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바울은 고린도교회 안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신으로 교훈한다.
이제 마지막 문제에 대한 교훈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것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 어떤 사람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못하였다(12절).
어떤 이들은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살아난다면 어떠한 몸이 될 것이냐고 묻기도 하였다(35절).
바울은 부활에 대한 가르침에 있어 먼저 그가 전한 복음을 기억하게 한다.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받아들이고 그 위에 서 있는 복음을 상기시킨다.
그들이 그가 전파한 복음을 굳게 붙들고 헛되지 믿지 않으면 이 복음으로 구원을 얻는다(2절).
여기서 복음을 '받는다'(1절)와 '믿는다'(2절)는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건으로 3-5절에 열거되는 네 가지 사건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부활, 현현의 사건으로 이것을 받아들이면 그 사건이 그에게 실존적으로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다.
그 결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
바울은 이 복음을 받아서 전하여 주었다(3절).
여기서 '받음/전함'(받아서 전함)은 랍비들의 전문용어로 '전승' 과정의 신실성을 말한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가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들에 의해 전승된 복음이다.
이 복음은 '전승된 복음'으로서 그가 갈라디아서에서 유일한 복음으로 전한 '계시된 복음'과 상충된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갈 1:11-12).
그러면 바울이 전한 전승된 복음과 계시된 복음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
먼저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복음은 복음의 진리 자체를 두고 한 말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었다는 그 진리 자체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을 거부하고 도리어 그리스도인을 박해하는 자였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로 알게 되어 자신에게 구원의 사건이 된 것이다.
그런데 그가 계시로 받은 복음의 진리는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이 진리에 대한 증거는 예수를 따르며 그 사건들을 실제로 체험한 사도들에 의해 전해졌다.
바울은 사도들이 전하여준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복음으로 전한 것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다메섹 도상에서 계시로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계시된 복음'이며, 사도들로부터 전수받아 전했다는 점에도 '전승된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전승된 복음은 네 개의 독립절(헬- 호티절, 영-that clause)이 '그리고'(헬-카이, 영-and)라는 말에 의해 병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부활, 현현의 사건이 복음이다.
그런데 일부 학자들은 4번째 열거된 '현현'은 단순한 병렬절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건으로서 복음에서 제외한다(찰스 바레트).
네 개의 독립절로 구성된 복음은 한글성경에서는 애매하게 드러낸다.
그것들을 헬라어 원문과 구조가 같은 영어와 함께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들을 위해서 성경대로 죽었다는 것
(that Christ died for our sins according to the Scriptures)
② 그가 장사되었다는 것
(that he was buried)
③ 그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졌다는 것
(that he was raised on the third day according to the Scriptures)
④ 그가 게바에게 보여졌다는 것
(and that he appeared to Peter)
바레트의 견해를 감안하여 현현의 사건을 복음에서 제외한다면 복음을 믿는 것은 '롬 6:4'에서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곧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믿는 것이며, 각각의 그리스도의 사건에 연합되는 것이다.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에 연합되며, 그의 무덤에 연합되어 그와 함께 장사되어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 연합되는 것은 그와 함께 옛 사람이 죽어 죄의 몸이 멸하는 것이다.
또한 육신에 속한 자기주장 의지가 십자가에 못박혀 죄의 세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더불어 죄의 지배를 받아 지은 죄들이 그의 보혈로 사함 받고 정케 되는 것이다.
그와 함께 죽은 자는 그의 무덤에 그와 함께 장사된다.
'그리스도의 무덤'이 복음(케리그마)의 하나로 명시된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바레트).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최후의 표적으로 무덤을 예표하셨다(마 12:39-40).
또한 그는 삼일 간의 무덤의 시간을 통해 성전을 지으시겠다고 하셨다(요 2:19).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는 그와 함께 무덤에 거하며 아들을 통해 성전을 지음 받는다.
이 성전은 다윗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받은 심판이 예표한대로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심판이 집행될 때 지어진다(대상 21장; 히 4:12-13).
바울이 본 장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사건은 부활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기억할 것은 부활은 구원의 사건에서 기본적인 요소이며, 이것을 부인하면 믿음과 구원도 헛것이 되기 때문이다.
부활에 대한 본격적인 가르침(12절 이후)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신자의 부활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다른 구원의 사건과 마찬가지로 실제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게바(베드로)에게 보여졌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 보여졌다(5절).
다시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여졌고 그 중 대다수는 지금까지 살아있다(6절).
