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바울은 고린도전서의 말미에 부활신앙을 심도 있게 다룬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도들이 전승하고 자신이 전한 복음의 핵심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부활이 핵심인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었다.
또한 지금도 그 복음 안에 견고히 서 있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하거나 부인한다면 사도들이 전파한 것이나 그것을 받아들인 믿음도 헛것이 되고 만다.
기독교의 부활은 헬라종교가 설파한 영혼불멸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가 죽은 후 그 몸이 부활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은 자가 가운데 살아나게 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또한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죄 가운데 살다가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이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하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20절).
사망이 아담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듯이 부활도 그리스도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다(21절).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는다(22절, 쉬운성경).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에는 정한 순서가 있다.
먼저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는 그리스도요, 그 다음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일어났고,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이다.
그러고 나서 종말이 임한다.
그 때에 그리스도는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친다(24절).
그는 그전까지, 곧 모든 원수를 자기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할 때까지 왕노릇을 하신다(25절).
그에게서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다(26절).
성경에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복종시키셨다고 기록하고 있다(27절, 시 110:1 인용).
여기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에 두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은 당연히 만물 안에 속하지 않는다(27절).
그런데 하나님께서 만물을 아들 아래에 복종시키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복종한다.
곧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만물을 복종케 하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만이 만물을 다스리시도록 한다(28절).
바울은 종말에 일어날 일을 언급한 후 다시 부활 신앙에 대한 문제로 돌아간다.
만일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세례 받은 이유가 무엇인가?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자를 대신하여 세례 받을 이유가 없다(29절).
한편 사도인 바울 자신도 그러하다.
만일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는다면 복음을 전하면서 위험에 처할 이유가 없다(30절).
바울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주 안에서 그의 자랑은 매일 죽는 것이다!(31절).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가 날마다 죽음에 넘겨지면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울 이유가 없었다(32절).
세상 사람들이 외쳐대는 구호처럼 '내일이면 죽을 목숨, 먹고 마시자'고 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속지 말 것은 악한 친구는 선한 행실도 더럽힌다는 것이다(33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 것이다.
이 사실을 간과하면 하나님께 무지한 것이요, 그로 인해 모두가 수치를 당한다(34절).
본문에서 29절, 죽은 자에 대한 세례는 난해구절로 파악된다.
사실 세례의 여부가 그리스도인의 진위를 결정하지 못한다.
세례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된 자에게 베푸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이미 죽은 자를 대신하여 세례를 받는 관행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옛 종교에서 비롯된 사상을 기독교와 혼합해서 만들어낸 관행으로 보인다.
이 관행은 죽은 자의 부활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 관행에 대한 옳고 그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이 없다면 그런 관행도 무의미하다고 말하여 그들의 자기모순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신앙의 궁극적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미 이루었으나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첫 열매이나 그리스도인이 부활함으로써 신앙은 완성된다.
그러므로 신자된 우리의 부활은 신앙을 완성한다는 점에서 신앙의 의미이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이 일어날 때 역사는 종말을 고한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가 가운데에서 부활한 아들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다(빌 2:9-10; 마 28:18).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권세는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시킬 때 다시 하나님께로 환원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최후로 복종시키는 대상은 최후의 원수인 사망이다.
신자의 부활은 사망에서 승리하는 것이며 최후의 승리이다.
그것은 현재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고 우리가 부활할 때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신자의 삶은 그리스도가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시키고 하나님께 모든 권세를 돌려드릴 그 날에 맞추어진다.
즉 주 그리스도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함으로써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그와 함께 왕노릇하는 것이다.
주께서 분부한 모든 것은 복음을 전하여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이다(요 17:2, 18, 딤후 1:10-11).
이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 죽음을 무릅쓰고 사도의 직분을 다하는 것이며 소극적으로는 깨어 의를 행하는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운 것은 복음을 전하면서 당한 고난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 살 소망이 끊어지는 위험,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는 고난을 받았다(고후 1:8-9).
그러나 죽음을 불사한 것은 최후의 승리의 날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을지라도 사망이 패배하는 날이 온다. 그 날은 주께서 강림하시는 날이다.
♦묵상 기도
아버지여...
내 눈을 들어 내가 부활하는 그 날을 봅니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일상이나 그 날을 현재로 바라봅니다.
영생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적 사명에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날마다 죽는 삶은 합당한 신앙의 현실입니다.
아버지여...
복음을 전하면서 이생에 소망을 둔 것을 회개하나이다.
죽기까지 충성하다 죽게 하소서.
그 죽음으로부터 승리는 주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이옵니다.
허탄한 생각을 버리고 날마다 죽는 자 되게 하소서.
아버지...
죄의 세력은 무시로 나를 속입니다.
죽음이 전부이니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합니다.
나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힙니다.
그 날을 아는 자, 사망이 패배하는 그 날을 아는 자이옵니다.
깨어 의를 행하며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삶으로 증거하게 하소서.
그 날에 임할 당신의 승리, 만물은 당신의 것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