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고린도교회는 영적 은사가 풍성했으나 그로 인한 혼란과 무질서도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영적 은사를 경험하면서도 그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이다.
이에 바울은 그들에게 영적 은사에 대해 가르치는데, 곧 영적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고, 이를 위해 사랑으로 실천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고린도교회 안에 특히 문제가 된 은사는 방언이다.
방언은 현상적으로 보면 그들이 전에 이방신을 섬길 때 경험한 신들린 현상과 비슷하다.
물론 성령의 은사로서 방언은 하나님께 비밀로 기도하는 것으로 유익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의 덕을 세우는 것이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방언의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예언의 은사보다 못하다.
그래서 바울은 영적 은사를 구하는 자들은 예언의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하라고 권한다.
이제 결론에 이르러 방언과 예언이 행해지는 교회의 모임에 대해 언급한다.
그들이 모일 때 각각 찬송시도 있고 가르치는 말씀도 있고 계시도 있고 방언도 있고 통역함도 있다(26절).
그런데 이 모든 것을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방언을 말하면 두 세 사람으로 한정하되 한 번에 한 사람씩 말해야 한다(27절).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 방언을 통역한다.
교회 안에서의 방언은 통역을 필요로 하며 이를 위해 한 번에 한 사람씩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는 방언을 금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 말해져야 한다(28절).
예언하는 사람 역시 두세 명이 말하고 다른 사람은 그것을 분별할 것이다(29절).
그러다가 곁에 있는 사람에게 계시가 임하면 먼저 예언하던 사람은 그쳐야 한다(30절).
예언은 특정한 사람만 하지 않으며 모두가 할 수 있어야 하며, 그로 인해 모두가 교훈과 격려를 받아야 한다(31절).
그리고 예언하는 자들의 영은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제를 받는다(32절).
곧 예언의 은사는 영분별의 은사에 의해 통제된다.
이렇듯 초대교회의 모임에서는 '특정한 사람'이 '준비된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참가자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씀을 나누는 형식이었다.
성령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새로운 깨달음을 전달하기 원하시며, 성령만이 교회집회의 순서를 결정하고 바꿀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이 점에서 초대교회 예배는 성령의 감동을 따라 각자가 생명의 말씀을 나누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요일 1:1-10).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다(33절).
이것은 성도들의 모든 교회(혹은 모임)에서도 진리이다.
고린도교회의 문제는 당시 모든 교회의 문제일 수 있으며 그들에 대한 바울의 목회적 처방은 모든 교회를 향한 가르침이다.
한편 어떤 번역(우리 성경 포함)에서는 직전 구절(이것은 성도들의 모든 교회...)이 34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와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33절 '교회에서'와 34절 '교회에서'가 중복되어 있어 34절을 새로운 시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서방교회 본문에서는 34~35절을 40절 뒤에 배치하고 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할 것이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 여자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니 오직 복종할 것이다.
여기서 인용된 율법은 '아내는 남편의 다스림을 받는다'라는 말씀이다(창 3:16).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서 물을 것이다(35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35절).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난 것이냐? 유일한 백성인 너희에게만 임하였느냐?"(36절).
본 절은 32절과 관련되어 예언하는 자들이 제재를 받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특정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다른 사람에게도 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예언의 은사를 받은 자로 추정됨)나 '신령한 자'(은사를 받은 자, 특히 방언의 은사)로 생각한다면 은사를 절제해야 한다는 바울의 말을 주님의 명령으로 받아야 할 것이다(37절).
이것은 은사자들이 바울이 지금까지 가르친 이 말까지도 거스르는 것을 우려하여 덧붙인 말이다.
만일 그의 가르침을 무시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자이다(38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은사에 대한 바른 이해를 가지고 예언하기를 사모하고 방언 말하기를 계속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 있게 해야 한다(40절).
모든 영적 은사는 성령이 자기 뜻대로 나누어주는 것으로 본질적으로 선하다.
그러나 은사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으며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다.
이 점에서 가장 중요한 은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증거로서 예언의 은사이다.
무엇보다 예언의 은사는 교회에 덕을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불신자를 회개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효력을 가져온다.
그래서 은사를 사모하는 이들은 예언의 은사가 풍성하기를 구할 것이다.