그 후에 야고보(사도가 아닌 예수의 동생)에게 보여졌고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바울 자신에게도 보여졌다(7-8절).
바울은 자신을 가리켜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한다(9절).
이 같은 표현은 비판자들의 관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그러하다.
사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다른 위대한 사도보다 전혀 뒤지지 않는다고 말하였다(고후 11:5; 12:11).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기준은 교회를 박해한 자를 사도로 세우신 그리스도의 판단이다.
그가 행한 죄악으로 보면 그는 감히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조차 하지 못한다(9절).
그러나 그가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에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그는 다른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10절).
그러나 이것은 그가 한 것이 아니라 오직 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와 다른 사도들이 전하는 것은 오직 복음이며 그들은 그 복음을 믿은 것이다(11절).
바울이 사도된 것, 그리고 사도로 수고한 것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먼저 은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이다.
나아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의 행위이다.
그로부터 확대하여 하나님의 모든 구원과 사랑의 행위를 모두 지칭하는 말이다.
그러면 그를 사도로 부르신 은혜는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그것은 '딤후 1:1'에 나오는 자신의 고백을 통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딤후 1:1).
더 명확하게 표시된 '쉬운성경'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은"(딤후 1:1).
바울이 사도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뜻은 창세전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생이다.
하나님의 뜻은 창세전 미리 정해졌으며(고전 2:7), 그것은 아들에게 주어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이다(요 5:26; 딛 1:2).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부르신 것은 창세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이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딤후 1:9).
이 은혜는 복음을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여주신 것으로 사도들에 의해 전해졌다.
"나는 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선택받았고, 또 사도와 교사의 직분을 맡았습니다'(딤후 1:11).
모든 시대 모든 사도는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됨, 부활을 전한다.
그리고 참된 신자는 이 복음을 계시로 믿어 구원을 받으며 새 생명을 얻는다.
전하는 자도 동일한 복음을 전하고, 듣고 믿는 자도 동일한 복음을 듣고 믿는다!
현재 기독교 세계는 크게 동방교회(동방정교회)와 서방교회로 나눈다.
서방교회는 다시 가톨릭교회과 개신교회로 나누어진다.
이 삼분된 교회, 곧 모든 역사적 기독교 세계가 함께 고백하는 신앙고백은 '사도신경'이다.
사도신경은 2세기 중반에서 5세기까지 점진적으로 다듬어져 오늘의 형태를 갖추었다.
이것은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사도적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이다.
곧 모든 사도들이 공통적으로 전하고 모든 신자들이 믿는 고백이다.
그런데 근본적 의미의 사도신경은 바로 '고전 15:3-5'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최초의 사도들이 만들고 전승하여 모든 유대교회와 이방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다.
신학계에서는 본 절(3-5절)을 '죽음의 형식'의 복음으로 부른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최초로 형성된 복음은 '내어줌의 형식'으로 불리는 '롬 4:25'말씀이다.
마틴 헹겔에 의하면 '내어주다'(헬-파라디도미)는 전형적인 셈족언어(히브리어/아람어) 어법이다.
그는 아람어를 쓰던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은 원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하여 넘겨졌다'(3절)라고 하였는데, 바울이 헬라어를 사용하는 고린도인들에게 헬라적 어법으로 고쳐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룰 위하여 죽었다'고 전승했다고 말한다.
♦묵상 기도
아버지...
사도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날뛰었나이다.
창세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몸을 불살랐나이다.
무지와 광란의 시간은 지나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 누운 자 되었나이다.
심히 비참한 자 되어 죽기를 구할 때 복음은 계시되었습니다.
아버지여...
전승된 복음은 듣고 믿으며 그 안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전승된 복음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파편화시켰습니다.
한 때에는 십자가만이 복음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영원에 무지하니 영원의 아버지 품으로 들어갈 수도 없었습니다.
열심을 내지만 갈수록 황폐해지는 심령이었습니다.
하오나 당신의 사랑은 이 비참한 종에게까지 임했습니다.
아버지...
나의 죽음은 아들의 죽음이요, 나의 무덤은 아들의 무덤이었습니다.
그곳에 하늘로부터 빛이 임하고 영생의 말씀이 임하였습니다.
창세전 약속하신 그 은혜로 사도가 되었습니다.
내가 사도된 것, 사도로 수고한 모든 것, 오직 당신의 은혜입니다.
무슨 자랑이 있으며 무슨 보상이 있사오리이까?
사도되어 이 복음 전하는 것만이 보상이요 자랑이옵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옵니다. 당신의 은혜이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