과정의 질곡이 남달리 컸던 나, 인간적으로 볼 때 역기능 가정에서 출생하고 자랐지만, 하나님은 태초부터 나를 선택하셨고, 나는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하나님의 은혜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할렐루야!
바울은 그렇게 계시로 깨달은 복음을 지체없이 전하였다.
바울의 복음 전도 여정은 누가에 의해 사도행전에도 기록되어 있다. 갈라디아서 1장 후반과 2장 전반 부분은 사도행전의 기록과 겹치고 있다.
단지 누가는 이 부분을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반면, 바울은 직접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십사년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을때(갈 2:1). 사도행전 14장 말미와 15장 전반부는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언급한 예루살렘행을 구체적으로 증거한다.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 교회의 파송을 받아 구브로,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에서 복음을 전한후 다시 안디옥 교회로 돌아온다(사도행전 13-14장).
이들은 교회 앞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 일과 이방인들이 은혜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일들을 보고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행 14:27).
그런데 유대로부터 안디옥 교회로 내려온 지도자들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행 15:1).
이에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는 위협을 당하게 되었고,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에서 내려온 지도자들과 심한 다툼과 변론을 하게 된다(행 15:2).
안디옥 교회는 이를 수습하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몇 사람을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보낸다(행 15:2).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에서, 자신의 신앙에 근거하여 자신의 언어로 예루살렘에 올라간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은 계시를 따라 올라가 이방 가운데 전한 복음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제시한다. 그가 전한 복음은 할례를 행하는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복음의 진리'이다. 그 표징으로 할례받지 않은 헬라인 디도를 동반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 앞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다. 갈 2:4절에서 언급한 '가만히 들어온 거짓형제들'은 이방 지역인 안디옥 교회에 와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며 복음의 진리를 거스리는 유대 지도자들이었다(행 15:1).
바울은 그들에게 한시라도 복종하지 않았다(5절).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예루살렘에 와보니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부터 따랐던 제자들을 비롯, 예수의 형제, 영적으로 유력한 자들, 고귀한 자들, 중요한 사람들, 이름만 들어도 위압감을 느끼는 이들이 적잖이 있었다.
세상에서도 권위와 명성, 위엄을 가진 자 앞에서는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지고, 위축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바울은 풋내기 사도며, 떠돌이 전도자이었으나, 예루살렘에 있는 영적인 거인들, 중요하고 고귀한 지도자들 앞에서 압도당하거나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저 귀하다고 하는 지도자들도 내가 전하는 복음을 바꾸지 못했습니다(6절, 쉬운 성경).
그는 중요한 사람, 주목받는 사람과 편승하여 자존감을 세우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진리의 사람'으로 우뚝 서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기둥처럼 중요한 야고보와 게바(베드로), 요한은 풋내기 전도자인 바울, '그에게 주신 은혜'를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9절)
이들은 예수께서 갈릴리에서부터 부활승천하시기까지 따르던 제자들이며, 야고보는 예수의 육신의 형제이다. 이들은 이제 예루살렘의 지도자가 되어 위엄을 가진 교회의 기둥들이 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예루살렘의 다수가 따르던 행위로 말미암은 구원이 아닌, 바울이 깨닫고 전한 '복음의 진리'를 알아보고 거기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는 진리 앞에 하나가 된 아름다운 만남이 아닐 수 없다.
이 이침 유명하고 권위있는 영적 지도자들 앞에서 나는 어떤 존재이며,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 사뭇 진지하게 묻게 된다.
내 안이 수치심과 열등감은 유력한 사람, 중요한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들 앞에서 예민하게 반응한다. 시기와 부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위축되고 위압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것은 나의 솔직한 옛 사람이다. 한편으로 외모로 볼때 중요하지 않은 사람, 하찮은 사람은 쉽게 대하기도 한다.
또한 유력한 자들 앞에서는 복음의 진리를 당당히 전하기보다 적당히 타협할 때도 있었다. 국내외 교회에 많은 집회를 다니면서, 사람과 상황, 교회들의 요구에 메시지를 맞추기도 한 것이다.
진리의 사람, 바울은 저 유력한 지도자들이라 해도, 내가 전한 복음, 계시된 복음을 바꾸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지 않았는가! 진리를 타협하며 행했던 모든 일들이 심판받았고, 나 또한 배설물로 여겼으나, 나의 옛 사람은 여전히 펄펄 살아있음을 알기에 두려움과 떨림이 있다.
이 아침, 나의 현재 모습이 외적인 모습으로 볼때 초라하고 볼품없지만, 계시된 복음을 알기에 오직 '진리의 사람'으로 서기를 원한다. 통합된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가벼이 여기지 말자.
내 속의 옛 사람, 그로 인한 수치심과 열등감으로 인해 복음의 진리와 타협하는 것은 간음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중요한 사람'이기 보다 '진리의 사람'이 되기를 소원한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에게 주신 은혜는 고귀하다. 특별히 복음을 계시로 깨닫게 된 이들은 그의 외적인 모습으로 판단되어서는 안되며, 경외감으로 사랑으로, 존귀히 대해야 마땅하다.
중요한 사람이 아닌, 오직 진리의 사람이 되어, 당당히 복음만을 전하며, 하나님이 주신 각 사람에게 주신 은혜를 귀히 여기며,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는 진리의 삶을 살기를 간구한다.
♦묵상 기도
아버지.
나의 구원이 태초부터, 모태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이 큰 은헤를 등한히 여기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중요하고 유력한 사람들앞에서 위축되는 옛 사람, 수치심과 두려움, 열등감을 십자가에 못박습니다.
겉보기에 중요하고 유력한 사람이기 보다 복음의 진리를 변호하는 사람으로 살기를 원합니다.
고독하고 비참한 상황이지만 내게 주신 은혜를 알아주는 이들로 인해 감사합니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를 귀히 여기며 생명같이 소중하게 대하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