그런데 방언이든 예언이든 무질서하게 사용해서는 결코 안 된다.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모든 것을 적당하고 질서 있게 사용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여자들은 더욱 삼가고 절제할 것이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34-35절)은 그 해석에 있어 많은 논란이 있다.
성경해석에 있어 위험한 것은 특정한 상황, 특정한 구절을 일반화시켜 모든 상황에 적용하려는 시도이다.
교회 안에서 여자의 침묵은 은사로 인해 교회가 무질서하게 된 특정한 상황에 주어진 교훈이다.
일단 이 교훈은 바울이 11장에 언급한 가르침과도 모순된다.
그는 이미 여자가 공적인 모임에서 기도하고 예언(설교)하는 것을 인정하고 다만 너울을 쓰고 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이다(11:5).
무엇보다 본 절은 율법을 예시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담 안의 옛 창조에 속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새 창조의 질서를 따르며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갈 3:28).
실제로 초대교회에서는 여자들이 사도 역할을 하였다.
브리스길라, 뵈뵈를 비롯하여 사도들 가운데 탁월했던 유니아가 있다(롬 16:7; '사도들에게'가 아니라 '사도들 가운데'임 - 'among the apostles').
그러면 '여자가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주석가들은 크게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한다.
하나는 34-35절이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본 절의 내용은 '딤전 2:11-12'(여자는 오직 조용하라)와 비슷하다.
디모데전서의 가르침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의 영향 아래 선지자로 자처하며 교회를 혼란하게 한 여자들을 겨냥하는 말씀이며, 이 사상을 반영하여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본다(김세윤 교수).
그 증거로 삽입되었다고 보는 '34-35절'을 빼고 33절에서 36절로 이어지는 것이 확실히 자연스럽다는 것이다.
다른 견해는 여기서 말하는 여자는 고린도교회 내의 특정한 은사자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무질서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던 여자 은사자들에 대해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고 본다.
그는 여자들도 교회에서 가르치고 기도하는 원칙을 감안하면서도 계속해서 예언을 말함으로써 무질서를 조장한 여자들에게 잠잠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미 (남자) 예언자가 계속 말함으로써 교회에 덕을 세우지 못하면 잠잠하라고 명하였다(30절).
마찬가지로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여자들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했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집에서 자기 남편에서 물으라'는 말과 관련하여 세벤스터는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바울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열띤 논쟁을 일으킬 수도 있었던 토론에 대한 열정을 우선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칼빈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 문제에 대한 논란을 종식한다.
'분별력 있는 독자라면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다루고 있는 일들은 선하거나 악한 것과는 무관한 것이고, 그 일들이 금지된 것은 단지 그 일들이 품위나 건덕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든 은사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며 성령을 통해 주어진다.
그러므로 은사는 선하며 유익하며 성도 개인과 교회에 덕을 세운다.
그러나 하나의 지체만으로 몸이 될 수 없듯 하나의 은사만으로 교회를 세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은사는 상호의존적이며 동시에 교회의 질서와 화평을 위한 사용되어야 한다.
그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아가페)을 사용되는 것이다.
♦묵상 기도
아버지...
오늘도 말씀은 나의 심장과 폐부를 찌르나이다.
하나를 알며 둘을 모르고 둘을 알며 셋을 모르는 무지한 자일뿐입니다.
선교회의 전환점에서 한낱 하나의 지체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다시 무지 속에 갇히는 것을 봅니다. 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아버지여...
선교회가 사명을 특정하면서 교회와 개인에 대한 연대와 후원을 준비했습니다.
때로 연락을 하고 때로 부탁을 하곤 했습니다.
그것은 선교회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집중한다는 명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또한 무너집니다. 저의 무지함이 드러납니다.
특정한 자, 특정한 기관의 몫이 아님을 다시 깨닫습니다.
헛것 같고 그림자 같은 인생, 안개와 같은 인생이 아니옵니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거운 짐을 내려놓습니다.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겠습니다.
아버지...
생명의 복음, 모든 사람이 알고 전하기 원합니다.
모든 성도, 모든 교회가 알고 전하기 원합니다.
이에 종은 쇠하여야 마땅하옵니다.
이것을 자부했던 선교회도 쇠하여야 합당하옵니다.
주여, 어리석고 무지한 자를 불쌍히 여기소서.
요나처럼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나이다.
내 영혼이 피곤하도록 주의 성소를 바라보나이다. 주여 건져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